제주는 지금 억새가 한창입니다. 노랗게 익어가는 감귤과 함께 섬의 가을을 가득 물들이는 두 가지 색깔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동료작가들과 함께 성산읍 고성리 2039번지 대수산봉에 올랐습니다.
표고 137. 3미터, 제주의 368개 오름 중에서도 해발이 높지 않은 봉우리로 제주올레 2코스를 걷다보면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키 작은 이 대수산봉 꼭대기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경은 몇 줄의 문장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광활함과 포근함, 그리고 평화스러운 얼굴까지 담아낸 한 폭의 그림입니다.
푸른 바다와 어울린 녹색 들판, 검은 제주현무암으로 둘러쳐진 밭담들이 섬사람들의 삶을 명징하게 증명하고 있는 터전.
성산일출봉과 우도, 섭지코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한라산 자락 오름군이 자리 잡고 있는 넓은 들이 시야에 가득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주의 속살이기도 한 이 완벽한 풍경들이 사라지질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저 들판과 바다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들과 마을의 역사가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오늘의 제주섬을 휩쓸고 있습니다.
지난 2015년, 거의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곳에 제2공항이 들어선다는 입지선정 발표 이후 수산리, 난산리, 신산리, 온평리, 고성리 등 제주 성산읍 동부지역 5개 마을의 평온은 한순간에 깨졌습니다.
수백 년을 살아온 지역주민들의 의견은 깡그리 무시된 채, 구체적 논의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제2공항 건설계획이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로로 개발정보를 입수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전국의 부동산 업자들이 몰려와 크고 작은 지역 내 부동산을 무차별 매입하는 투기열풍이 이미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이후였습니다.
4년이 지난 요즘도 제2공항 부지 근처에 가면 수많은 부동산 중개 안내현수막과 간판이 내걸린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주변 땅값이 폭등하는 동안 안온했던 지역주민들의 시간도 요동쳤습니다.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도 넉넉했던 소박한 삶의 방식도 일순간 무너졌습니다.
문제는 국책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추진되고 있는 이 사업으로 인해 수백 년 세월 너머 영위해 온 본향이자 생활터전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마을주민들의 처지뿐만 아니라, 제주도가 지닌 유일한 미래자산이라 할 수 있는 자연환경 보존이라는 가치도 상실될 위기라는 점입니다.
이 거대한 국책사업은 시작서부터 지금까지 불확실한 수치 예측과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만을 내세우며 진실을 감추고 있습니다.
국토부가 최근 환경부에 제출한 전략환경영향평가서는 사업 찬성입장만 담겼을 뿐 반대 측의 입장은 제외된 부실함이 드러났습니다.
사업추진과정에서 감춰진 진실이 언론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에 의해서 하나둘 밝혀지고 있는가하면 기존 공항의 확장만으로도 향후 항공수요 충족에 충분하다는 전문가 집단의 조언은 묵살되었습니다.
최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은 국토부의 제주 제2공항 평가서에 대해 "항공기와 조류의 충돌위험성, 소음 피해, 부지 내 동굴 등 주변 환경, 이해당사자 등에 대한 관련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적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감춰지고 묵살된 사례는 넘치고 넘칩니다. 전문가가 수립한 계획이 또 다른 전문가에 의해 그 부실성이 입증되고 있는 형국인 셈입니다.
제2공항 건설계획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수립된 것인지를 입증하는 자료들은 계속 드러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밝혀질 것입니다.
국토부를 비롯한 찬성측은 제2공항 건설이 제주도민들의 '30년 숙원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웁니다만 도대체 누구의 30년 숙원사업인지가 궁금합니다. 필자가 60년 이상 제주에서 살아오는 동안 제2공항 건설과 관련하여 단 한 번도 '숙원'이라고 표현할 만큼 도민여론이 모아진 적도 없었습니다.
투기자본과 사업 참여로 인한 이득을 얻을 것이 분명한 토건자본 세력들의 '숙원'이라하면 맞을지 모르겠지만요.
사실 이 섬에는 이미 두 개의 대형공항이 들어서 있습니다. 현재 제주의 관문인 제주국제공항 말고도 제2공항 예정부지와 인접한 지역에 국내 굴지의 항공재벌이 소유하고 있는 정석비행장이 있습니다. 조종사 훈련용 비행장이라고는 하지만 대형 747점보제트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거나 그에 준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얼마든지 활용 가능한 시설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여기에 다시 제2공항이 들어선다면 실질적으로는 3개의 대형 비행장이 들어서게 되는 꼴입니다. 항공기 이착륙에 필요한 비행구역이 중첩되어 문제가 될 거라는 얼마 전의 언론보도 내용을 여기에 다시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진단들을 감안해볼 때 현재 운용하고 있는 제주국제공항의 시설을 확충하는 것만으로도 향후 예측되는 항공수요를 감당하기에 충분하다는 국제 전문가그룹의 용역 보고서가 그냥 무시된 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최근 제주도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내용은 한가지입니다.
제2공항 건설사업이 국토부와 제주특별자치도를 비롯한 찬성측이 말하는 대로 정말 제주도민들의 '30년 숙원사업'이자 입지선정에 하자가 없는 것이 맞는지를 도민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차분히 챙겨보자는 것입니다. 이른바 공론화 과정을 밟아달라는 요구입니다.
제주도민들의 여론을 청취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공론화과정을 통해 사업추진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확인해보자는 것이지요. 5조 원이 넘는 자금이 투입되는 국책사업이라면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닐 것입니다. 그 요구를 수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백번 양보해서 공론과정을 거쳐 추진여부가 결정된다면 찬성과 반대 측 모두가 승복하는 민주적,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미 제주의 미래를 위협하는 징후들은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처리용량을 초과한 쓰레기문제, 생활하수문제는 심각한 수준을 벗어나 있습니다.
하수종말처리장 앞바다는 오염됐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썩은 바다가 되어버렸고 적정 용량을 초과한 쓰레기매립장의 두 번째 부지 확보도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거기다 제주시내는 물론 주요 외곽도로의 교통체증도 대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입니다.
제주도는 규정된 한계중량을 초과하여 적재하고 무리하게 운행하고 있는 과적화물차와 다를 바 없는 처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대형사고의 요인들이 잠복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짐작컨대 제주도가 처해있는 현재의 상황만으로도 제주도 행정당국은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입니다. 땜질식 응급처치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안들이 산적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도민들도 이미 깨닫고 있습니다. 제2공항 문제와 관련하여 도민들이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이 모든 사안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고 향후 도민들의 삶의 질에 미칠 영향이 매우 크다는 자각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국책사업이라는 이유 하나로 도민들에게, 지역주민들에게 양보만을 요구하고, 금전적 보상으로 타협해서 갈등을 무마하고자 한다면 그건 미봉책일 뿐 궁극적 해결방식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민 공동체의 회복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최근 들어 필자가 가지는 의문 하나는 '왜 우리는 우리세대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는 조급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할까' 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약간의 재산이라도 물려주려고 한평생 애쓰는 마음처럼 다음 세대를 위해서 지금 이대로의 제주의 자연, 환경적 자산을 남겨두면 안 되는 것일까요. 지금의 10대, 20대 세대들이 자신들의 삶에 맞게 예측하고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넘겨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부디 이쯤에서 개발의 삽질을 멈추어야 합니다. 잠시 시간을 두고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진정한 제주의 미래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숙고하며 의견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저들의 명분대로라면 공항부지로 예고된 200여만 평의 땅에 콘크리트를 쏟아 붙는 일은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4대강 사업의 폐해에서 드러났듯 한번 훼손된 자연을 원상회복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천문학적 비용이 투입된 전국 각지의 공항 개발사업의 결과가 예측과 어긋나 거의 폐쇄 수준에 이르자 다시 엄청난 국고가 투입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사례들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제주 제2공항이라고 그런 참담한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도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회복불가능의 상태에 이르기 전에 잠깐 멈춰 서서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되짚어보자는 것입니다.
대수산봉 정상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공항부지로 예고된 드넓은 대지와 그 땅을 감싸고 있는 오름의 능선을 본다면, 그 풍경 속에 깃들어 사는 주민들의 삶과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들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만이 이 갈등을 푸는 첫 번째 단초라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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