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결석하고 광화문 갔다. 기후를 위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결석하고 광화문 갔다. 기후를 위해!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 파업은 되지만 등교 거부는 안 된다?

"5월 17일 전국 모든 중고등학교 학생들 단체 휴교 시위. 문자 돌려주세요."

2008년 5월, 5월 17일에 '휴교 시위'를 하자는 문자 메시지가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문제로 촉발된 대규모 촛불 집회가 연일 이어지던 중이었다. 당시 교육부·교육청들은 지도를 강화하여 학생들이 그날 등교 거부를 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공문을 학교들로 내려보냈다. 검경은 문자 메시지를 처음 발송한 사람을 찾아내서 기소했다.(이후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조직적으로 준비된 것은 아니었기에, 실제로 등교 거부를 한 학생들이 얼마나 됐는지는 집계되지 않았다.

2019년 9월 27일, 한국에서도 '기후를 위한 결석 시위'가 열렸다. 전 세계적 여러 나라에서 'School Strike for Climate'라는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는, 기후 위기에 진지하고 책임 있게 대처할 것을 촉구하는 학생들의 행동의 불씨가 한국으로도 옮겨 붙은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행동이 벌어졌고, 서울 광화문 집회에는 500여 명이 모였다.

나는 11년 전이 떠올라 이번에는 교육부에서 '결석 시위'를 만류하거나 억제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진 않았나 궁금해서 언론 기사를 찾아봤다. 내부적으로 무언가 대응책을 마련하거나 억제하려 든 지역 교육청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언론 보도 중에서는 교육부·교육청이 결석 시위를 막으려 한단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서울시교육청이 '생태 문명 전환 도시 서울 공동선언'을 통해 "학교에서 학생들의 기후 위기 대응 활동을 지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다.

동맹휴학의 역사

2008년과 2019년 사이에 놓인 것은 무엇일까? 똑같이 '정치적인 의사 표현을 위해 학교를 빠지고 시위를 한다'라는 행동에 대해 교육부·교육청의 대응이 완전히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정권의 차이가 중요할 것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에 비해 현재 문재인 정부의 표현·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태도는 크게 진일보해 있다. 2008년 집회가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색깔이 뚜렷했고 이명박 정권에 위기감을 안겨준 대규모 촛불 집회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었던 반면, 2019년 '기후를 위한 결석 시위'는 비록 청와대와 정부의 책임을 묻고 있기는 하지만 더 거시적이고 전 지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차이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정권의 차이보다는 시대의 차이, 11년이라는 시간과 그간 우리 사회의 변화에 초점을 둘 수도 있겠다. 2005년 문재인 정부와 같은 민주당 정권이었던 노무현 정부 때도, 청소년들이 상대평가 내신등급제에 반발하며 거리로 나오자 교육부 등에선 청소년의 집회의 자유를 부정하며 시위를 막으려고 들었던 적이 있다. 같은 민주당 정권이지만 교육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인식과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2019년 현재 우리 사회는, 그래도 2005년이나 2008년에 비하면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이나 집회·시위에 대해서 덜 부정적인 환경이 되었다. 이는 그동안 꾸준히 청소년들이 집회나 시국선언 등 정치적 행동을 해 온 역사 그리고 청소년인권운동이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해 온 역사의 성과이다.

사실 '결석 시위'의 역사는 곧 학교의 역사와 함께하는 것으로, 한국에서만도 거의 백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학생들이 어떠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집단적으로 수업 등 학사일정 참가를 거부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동맹휴학', 줄여서 '맹휴'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쓰였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동맹휴학은 독립운동의 방식으로 또는 학생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다. 예컨대 1922년 9월 영암공립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을 한 학생들은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 조선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일, 학생을 구타하는 일 등을 불만 사항이라고 밝히며 시정을 요구했다. 1928년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학교 운영에 학생들이 뽑은 학생 대표를 참여시키라고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전개하기도 했다.

최근까지도 대학교의 경우에는 동맹휴학이란 말이 간혹 쓰이고 있다. 그러나 초·중·고등학교의 경우에는 동맹휴학이라는 말이 낯설어졌다. 대신 '휴교 시위', '등교 거부', '결석 시위' 등의 표현이 그때그때 사용되고 있다. 이는 학생들이 조직화되어서 행동하는 것, 곧 '동맹'이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점, 또한 정치적 주장의 방편으로 학업을 거부하는 행동이 드문 일이 되고 동맹휴학의 역사적 기억이 계승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벌 사유가 되는 결석과 거부

2019년 9월 '기후를 위한 결석 시위'는 동맹휴학의 맥을 부활시키는 사건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를 막으려는 정부의 노골적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은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 좀 더 긍정적으로 변화했다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은, 학교에서는 여전히 학생이 학업을 거부함으로써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행위가 일종의 일탈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번의 '결석 시위' 역시 많은 어려움과 한계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결석 시위를 준비한 '청소년 기후 행동'에서 그동안 언론 등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결석 시위에 참석한 학생들 중 상당수가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을 하고 교사의 허락을 받고 학교 수업에 빠졌다. 교사가 허락해주지 않아서 참가할 수 없었던 경우도 있다고 하고, 가족여행이라고, 어찌 보면 거짓 사유로 체험학습을 신청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학교 수업에 무조건 출석해야 하는 게 당연했던 과거에 비하면 체험학습 같은 제도가 생긴 것은 바람직한 변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교사에게 허가받은 체험학습의 형태로만 학교를 빠질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학생들의 거부 행동의 의미를 온전히 표현하기 어려운 여건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부터 현재까지도 학교 규칙 안에는 '정치활동', '동맹휴학', '백지동맹'(집단적 시험 거부) 등을 중징계 대상으로 명시한 조항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학교들 중 대다수는 단순한 '무단 결석'조차도 징계 대상으로 삼고 있고, 일수에 따라서는 퇴학 등 강력한 징계까지도 가능하다. 학교의 입장에서 결석이란 단지 학생이 수업 등 교육활동에 참석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학생으로서 해선 안 되는 일탈이며, 게다가 집단적으로 정치적 의사에 의한 결석은 중징계 대상이 될 만큼 심각한 잘못이라 보는 것이다. 즉, 학교는 학생이 주체적으로 학업을 거부할 수 있다고, 교육의 권리를 행사하는 주체라고 생각지 않는다. 이러한 편견이나 처벌의 위험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행동에 쉽게 나설 수가 없다.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학교 파업'

외국에서 결석 시위를 "School Strike"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학생들의 학업 거부는 노동자의 파업(strike)과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 비록 학생들은 임금노동계약을 맺은 것도, 노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지만, 학업을 거부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 사회의 일부를 마비시킬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지 않길 택하며 파업을 하듯이, 학생들도 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배움과 성장을 포기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비록 한국에서는 실정법과 행정부에 의해 노동자들의 파업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지만, 노동자에게 파업 등 단체행동의 권리가 있다는 것 자체는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고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같은 이유로 학생들의 학교 파업권 또한 원칙적으로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에게 파업이 자신들의 주장을 드러내고 관철시키는 중요한 수단이자 일종의 참정권이듯이, 학생들의 파업도 마찬가지이다.

전 세계적으로 'School Strike for Climate'에 참여하고 금요일마다 학업을 거부하는 학생들의 수는 수십만 명을 넘고 있다. 밴쿠버, 뉴욕 등에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파업을 하며 수만 명씩 시위에 나서고 있다. 청소년들이 정당에도 가입할 수 있고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사회이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뉴욕시 교육 당국은 시위에 참가하는 학생들을 결석 처리하지 않겠단 입장을 밝힌 적도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결석 시위가 시작되었지만 그 규모는 크지 않다. 이는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대중화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한국의 청소년들이 더욱 학교에 매여 있고 정치적 행동을 할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탓도 크다고 생각한다. 사실 교육부 등이 잠잠한 것은 아직 동참하는 학생들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만일 '결석 시위'의 규모가 커져서 수천 명, 수만 명의 학생들이 기후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고 외치며 학교에 가기를 정면으로 거부한다면, 사회적으로 '학생답지 못하다'는 손가락질과 학교의 처벌이 돌아올 광경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청소년은 학교 안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다. 교육의 의무하에 강제로 학업에 매진해야만 하는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스스로 교육에 참여하고 살아가는 주체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학교를 박차고 나올 권리, 동맹휴학의 권리, 즉 학생들의 파업권이 마땅히 인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준)

청소년의 인권을 옹호하고 요구해온 활동가들의 단체입니다. 청소년에 대한 차별과 하대, 보호를 빙자한 억압을 비판합니다. 스무 살 되어 인간대접 받는 세상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한 인간이자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