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이후 세월호가 올라오고, 남북 정상이 다시 만날 때만큼이나 한국사회가 정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든 장면이 있다. 비정규직 제로시대 선언. 대선 직후인 2017년 5월 12일, 신임 대통령의 첫 행보였다. 인천공항은 1만 명이 넘게 일하지만 정규직은 1000명뿐인 비정규직 중심의 고용구조를 지닌 공공기관이다. 대통령이 바로 그 곳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대통령이 인천공항을 방문하고 두 달이 지난 2017년 7월,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총 3단계 로드맵을 밝히며, 1단계는 중앙행정기관, 자치단체, 교육청, 공공기관 등 정부가 직접 운영, 관리하는 부문을 대상으로 시작한다. 2단계는 자치 단체 출연 기관과 공공기관 자회사, 지방공기업 자회사 등이 대상이고, 3단계는 민간위탁기관을 대상으로 한다.
이번 정책이 진일보 한 점은 직접고용 비정규직, 즉 기간제 노동자를 중심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방식에서 파견, 용역 노동자도 전환의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여기에 생명·안전 업무를 하는 노동자는 직접고용을 원칙으로 하고, 상시 지속 업무의 기준은 낮춰 대상을 폭넓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18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정규직 전환이 결정됐고 정부는 대대적으로 그 성과를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대표적인 정규직 전환 대상 사업장 중 하나인 도로공사 톨게이트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왜 도로공사 본사를 점거하고, 톨게이트 위에 올라가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걸까?
비정규직 고용이 효율적이라는 신화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고 정리해고가 휩쓸고 간 자리를 비정규직이라는 일자리로 채우는 일은 공공부문이든 민간기업이든 가리지 않았다. 직접고용은 무조건 비효율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던 시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는 외채를 전부 갚았다고 선언했고, 인천공항은 손에 꼽히는 흑자 공기업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용절감은 공공기관 평가의 중요한 척도였고 그 방식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더욱 늘리는 것이었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정책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15년 남짓, 인천공항은 혁신적으로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서비스 품질 1위를 자랑하는 공공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인천공항은 노동자를 '갈아 넣으며' 서비스품질 1위 공공기관에 올랐지만, 외주화는 비용절감에 효과가 없었다. 2017년,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발표한 '인천국제공항공사 외주용역 정규직화에 따른 비용편익분석'에 따르면 6000여 명의 비정규 노동자를 직접고용 하면 2~3년 사이에 용역업체에 지불하는 비용보다 인건비가 적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용역업체에 지불하는 비용이 오르는 것보다 임금인상률이 낮고, 직접 고용을 통해 복잡한 소통체계를 해소하고 보안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편익까지 얻을 수 있어 장기적으로도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분석은 처음도 아니고 인천공항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난 20년 동안 정부와 기업은 비정규직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 효율적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해온 효율성마저 담보하지 못하는 비정규직이라는 노동 형태는 그렇게 보편적인 노동이 되었다.
비정규직이 늘어난 진짜 이유
2018년 12월 화력발전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해마다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은 서부발전이 무재해 사업장 인증을 받으며 산재보험 감면 혜택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비정규 노동자의 산재 사건은 서부발전의 책임 범위 밖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여기서 정부와 기업이 비정규직을 선호하는 중요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하면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산업재해를 당하든, 임금이 체불되든, 일터에서 발생하는 어떤 종류의 문제가 발생해도 문제 해결이 요원하다. 업무를 관리·감독하는 관리자는 하청 업체 사장에게 따지라고 책임을 미루고, 하청 업체 사장은 자신은 아무런 권한이 없다며 발뺌을 하거나 비용이 많이 들것 같으면 폐업하고 새로운 하청 업체를 설립한다. 정규직 노동자라면 당연히 그 노동자를 고용한 사장과 업체가 책임지면 끝나는 일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책임질 주체를 세우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히는 것이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아 보이는 직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 주로 기간제 노동자의 경우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외모나 나이 따위를 지적하며 괴롭히는 상사를 만나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고충처리 절차는 적용되지 않는다. 설사 적용된다 하더라도 재계약 시즌이 돌아오면 근무 평가를 하는 상사를 두고 문제제기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산재가 발생하는 경우나 수당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기간제 노동자가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은 다음 재계약을 포기할 각오가 돼있을 경우에 가능한 선택지다.
기간제, 파견, 하청, 용역, 특수고용 등 비정규 노동의 다양한 형태는 결국 사용자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식의 차이에 불과하다. 즉 노동자의 권리를 쪼개고, 형해화 시키기 위한 방식이 비정규직인 것이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 작업 환경을 개선하고, 부당한 명령은 거부할 수 있는 권리, 정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는 특정한 노동자만의 권리도, 정규직 노동자만의 권리도 아니다. 하지만 비정규직을 고용하면 정부와 기업은 이 권리를 보장할 책임을 피할 수 있게 된다. 비정규직을 일반적 고용형태로 만들어온 20년 동안,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는 정규직만의 특권이 되고 권리를 빼앗긴 비정규직 노동자에겐 차별, 저임금, 고용불안만 남았다.
사용자 책임을 덜어낸 정규직화?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꺼내든 요구가 정규직화 요구다. 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선(善)이라서가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가 볼 때, 이러한 권리를 행사하고 보장받는 노동자의 모습이 정규직이기 때문이다. 위험한 상황에서 작업을 거부하고, 말 한마디에 고용을 위협받지 않고, 부당한 처우에 노동자가 모여서 대응할 수 있는 권리가 특권이 아니라면, 이 권리를 요구하고 이를 책임질 주체를 비정규직 노동자들 앞에 세워내겠다는 요구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지금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화 정책은 과연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사용자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이다.
공공부문 정규직화 정책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 무기계약과 자회사다. 중앙 행정기관이나 자치단체 등에서 직접 고용하는 사람은 무기계약의 방식으로 고용하고, 공공기관의 경우는 규모에 따라 무기계약과 자회사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문제는 두 선택지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아온 방식이라는 것이다. 무기계약 노동자라는 고용형태는 정규직으로 분류되지만 고용을 제외하면 고용주의 책임이나 노동자의 권리라는 점에서 기존 비정규직과 차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공공기관 자회사 역시 별도의 기술력이 없으면 그저 정부가 운영하는 인력회사로 공공기관의 책임성을 회피하기 위한 방식이 되기 쉽다는 우려를 받아왔다. 각기 다른 정규직 전환의 방식이 옳고 그른지 하나하나 따지기에 앞서, 정부가 정책의 방향성을 모두 사용자로서 책임을 최대한 덜어내는 '정규직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점을 짚는 게 중요하다. 과연 이러한 정규직화 정책으로 그간 권리라는 언어에서 비껴나가 있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권리를 되찾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톨게이트 노동자의 요구를 들을 때
톨게이트 노동자가 싸움에 나선 이유도 다르지 않다. 전국 354개의 톨게이트마다 용역업체로 쪼개져 해마다 근로계약서를 쓰던 노동자에게 '노동자의 권리'는 없었다. 정부와 도로공사는 톨게이트 노동자에게 '자회사 선택'을 강요하기 전에 그 동안 짓밟아왔던 톨게이트 노동자의 권리를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부터 노동자에게 물어야 했다. 도로공사와 용역업체는 사용자로서 책임은커녕 온갖 괴롭힘과 성추행, 해고와 재고용을 반복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부의 정규직화 정책이 시행되자 자회사 방안을 일방적으로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이런 '정규직화'는 공공부문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의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나가는 마중물이 될 수 없다.
이제라도 정부는 방향을 바꿔야한다.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들어야한다. 강요와 다를 바 없이 자회사를 선택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 자회사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톨게이트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기는커녕 특권을 바라는 집단으로 취급하며 해고하는 행태는 지금까지 열어둔 기회를 닫는 꼴이다. 비정규직 20년,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외면해온 국가와 사회의 부정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으로 읽는 세상'은 <프레시안>과 <비마이너>에 공동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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