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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근면한 일본" 신화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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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근면한 일본" 신화를 낳았다

[김시덕의 직업적 책읽기]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

"근면한 국민성"이라는 허구
하야미 아키라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

하야미 아키라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 - 역사인구학으로 본 산업혁명 vs 근면혁명>(혜안, 2006)은 역사인구학의 관점에서 일본의 역사를 살핌으로서, 오늘날 일본인의 국민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근면함"이라는 덕목이 형성된 것은 수백 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저자가 "근면혁명"이라 부르는 "근면한 일본인"의 탄생이야말로, 일본이 영국처럼 자발적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한다. "근면함"이라는 특성이 왜 일본인의 국민성으로 간주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은, 특정한 덕목에 대해 그 역사적인 변천을 고려하지 않고 "국민성" "민족성" "우리 민족의 DNA"라는 식으로 찬미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무모함을 폭로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소농자립'은 농촌사회로 점차 침투해 들어갔다. 아마도 교토와 나라 도시 주변부로부터 시작되어, 효고나 사카이 같은 도시가 가세함으로써 16세기에는 기나이 평야지대로까지 널리 확산되었을 것이다. (중략)

농민생활에 경제적 인센티브가 주어진 것은 농민의 일상행동과 의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생산에 대한 사고방식도 크게 변했다. 지금까지의 노동이 어쩔 수 없는 고역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보다 높은 경제적 보수와 보다 나은 생활을 가져다주는 일종의 '덕德'으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육체적 고통은 견딜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가족노동은 이러한 노동에 가장 적당한 것이었다. 가족은 동시에 경영을 구성하는 일원이었기 때문에 힘든 노동과 장시간의 노동은 나중에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일종의 투자였다.

일본인은 근면하다고들 한다. 이것을 일종의 '국민성'으로까지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민성'이란 것이 과연 초역사적으로 일본인이 가진 자연적 체질일까? 필자 자신은 결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이 시기 이전의 어떠한 저작에도 근로가 덕이라는 사고방식이나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에도시대가 되면 근로가 미덕으로 여겨지게 된다. 일본의 경우, 근로는 하나의 도덕으로서, 가족제도라는 채널을 통해 자자손손 전해지게 되었다(따라서 서유럽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를 통한 전승과는 다르다. 일본인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던 종교 중에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근로를 덕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장시간의 고된 노동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농민의 정신구조 혹은 현재의 일본인에 대한 하나의 평가로까지 되어 있는 근면은 이 시기에 그 원형이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91-94쪽)

물론, "근면한 국민성"이라는 허구를 믿고 근면한 국민성이 경제 발전을 낳았다고 믿는 것은 일본 뿐 아니라 한국 시민 사이에서도 널리 확인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신화에 대해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시공사, 2012)의 첫 부분에서 멕시코와 미국 양측에 걸쳐 있는 노갈레스 지역 및 남한과 북한을 비교하면서, 경제 성장은 국민성이라고 주장되는 요인과는 무관하며 해당 지역이 어떤 제도를 택했는가가 결정적이라고 지적한다.

남북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편에 드는 반면 북한은 주기적인 기근과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다. 오늘날 남북한의 '문화'가 사뭇 다르긴 해도 두 분단국가의 엇갈린 경제적 운명을 가르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유구한 공통의 역사를 자랑한다. 한국전쟁으로 38선을 따라 허리가 잘리기 전까지는 언어, 인종, 문화적인 면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동질성을 가졌다. (멕시코와 미국의) 노갈레스처럼 남북한 역시 국경이 문제다. 북쪽에는 다른 제도를 시행하는 다른 정권이 들어서 있다. 당연히 다른 인센티브가 만들어진다. 결국 국경을 사이에 두고 남북 노갈레스나 남북한 간에 목격되는 문화적 차이는 번영의 차이를 초래하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뜻이다. (96-97쪽)

근면함이라는 미덕이 에도시대 일본인들에게 침투하고, 에도시대 일본에 근대 이후의 공업화를 위한 조건이 존재했음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조건들이 존재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외부의 임팩트가 없었어도 일본이 자연히 공업화의 길로 나아갔으리라는 예측을 가능케 하지는 않는다. 자기 나라의 전근대에는 자본주의화와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는 요소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서구의 압력이 없었어도 자기 나라는 근대 국가가 될 수 있었다는 주장 내지는 환상을 한국에서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널리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주장에 큰 의미가 없음을 이 책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은 지적한다. 이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설명되는 산업혁명의 조건과도 상응한다. 요는 산업혁명은 영국이라는 나라가 역사적으로 획득한 특수한 요소들이 우연히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며, 영국에서 실현된 산업혁명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비로소 각 지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약 1700~1750년경에는 노예 노동력에 의존하던 경영이 소멸하고, 소가족 경영으로의 이행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장밋빛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하다. (중략)

필자는 에도 시대에 들어, 농민은 오히려 힘들고 장시간의 노동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를 직접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간접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 시대 농업에 사용된 가축의 수가 눈에 띄게 감소한 사실이다. 가축은 말 그대로 농업에서의 자본(stock)이라는 생산요소며, 그것이 감소될 경우 다른 어떤 요소에 의해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생산량의 증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는 토지생산력의 증대와 투하노동량의 증대에 의해 보완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축 수 감소의 일례를 들면, 노비 지방(나고야번령)에서 1660년경과 1810년경의 두 시기를 보면 (중략) 1670년대에 아직도 농경에 이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우마가 1810년대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농업경작에서 인력이 축력을 대신하게 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변화는 동일하게 공업화 직전에 농업생산량의 증대를 경험한 서유럽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점이 더욱 명확해진다. 서유럽에서의 생산량 증대는 오로지 축력 에너지의 대량투입에 의해 전개되었다. 대형의 무거운 쟁기를 여러 마리의 -최종적으로는 12마리- 말이 끌게 되면서 대규모화와 심경(深耕)을 동시에 해결하였다. 여기에는 분명히 자본 부분의 증대가 있었고, 생산량당 노동을 절약할 수 있어, 1인당 또는 노동단위당 생산량이 대폭 증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특히 이러한 경향이 현저했던 영국에서 농업혁명이라는 변화가 발생했으며 이는 산업혁명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반대로 노동 부분이 증대했기 때문에, 농민은 경제적으로 행동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로부터 공업화를 향한 주체의 형성, 노동집약적 기술발전은 적어도 대규모로는 발생하지 않았다. 에도시대의 농촌을 연구해 보더라도, 공업화의 주체 형성을 검출하기가 힘들며 그것은 조건의 성립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 점이야말로 경제사, 특히 공업화의 진행 과정에서 보이는 일본과 서유럽, 특히 영국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건의 형성은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공업화의 주체 형성이 외부로부터의 임팩트에 의해 일단 전개되자, 공업화에 대해 충분한 적응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시각은 종래의 많은 연구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138-140쪽)

하야미 아키라가 이 책에서 이용하고 있는 역사인구학은 1950년대에 프랑스에서 탄생한 학문이다. 각종 자료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과거를 연구하는 방식을 뛰어넘어, 문서에 그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는 민중의 삶을 총체적으로 살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학문은 거의 동시기에 일본으로 전해졌다. 하마노 기요시(浜野潔)의 <역사인구학으로 읽는 에도시대 일본(歴史人口學で讀む江戶日本)>(吉川弘文館, 2011)에서 역사인구학의 탄생과정과 중요성을 설명한 부분을 인용한다.

역사인구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전근대 사회는 많이 출산하고 많이 사망하는 사회였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즉, 로버트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묘사하듯이 일찍 결혼해서 출생률이 높고 사망률도 높은 사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 문제의 근대화란 이렇게 많이 출산하고 많이 사망하는 사회로부터의 탈피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런데 루이 앙리가 측정한 전근대 프랑스의 인구 지표는, 예상과는 달리 늦게 결혼한 결과 출생율도 그다지 높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시 주민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출생제한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역사인구학이 탄생하면서, 이제까지 어둠 속에 놓여있던 전근대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게 되었다.

물론 이제까지의 역사 연구가 일반 사람들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권력자와 대항한 사람들의 모습은 민중사 속에서 다수 거론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대부분 역사 사료에 이름을 남기고 있지 않다. 역사인구학은 일부 특별한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이제까지의 역사 연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학문 분야다.

유럽의 역사 연구에 큰 임팩트를 미친 역사인구학은, 때마침 유럽에 유학중이던 하야미 아키라에 의해 1960년대에 일본에 전해졌다. 크리스트교 국가가 아닌 일본에는 유감스럽게도 교구장부(parish register)가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크리스트교를 금지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료가 일본에는 대량으로 남아 있었다. <슈몬 아라타메초(宗門改帳)>라고 불리는 사료다. (3-5쪽)

일본의 역사인구학에 대해 한국어로 번역된 책으로는 하야미 아키라 선생의 책과 그의 제자 가토 히로시의 <인구로 읽는 일본사>(어문학사, 2009)가 있고, 역사인구학 책은 아니지만 중국에 대한 로이드 이스트만의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 : 중국 사회경제사 1550~1949>(돌베개, 2016년 초판 9쇄)와 한국에 대한 김두얼의 <한국경제사의 재해석 : 식민지기·1950년대·고도성장기>(해남, 2017),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인구학 자료 및 연구 가능성을 검토한 공저 <한국 역사인구학연구의 가능성>(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6) 등을 함께 읽으면 좋겠다.

하야미 아키라의 제자 기토 히로시의 <인구로 읽는 일본사>는 근면혁명의 배경으로 남녀 모두가 결혼하는 현상인 "개혼제(皆婚制)"를 든다. 개혼제가 일반화해 중세 일본의 농노가 소멸했다는 이야기다. 노예를 부리는 것보다 모든 인구가 소규모 가족을 이루어서 근면하게 농사지을 때의 생산성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설명을 읽으면, 미혼 남녀가 결혼을 회피하는 현상이 이 시대의 특유한 문제가 아니라 인류 역사상 오히려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며, 혼인율 및 출생율 감소가 반드시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만 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어쩌면 개혼제는 인류가 산업혁명으로 향해 가는 시기에 잠시 택했던 제도일 뿐이며, 개혼제가 해체되는 것이 인류의 역사적 경험에서 보았을 때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배우율(결혼한 자의 비율 - 인용자)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유부네자와촌의 예가 그 편린을 보여준다. 기소 최남단에 위치하는 이 마을에는 17세기 초기의 히고 농촌만큼은 아니지만, 17세기 말기가 되어도 비교적 다수의 후다이게닌(대대로 주인에게 종사해 온 후다이 하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1675년에는 전 세대의 3분의 1이 하인을 가지고 있었다. 하인은 인구의 13%를 점했다. 그러나 1세기 후인 1771년 하인을 갖는 세대는 5%로 감소하고, 하인 인구도 7%로 감소한다. 그 사이에 평균 세대 규모는 9.0명에서 7.2명으로 축소했다. 이러한 세대 규모와 인구구성의 변화를 배경으로 유배우율, 기혼율은 상승했다. 16세 이상 인구의 유배우율과 이별·사별을 합산한 기혼율은 남성의 경우 54%에서 70%로, 여성은 68%에서 86%로 모두 15%포인트 이상씩 높아졌다. 예속가족의 자립과 방계친족의 분가에 의한 유배우율의 상승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렇게 하여 18세기까지 인구의 대부분이 생애 한번은 결혼을 경험하는 것을 관행으로 하는 '개혼' 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128-129쪽)

한편 <인구로 읽는 일본사>는 일본과 중국 모두 쌀만 재배하던 단일작을 쌀과 보리를 재배하는 이모작으로 바꾸면서 춘궁기 사망률이 낮아졌음을 지적한다. 일본에서는 16세기 이후, 중국 절강성에서는 17세기 이후 이런 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다무라 노리요시는 시모우사의 사원 과거장으로 1394년부터 1592년까지 2백년간에 걸친 사망의 계절성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이 시대 사망의 계절형은 에도시대와 크게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세 이전형이라고 할 만한 계절형은 여름집중은 약하고, 음력 5월을 중심으로 봄부터 초여름에 걸친 사망의 피크가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 패턴은 에도시대에도 보이는데, 이것은 특히 대규모 기근으로 인한 것이었고, 언제나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5세기에 전 기간에 걸쳐 예외 없이 보인다는 것은 쌀 단경기에 식량부족이 항상적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패턴은 16세기 이후 변화한다. 5월의 사망비율이 저하되어 가고 있는데, 그 원인은 이모작으로 여름보리 재배가 보급된 것이 중요했다고 지적되고 있다. 중국에서 동족집단의 계보를 기록한 족보에서 사망의 계절성을 살펴본 연구에서도, 절강성 농촌에서 17세기에 이모작을 중심으로 하는 집약적 농업이 보급된 것이 계절변동의 격차를 완화시켰음을 볼 수 있다. (177쪽)

이렇게 농업생산성이 올라가고 사망률이 줄면서 일본과 중국 강남 지역에서는 인구가 크게 늘어나게 되지만, 이것이 반드시 산업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반도 역시 그 영향을 받아 빠르게 산업혁명 단계에 이른다. 로이드 이스트만은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 : 중국 사회경제사 1550~1949>에서, 중국은 대륙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산업 근대화에 진입했지만, 하필이면 예외적으로 빠르게 산업화에 성공한 국가인 일본이 옆에 있다 보니 그 과정이 과소평가되어왔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경우도 중국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결코 산업화에 뒤떨어진 게 아니라 영국 이외의 유럽 국가들과 비슷한 속도, 아니 그 이상의 스피드로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일본이 예외적으로 빠른 속도로 산업화를 달성했기 때문에 과소평가된 것이다.

17세기 이래 대부분의 유럽 세계는 일련의 경제적 혁명 -농업, 상업, 산업 혁명- 을 경험했지만, 중국에서는 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농업이 계속 중국인의 생활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서양인이 찾아올 때까지 중국이 "시간을 거슬러 식물같이 무기력하게 살아왔다"는 칼 마르크스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농업경제에 채용된 기술이 실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명청시대에 전국적으로 상업 활동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향상됐으며, 그 결과 농촌의 농민생활과 생산도 근본적으로 변화됐다. (중략)

유럽대륙이 영국의 산업혁명의 교훈을 받아들이는데 역작용을 했던 이상과 같은 요인들 -넓은 국토, 미발달된 교통, 생존수준에 있는 서민들, 상업에 대한 경시 등- 은 모두 중국에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 유럽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1880년대부터 1949년 사이 중국의 산업 근대화의 성과는 보통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비참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1868년의 명치유신 이래의 일본과 비교할 때 중국의 산업진보가 크게 뒤떨어졌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다. 왜 그랬을까? (중략)

일본이 급속하게 경제적 근대화를 이루고 반세기도 채 못 되어 강국의 지위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가 특별한 사례였다. 소위 더딘 근대화라고 하는 중국 쪽이 오히려 근대적 기술이 전통사회에 도입될 때에 당연히 예상되는 과정을 걸었던 것이다. (97, 257-258쪽)

일본과 중국의 전근대 경제 상황 및 산업화 과정에 대한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국 역사인구학의 가능성>을 읽으면, 일본 측은 사무라이 집단보다 그 아래 집단의 역사인구학적 기록이 더 풍부한 반면, 한국은 상층 양반 집단의 기록(족보·묘지명·문집·혼서 등)이 더 풍부하다는 차이를 확인하게 된다. 일본의 경우에는 피지배민이 기독교도가 아님을 사찰에 증명해야 했기 때문에 관련 자료가 방대하게 남아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이에 비견할만한 자료인 호적의 사실성 여부 잔존 상황이 좋지 않고, 지배집단이 남긴 기록 역시 족보가 사실성이라는 측면에서 인구 동향을 연구하는데 상대적으로 유용한 자료는 아니라는 것이다.

족보에서 확인되는 가계나 문중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계나 문중을 재구성해야 했던 후손들의 '창작품'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중략) 호적에 담긴 자료들은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호적에 실린 인구의 나이와 성비는 현실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으며 상당한 수의 주민들은 아예 호적에 기재되지 않았다. (305쪽)

특히 시민강의를 할 때마다 본인 집안의 족보에 대한 한국 시민 일반의 맹목적인 신뢰를 확인하고 당황하고는 한다. 족보를 둘러싼 문제 일반 특히 "창작품"으로서의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박홍갑 <우리 성씨와 족보 이야기 - 족보를 통해 본 한국인의 정체성>(산처럼, 2002)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가 번역한 바 있는 <고문서 반납여행 - 전후 일본 사학사의 한 컷>(글항아리, 2018)의 저자 아미노 요시히코와 동료이기도 했던 하야미 아키라 선생의 이 책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은 나의 시야를 탁 틔워주어, 여태까지 생각한 적 없는 방향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해주었다. 이 글에서 소개한 여러 권의 책들 가운데 특히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과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시간을 들여 찬찬히 읽어보실 것을 권한다.

▲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하야미 아키라 지음, 조성원 옮김)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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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문헌학자, 전쟁사 연구자, 서울답사가. 작게는 시군구(市郡區)에서 크게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집단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직업적으로 책·논문·기사를 읽는 중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는 좋은 글을 발견할 때마다 서평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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