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아직도 낙태는 처벌과 낙인의 시대에 머물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아직도 낙태는 처벌과 낙인의 시대에 머물러"

시민단체,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후 후속조치 전무" 비판

#임신 8주였던 A에게, 병원은 수술비로 135만 원을 현금으로 요구했다. 일상생활은 언제 가능한지, 회복기간은 얼마나 걸리고 무엇을 조심해야하는지 등 필요한 설명은 듣지 못했다. 비용안내와 함께 수술 날짜를 잡고 가라는 것이 전부였다. 병원의 태도에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지만 어렵게 알아낸 병원이었다. A는 "헌법불합치 선고가 났다는 걸 몇 달 전 뉴스를 보고 알았는데 나는 왜 불법수술을 찾아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했다.

#B의 전 남자친구는 B가 임신사실을 알리자 바로 연락을 끊었다.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었던 10대 소녀 B는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불법수술이나 불법약물 모두 10대인 B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비용을 마련하려고 여러 아르바이트를 구했지만 그동안 임신주수가 높아지는 것이 걱정이었다. B는 "청소년 지원센터에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낙태는 불법이라 도와줄 수 없고 출산을 할 경우에만 지원이 가능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C의 전 남자친구 또한 임신사실을 알리자 연락이 끊겼다. 수술을 받으러 병원을 찾았지만 병원은 남성의 동의를 요구했다. '남성의 동의가 있을 때는 임신 중단이 가능하다'는 법은 없지만 남성의 동의가 있을 때 처벌이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C는 "병원은 남성의 동의 없이는 수술을 해줄 수 없다고 하는데 이미 잠수 탄 사람을 어떻게 찾느냐"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밝힌 임신중지 상담 사례다. 노새 민우회 활동가(가명)는 "모두 헌재 선고 이후 이뤄진 상담"이라며 "후속조치인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여전히 구시대의 처벌법이 적용돼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그동안 논란을 거듭해온 '낙태죄'에 최종적으로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헌재의 결정에 따라 이 조항은 2020년 12월 31일까지만 유효하다. 다시 말하면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임신중지는 '범죄'로 처벌을 받는다. 시민사회는 이미 헌법불합치 판결이 내려진 만큼 조속히 법을 개정해 여성들의 고통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 개정을 주장하는 이유는 더 있다. 헌재가 헌법불합치를 선고한 조항은 구체적으로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제270조의 1항, '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 중에서도 '의사'에 관한 부분이다. 2017년 '동의 낙태죄'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던 산부인과 의사 A씨가 낸 헌법소원에 따른 것이었다. 헌재는 해당 사안과 관련된 법조항만을 살핀다. 따라서 헌법불합치도 '의사'에 관한 부분만 적용된다.

그러나 '의사'에게 적용된 논리 그대로라면 1항에 등장하는 약사와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등에 의한 낙태도 헌법소원 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 시민단체는 "모두 일일이 헌법소원을 청구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이끌어 내기에는 시간과 비용은 물론 법이 폐기되기까지 피해가 크다"며 해당 부분이 폐기되는 2020년 12월 31일 이전에 형법 제270조를 전면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7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후속조치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프레시안(조성은)

"우리의 임신중지를 지지하라"

시민단체들이 낙태죄 비범죄화를 촉구했다. 23개 시민단체의 연대체로 구성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하 모낙폐)은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이번 기자회견은 28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행동의 날'을 맞이해 열렸다.

'비범죄화'는 처벌규정을 폐지하는 것을 말한다. '합법화'는 가능하도록 하는 법제를 새로 만드는 것으로 임신중지가 합법화될 경우 임신중지가 가능한 시기와 조건 등을 법으로 규정해야한다. 시민단체는 "합법화는 또 다른 통제로 작용할 것"이라며 '합법화'가 아닌 '비범죄화'를 주장한다.

모낙폐는 기자회견을 통해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어느덧 6개월"이라며 "이후 후속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여성들이 안전하지 못한 임신중지 환경에서 많은 부작용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모낙폐는 특히 '유산유도제' 도입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점을 비판했다. 모낙폐는 "세계보건기구가 2005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고, 외과적 시술에 비해 안전해 전 세계 67개국에서 사용 중"이라며 "식약처와 보건복지부는 현행법상 근거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유산유도제 도입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유산유도제 도입은 헌재 판결 이전에 이미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23만 명이 넘는 동의를 얻었다.

또 "헌재 판결 이후 6개월간 꾸준히 '낙태죄 관련 수사와 기소를 전면 중단할 것'과 '법 개정 이전에라도 유산유도제 도입 등 가능한 정책적, 제도적 개선을 시행할 것'을 요구해왔다"며 "그러나 여전히 정부와 국회는 그 무엇도 서두르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모낙폐는 지난 6일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부처 계획과 진행상황을 묻는 질의서를 보건복지부에 보냈으나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노새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국제사회에서는 임신중지가 점차 공적인 의료서비스로 자리잡고 있다"며 "임신중지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고 각각 어떤 장단점과 위험이 있는지, 임신중지에 관한 보다 안전하고 정확한 정보들이 차별이나 낙인 없이 여성들에게 안내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이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여성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의도하는 바대로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만큼이나 임신중지 또한 자신의 삶을 지켜내고 성취해내는 데 필수적인 수단"이라며 "여성이 사회적 재생산의 책임주체로 인정받고 자기결정에 따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제반조건이 구비돼야 한다"고 말했다.

모낙폐는 기자회견을 통해 △낙태죄 관련 수사와 기소 전면 중단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필수의약품으로 지정된 유산유도제의 도입 △안전한 임신중지와 의료접근성을 위한 보장체계 마련 △피임접근성과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포괄적 성교육 확대 등을 요구했다.

▲"우리의 임신중지를 지지하라!" 기자회견에 참여한 시민이 직접 작성한 문구. "안전하게 임신과 출산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라고 쓰여 있다. ⓒ프레시안(조성은)

▲"우리의 임신중지를 지지하라!" 기자회견에 참여한 시민이 직접 작성한 문구.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로 차별이나 낙인 없이 안전한 임신중지가 이루어질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레시안(조성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