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타계하신 고 임종국 선생 생전에 취재차 몇 차례 찾아뵌 적이 있다. 천식기운이 심해져 말년에 충남 천안 산골 밤나무 과수원으로 거처를 옮겨 친일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계실 때 일이었다. 그분은 기자에게 자신이 평생을 한국내 잔존하고 있는 친일세력 연구에 바치게 된 동기를 이렇게 털어놓으셨다.
***임종국 선생이 친일연구를 결심한 이유**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해방을 맞았다. 만주에서 패한 관동군 패잔병들이 남하를 계속해 꾸역꾸역 서울로 밀려 들어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수송국민학교(현 종로구청) 뒤편에 연못이 있었다. 어느날 그곳에서 동무들과 놀고 있는데, 한 관동군 패잔병이 나타났다. 우리는 다소 겁을 먹으면서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지켜봤다. 그는 이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장총을 겨누더니 연못에 총질을 해댔다. 팡팡팡! 우리는 질겁을 해 후다닥 흩어졌다. 그러자 그는 통쾌한듯 도망가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지금 물러간다. 그러나 기다려라.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 꼭 돌아오고야 말겠다!' 살기가 물씬 풍기는 절규였다.
자라면서 이 섬뜩한 기억은 점차 희미해졌다. 그후 나는 대학에 들어가 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1965년 한일수교협상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 그들이 호언한대로 다시 돌아오고 있구나'하는 위기감을 갖게 됐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시 그들에게 먹히고 만다.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이 땅에 다시 일본을 불러들이는 매국노들의 실체를 밝히는 일일 것이다. 해방후 반민특위가 하려다 못한 일을 내가 해야 한다.'
그때부터 나는 이 일을 내 천직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오너 얘기만은 빼달라"**
임선생은 그후 불후의 역저 <친일문학론>을 필두로 일제와 야합한 각계 망명가들의 족적을 파헤치는 험난한 외길을 걸으셨다. 조선총독부 관보 등을 일일이 뒤지며 한명한명 친일부역세력의 행적을 추적했다. 친일세력 한사람한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카드가 서고 천정까지 닿을 정도로 그 양은 방대했다. 십수만명의 '친일부역 인명카드'가 이렇게 완성돼갔다.
그분의 작업은 한국의 대다수 기득권층에게 더없이 위협적인 '눈엣가시'였다. 그 분은 평생 재야에서 이 역사적 친일사를 연구하는 동안 그 흔한 한 푼의 연구비조차 지원받지 못했다. 몇몇 연구재단에서 지원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으나, '전제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받지 않으셨다 했다. 전제조건인즉 "우리 오너 얘기만은 빼달라"는 식이었다 했다.
그러다 보니 평생 돌아가실 때까지 그 분은 몇 푼 안되는 인쇄와 원고료, 가축을 키워 번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자료를 구입해야 했다. 사모님과 세 자연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직도 천안 산골길을 내려오다가 만난, 추운 겨울길에 삭풍을 헤치고 학교에서 돌아오던 나이어린 자녀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기득권층과의 전쟁이 그렇게 쉬울 줄 알았나"**
그 분은 돌아가시기 전 자신의 전공인 문학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 각계의 친일인맥을 총정리하는 <친일대계(親日大系)>라는 원고지 수만장 분량의 대작을 작성중이셨다. 임 선생은 이를 통해 정치권을 비롯해 관계, 금융계, 재계, 법조계, 언론계, 예술계, 종교계, 교육계, 여성계, 군부, 경찰 등 모든 부문을 망라해 우리 사회의 친일역사를 파헤칠 예정이셨다. 그러나 불치의 천식은 큰 일을 마치기 전 그 분을 앗아갔다.
고인이 하시던 작업은 그후 민족문제연구소 등 뜻있는 후학들에게 승계됐고, 마침내 '제2의 반민특위' 활동을 의미하는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안'이 마련돼 숱한 진통끝에 국회에 상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7일 국회에서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발했다. 문제법안에 처음부터 제동을 걸어온 야당은 물론, 정부까지도 이 법안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외교-국방-보훈처 등 관계부처들과 사전협의를 마친 김주현 행자부차관이 이날 내건 반대이유는 "조사대상의 후손들이 반발해 국민적 갈등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국민적 갈등'이란 우리나라의 친일인맥이 지난 50년간 줄기차게 주장해온 반대논리였다. 하지만 김차관도 시인했듯 진짜 반대이유는 '후손들의 반발'이다. 친일후손들은 양의 개념으로 보면 '한줌'밖에 안된다. 그러나 기득권이라는 권력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김 차관은 이번에 웅변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친일규명법 제정을 주도적으로 해온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어느 정부냐. 이게 참여정부냐"며 정부의 반란에 큰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정부 곳곳에 친일인맥의 뿌리가 얼마나 깊으며, 이들을 향한 외부 친일인맥의 입김이 얼마나 거센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현장이다.
돌아가시기 전 임종국 선생은 불과 몇십미터를 걸어도 숨이 차 운신을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진 상황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친일 인명카드'를 만드는 외롭고 힘든 작업에서 손을 떼지 않으셨다.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이번 사태를 접하고 낙망해 하는 후학들을 보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 같다.
"'기득권층과의 전쟁'이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았나. 예상됐던 저항이지. 그렇다고 좌절 말라. 황소처럼 할 일을 계속 하라. 당신들이 할 일을 계속하면 언젠가 역사는 바로잡힐 것이다. 역사를 믿고 앞만 보고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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