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전주시에 있는 '달방'에 거주하던 70·80대 세 명의 어르신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김 모 씨(83·여), 태 모 씨(76·남), 손 모 씨(72·여)는 새벽 4시께 화마를 피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비인간적인 공간에서 삶을 살다 불이나 목숨을 잃었는데, 사회적 관심은 놀라우리만치 적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일 수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 공동체 구성원인데, 왜 이다지도 무심한 사회가 되었단 말인가. 국가는 말이 없다. 국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세 어르신들의 목숨을 앗아간 곳은 임시 숙박시설을 의미하는 여인숙으로 불렸지만, 실제는 전형적인 쪽방이다. 크기가 6.6제곱미터, 딱 두 평이다. 쪽방이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 그저 최소한의 연명을 위한 곳이라고 불러야 맞다.
화재가 난 곳 모든 면적을 합치면 76평방제곱미터다. 실평수 23평이다. 방이 모두 11개다. 그곳에서 잠자던 어르신은 모두 7명이었는데, 4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았지만 3명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시신은 숯검정이가 돼 신원 파악도 어려웠다. 목숨을 건진 이들도 날마다 아니 매 순간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다.
월세 5만 원에 엇갈린 현실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 국일고시원에서 화재가 나 7명이 목숨을 잃고 11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십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간신히 피난했다. 어떤 사람은 3층에서 뛰어내려 몸을 크게 다친 사람도 있다. 뛰어내릴 수 있었던 사람은 행운이었다고 해야 할까? 창문이 있는 방에 살았으니까. 창문이 없는 방에 산 사람은 꼼짝없이 죽음을 맞아야 했다. 월세 5만 원에 목숨이 왔다 갔다 했다.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13위 국가다, 무역 규모는 1조 달러가 넘었다, G20에 속해 있다, 선진국에 진입했다, '30-50 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 클럽)에 들어갔다, 7대 군사 강국이다'라고 자랑하지만, 지옥 같은 주거 환경이 존재하는 나라가 어떻게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1000만 촛불이 바라고 꿈꾼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사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왔을 것이다. 무엇이 새로운 사회인가.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기 펴고 살 수 있어야 한다. 빈곤한 삶만큼 사람에게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없지 않은가. 안정된 집이 없는 것만큼 서러움 것 또한 없다. 날마다, 아니 순간순간마다 인권이 짓밟힌 삶을 살게 되니까.
전주 달방에 살던 노인들은 폐지와 고철을 주워 생활했다고 한다. 우리 동네에서 폐지 줍는 노인을 여럿 만났는데, 이분들은 어려운 생활에도 기초생활 수급권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양의무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폐지 줍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 또는 부모가 재산이 많거나 소득이 높다는 이유로 정부의 지원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경우가 많다.
지은 지 47년이 넘은, 불과 두 평밖에 안 되는, 월세 12만 원의 달방에 사는 사람은 극단적인 빈곤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높다. 여인숙, 또는 여관으로 불리는 곳이 달방으로 자리한 지 꽤 오래되었다. 지난해 1월 5명의 목숨을 앗아간 여관방도 달방이다. 달방은 주거 공간이라고 볼 수 없는 곳이자,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곳이다.
참사가 난 전주 달방은 기름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어 200리터짜리 경유통 2개가 방으로 연결되어 불이 빨리 번졌다고 한다. 단층짜리 집임에도 불구하고 집을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고령이 이유일 수도 있지만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70/80대 어르신이 절룩거리며 폐지 줍는 경우는 흔히 보는 풍경이다. 필자가 만나본 폐지 줍는 노인 한 분은 6가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부양의무제로 폐지를 줍지 않을 수 없었고 영양 실조에 시달렸다.
언론 매체들은 방에서 가스레인지도 썼다면서 안전불감증을 문제 삼았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끓여 먹어야 산다. 방에서 가스레인지 또는 휴대용 버너를 쓰지 않고는 끓일 수가 없다. 우리는 이때 물어야 한다. 왜 가난한 노인들은 취사 시설도 없는 곳에 살아야 했나? 책임은 누가 지어야 하나?
방화가 의심된다고 한다. 용의자가 구속되었다. 참사가 발생하면 용의자를 구속하는 것으로 일을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정부와 국회, 지자체는 '달방 참사'가 계속되고, '고시원 참사'가 반복돼도 침묵한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이다. 국가가 책임을 내평개쳐질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전주 달방 참사'가 바로 그 사례이다.
'비주택'이 아니라 '지옥고'이다
국토부는 매년 주거 실태조사를 한다. 열악한 주거 실태를 드러내는 지표로 '최저기준미달 가구'와 '비주택 거주 가구'라는 개념을 쓴다. 최저 기준은 가구원 수에 따라 면적, 방 숫자의 하한을 정하고 화장실과 욕실, 부엌이 있는지 살펴보는 지표다. 1인 가구의 최저 면적은 14제곱미터 이런 식이다. 비주택 가구는 열악한 고시원, 쪽방, 옥탑방, 지하방, 비닐하우스, 찜질방 등에 거주하는 가구를 말한다. 지난 2018년 기준으로 최저기준 미달 가구는 111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5.7%에 이르고 비주택 가구는 37만 가구이다(비주택 가구 중 고시원 거주 가구가 15만 명).
'비주택 거주'라는 개념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주택이 아닌 곳에 거주한다는 의미로, '의식주'에서 말하는 주거의 성격이 전혀 없는 곳이다. '지옥처럼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뜻이라는 '지옥고'는 지하, 옥탑방, 고시원을 합쳐 줄인 말로, 비인간적인 주거를 나타낸다. 두 평짜리, 50년 낡은 공간, 전주 달방 같은 거주 공간을 어떻게 주거 공간이라 할 것인가? 인간 수용소라고 하거나 도시 빈민굴이라 불러야 맞을 것이다. '비주택'이라는 말이 그곳에 거주는 사람들의 처절한 고통을 숨기고 인간적인 거주를 향한 변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표현이다. 더 이상 이런 용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대안이 나온다.
'비주택 거주' 공간은 극복대상이어야 한다. 우리 현실은 이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이다. 주거 현실 개혁 같은 생활 의제를 끄집어내지 않는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진보운동의 관성, 그리고 정치 사안 위주에 편중된 진보정당의 활동 관성까지 겹쳐 주거 문제는 물론 '비주택 거주'도 사회적 의제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정책은 있고 주거 정책은 없는 대한민국 현실에서 민주·진보 세력의 책임도 크다.
정부와 국회의 무관심은 도를 넘는다. 문재인 정부는 '비주택 거주' 실태를 이전 정권처럼 실태조사만 하고 정책의제로 삼지 않고 있다. 국회는 아예 관심조차 없어 문제 해결이 난망한 실정이다. 정부는 추상적인 의미의 적폐 청산을 넘어 비인간적인 생활 환경을 없애나가는 철학과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어제도 오늘도 비인간적인 주거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존감은 여지없이 땅바닥에 팽개쳐지고 있다.
전주 여인숙을 포함한 비인간적인 거주 공간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안전 점검 강화와 소화기 구비 같은 방안의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안이 없다면 인간적인 거주 보장은 불가능하다. 앞으로도 지옥고, 쪽방, 달방, 비닐하우스 거주자는 그곳에서 갇힌 채 서서히, 때로는 급속히 마모될 것이다. 비인간적인 거주를 외면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이 공범이자 주범이다.
영화 <기생충>을 봤다면 대안을 내놓아야
<기생충>(봉준호 감독, 2019)은 반지하 거주 문제를 세계에 공론화했다. 개인적으로 봉준호 감독과 영화를 함께 만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기생충>이 국제적인 상을 받은 영화로 기억되는 데 그친다면, 한국 사회는 희망이 없다. <기생충>을 본 정부 관료, 국회의원, 지자체 인사, 교수, 노동운동가, 시민운동가, 언론인이 있다면 반지하/지하방을 극복할 방안을 내고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강조하고 싶다. 반지하방, 지하방, 옥탑방, 고시원방, 쪽방, 달방, 찜질방 거주는 더 이상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들 주거 공간이 존재하는 한, 숨이 턱턱 막히는 그곳에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계속 방치하는 한, 대한민국은 영원한 후진국이자 비인간적인 사회라는 것을. 최소한일지라도 사람의 인권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우리 시대의 긴급한 과제라고 믿는다.
장관 후보자들, 국회의원들, 정부 고위관료들을 포함한 돈 있는 사람들은 널찍한 집을 서너 채씩 가지는 게 유행인 것 같다. 자신은 그렇게 살더라고 지옥고와 달방, 쪽방에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백일몽을 꾸는 몽상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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