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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우먼, 밤샘하고도 남편 아침은 꼭 챙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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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맹렬우먼, 밤샘하고도 남편 아침은 꼭 챙기죠"

[ACT!] 방송작가 노동의 문제는 곧 여성 노동의 문제

방송작가들은 언제부터 선배를 '언니'라고 부르게 됐을까?

많은 방송작가들은 선배를 '언니'라고 부른다. 물론 일을 하면서 인간적으로 친해져서도 있겠지만, 처음 만나 함께 일을 하기로 한 이후부터 호칭은 자연스럽게 '언니'가 된다. 왜 '선배'가 아닌 '언니'라고 부르는 것일까 잠시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남자 선배한테는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가? 하는 고민도 잠깐 했지만 곧 하나 마나한 고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방송작가는 여성이고 여태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남자 선배를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작가의 94.6%는 여성이다. *<2016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보고서> 방송작가유니온).

'언니'라는 단어에서 많은 것들이 느껴진다. 계약서 한 장 없이 말 한마디로, 친분 하나로 일을 시작하고 그만두는 지금의 방송작가들. 마땅한 호칭 없이 구조 밖에 있는 철저한 외부인으로, 노동에 대한 법적인 보호 하나 없이 일하고 있는 방송작가 직군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단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방송작가는 '여자가 하기 좋은 일'?

우리나라에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생겨난 기원을 살펴보면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 10월 중앙방송국(지금의 KBS)이 만들어지면서 '방송극'을 위한 '방송작가'가 생긴다. 그러다 드라마 이외의 쇼·오락·교양 프로그램에 구성작가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부터다. 1977년 박정희 정부에서 30%였던 보도 교양 프로그램 편성 비율을 보도 18.2%, 교양 38%로 상향 조정하면서 교양 프로그램 집필 작가가 한 차례 증가하고, 1980년대부터 텔레비전 방송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프로그램이 보도·어린이/청소년·토크·쇼/코미디·드라마 등으로 세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구성 다큐 분야의 구성작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초창기 구성작가들의 업무는 프로그램 구성과 내레이션 집필에 국한되어 있었다. 구성과 원고를 제외한 프로그램 기획, 촬영, 편집 등의 일은 모두 PD의 일이었다. 그러다 1990년대 SBS가 개국하면서 상업방송 시대가 열리고, 지역방송들이 잇따라 개국하면서 케이블 방송의 시대가 열린다. 방송 매체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방송 제작 업무가 세분화되고 일손이 모자라 이 과정에서 방송작가가 대거 기용되고 기획과 구성, 원고뿐 아니라 제작 전 과정을 PD와 함께 담당하게 되었다(*김연정, 2013, 지상파 방송사의 광고 수입 변화와 구성작가의 근무환경에 대한 인식 연구).

방송작가가 급격히 늘었던 1990년대의 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 방송작가들의 배경을 잘 알 수 있다.
▲ '사회주부'가 뛴다 7. 방송작가 편 ⓒ한겨레 1991년 10월 24일자​​​​
▲ 앞서가는 여성들 (2) 1인 5역의 방송작가들 ⓒ경향신문 1994년 1월 17일자

당시의 방송작가는 고학력 여성, 특히 주부들이 사회적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안성맞춤인 직업으로 소개된다. 일 때문에 밤샘해도 다음날 남편 아침은 꼭 챙기는. 1인 5역의 역할을 해내며 24시간이 부족한 '맹렬우먼'으로, 일은 열심히 하지만 동시에 여성인 자신의 본연의 역할을 잊지 않는. 당시의 방송작가협회 교육원은 '사회주부'들의 사회진출 등용문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방송작가 2, 30대 여성 쏠림 현상은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방송작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지속 돼 왔는데, 이러한 현상은 방송작가만의 특이한 노동환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 '시사프로 게릴라' 여성작가들/ 대우 형편없어…3년 경력 월80만원 ⓒ한겨레 1999년 10월 7일자

"흔히들 졸업을 앞둔 여대생들 사이에서는 구성작가가 세상 말로 인기 있는 직업이라고 한다. 이렇게 선호의 대상이 된 데에는 나름대로 현실적인 문제와 희망사항이 양면으로 복합되어 있는 듯하다. (중략) 구성작가의 대부분은 전속계약이기보다는 프리랜서이고, 따라서 생활주기가 일반 직장인처럼 일정하지 않다. 단위 프로그램에 따라 일을 하기 때문이다. 급여 역시 월급이 아니라 프로그램 단위로 받아 수입도 일정치 않다. 그것이 구성작가의 대부분이 여성인 한 이유이기도 하다."
- 정종숙 1993 한국여성연구소 전문직업에서의 여성현실 / 방송국, 방송구성작가 -


결국 방송작가들은 왜 대부분 여성이냐, 방송작가의 노동환경은 왜 이 모양이냐 하는 두 질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이야기와 같다. 애초에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여성이 하기 좋은 직업'으로 시작되고 고착화 되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하기 좋다'는 말속의 '여자'는 곧 '아내', '엄마'로 치환된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기 때문에 그다지 큰돈은 필요 없으며, 여성이기 때문에 큰 소리 내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도 묵묵히 일을 해내는. 그렇기에 더더욱 남성은 쉬이 진입하지 않게 되는 방송작가만의 특이한 노동환경. 여성의 직업이었기 때문에 노동환경 자체가 하향 평준화되는 당연한 수순을 밟고 있던 것이다.

전국여성노조에서 출범했다 사라진 방송작가들의 첫 번째 노동조합

그런 차원에서 보면 첫 번째 방송작가들의 노동조합이 전국여성노조에서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 저임금, 피디와의 차별 등이 극심했던 2001년, 마산 MBC를 중심으로 전국여성노동조합에서 방송작가들의 첫 노동조합이 만들어진다. 방송작가의 노동자성 인정을 위한 첫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마산 MBC 등 지역 방송사 13곳에서 150여 명의 작가와 진행자들이 고용계약서 작성·회사와 대화 창구 마련·채용과 퇴직 기준 마련·고료 현실화·근무 환경 개선을 주요 골자로 한 단체협상을 요청하였으나 방송사는 응답하지 않았다. 이에 노조는 경남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제출하였으나 경남지노위는 이를 각하한다. "구체적인 계약 서류가 없고 방송사로부터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고 있으며 보조 업무도 각자의 책임감이나 열의, 재계약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지 방송사가 강제한 것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노동위원회는 방송작가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한다. "근무 시간 및 장소도 실질적으로 담당 PD에 의해 결정되는 점을 고려할 때 회사와 구성작가 사이에 노조법상 요구되는 종속성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회사 측이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한 결과, 2002년 11월 19일 서울행정법원에서 노동자성을 불인정했고 항소한 결과 2003년 11월 6일 작가의 노동자성과 단결권을 부정하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임현희, 2004, 특수고용직의 여성화 사례연구 – 대구지역 방송사 구성작가직을 중심으로). 이 과정에서 마산 MBC 방송작가 전원이 해고당한다. 그리고 대법원 판례를 남기는 것을 보류하고 나중을 기약했다. 그렇게 방송작가들의 첫 번째 노동조합도 사라지게 된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지금, 많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이 인정되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고 있다. 방송작가 직군의 과거와 현재, 어떤 것이 달라졌을까?

방송작가 노동 문제는 결국 '여성 노동'의 문제

이후 2017년 전국언론노동조합에서 방송작가노조가 출범했고 많은 작가들이 모였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전의 환경보다 악화되는 모양새다. 관련된 1980~90년대 기사들을 볼 때마다 기시감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방송작가유니온이 실시한 '2019 방송작가 유노동 무임금 실태조사'에 따르면 방송 제작의 주요 단계 중 기획 단계에서 기획료를 받았다는 작가는 46.5%에 그쳤고 기획 이후 일을 해도 프로그램이 갑자기 결방하면 작가들의 80.8%가 임금을 아예 받지 못했다. 받았다는 답변은 8.8%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곳은 '결혼했으니까 일 그만둘 거지?', '남편이 돈 벌어오니까 이만큼 받아 가도 되지?'라는 얘기가 아직도 통용되는 곳이다.
▲ KBS 혁신프로젝트 '끝까지 깐다' ⓒKBS 2018년 4월 11일자 방송화면

한 프로그램을 완성시키기 위해 피디는 촬영과 편집을 담당하고 작가는 구성과 글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체적인 롤을 명확하게 나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실질적으로 방송을 제작하는 데에 피디 못지않게, 어쩌면 더 많은 것들을 방송작가가 떠맡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용 형태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방송사의 피디들은 회사에 소속된 정규직이고, 요즘에는 다수의 프리랜서 피디들도 계약을 하고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가가 방송사나 외주제작사와 계약을 하고 일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는 비슷한 노동인데 작은 차이를 둬서 한쪽에게만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노동을 정당화하는, 사업장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며 주로 한 사업장 안에서 여성과 남성의 임금 차이를 둘 때 활용된다. 이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차별이다. 이런 방식의 명백한 성차별이 1980년대부터 2019년 대한민국의 방송 콘텐츠가 세계를 주름잡는 지금까지 공고히 이어져 온 것이다.

방송사에서 고용은 책임지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방송 제작에 뒤따르는 많은 것들을 프리랜서인 작가가 책임지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길 경우 프리랜서인 작가진이 교체된다든지.) 그렇기에 여성인 방송작가들은 더더욱 인정받고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24시간 맹렬우먼'으로 살아가도록 학습화된 것이다. 결국 방송사는 '방송작가는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이다.' 라는 말로 후려치면서 방송작가인 젊은 여성들을 착취하고 굴려온 셈이다.

일하는 여성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여성 본연의 업무는 가정을 돌보는 것이고 여성들의 사회생활은 부가적인 일로 취급되어왔던 오래된 성차별의 역사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성의 노동은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잘 불리지 않는 것이다. 결국 방송작가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방송작가 노동의 문제가 여성 노동의 문제라는 점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돼야 한다.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이 아니라 '사람'이 하기 좋은 직업이 되어야 한다. 여성의 노동이라는 인식 전환이 바탕이 된 순간부터, 방송작가들의 앞으로의 투쟁 방향은 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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