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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광풍 "유엔 설립자도 IMF 기획자도 빨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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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광풍 "유엔 설립자도 IMF 기획자도 빨갱이다"

[전쟁국가 미국·3강-⑦] 닉슨-매카시를 앞세운 후버의 빨갱이 사냥

1947년 3월 26일 존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이 하원 비미국행위위원회(HUAC)에 출석해 공개 증언을 했다. 연방공무원 충성도 심사가 시작된 지 닷새가 지난 후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 해 11월 중간선거에서 14년 만에 다수당이 된 공화당과 후버의 압력에 못 이겨 충성도 심사를 수용했다.

FBI 국장의 의회 공개 증언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중대한 노림수가 있었다. 정치인과 언론을 이용해 빨갱이 사냥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1920년의 파머 레이드에서 드러난 것처럼 FBI가 직접 빨갱이를 잡아들이는 방식은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FBI가 확보한 공산주의자 관련 정보는 미국 사법제도의 검증을 통과할 수 없었다.

FBI 정보의 대부분은 사법 집행에는 사용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전향 공산주의자와 프락치 등 밀고자(정보원)의 증언은 신뢰할 수 없었고, 영장 없는 감청으로 얻은 정보는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될 수 없었으며, 소련 측 암호 전문을 해독해 얻어낸 정보(베노나 프로젝트)는 공개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후버는 정치인과 언론을 앞세워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우회로를 택한 것이다. 여론 재판을 통한 공산주의 척결이다. 팀 와이너가 후버를 '여론 조작의 달인'이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후버의 전략에 적극 동조한 정치인이 바로 닉슨과 매카시다. 이들은 FBI가 제공한 정보를 발판으로 이후 10여 년간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이념적, 정치적 내전의 선봉장이 된다.

팀 와이너에 따르면 이날을 기해 후버는 백악관과 결별했다. 그의 의회 증언은 트루먼 행정부에 대한 모반의 시작이었다. 이에 앞서 후버는 해리 덱스터 화이트, 앨저 히스 등 일부 민주당 고위 관리를 소련의 첩자로 지목했으나 트루먼은 그의 경고를 무시했다. 후버의 모반은 이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후버는 대통령의 지시도 자신의 뜻과 다를 때는 무시했다.

3월 26일 후버 증언의 요지는 국내 공산주의의 위협이 심각한 반면 트루먼 행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HUAC의 반공 투쟁에 지지를 보내며 FBI와 HUAC는 한 팀이라고 선언했다. FBI가 비밀리에 반역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 HUAC은 이를 바탕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세력을 공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날 후버와 닉슨의 첫 만남이 이뤄진다. 34살의 초선 하원의원 닉슨은 후버에게 국내 공산주의의 위협이 가장 큰 분야가 어딘지 물었고, 후버는 대학, 방송, 영화 등을 꼽으며 특히 정부 내 침투한 공산주의자가 큰 문제라고 답했다. 닉슨의 열의에 깊은 인상을 받은 후버는 청문회가 끝난 후 측근에게 "저 젊은이는 누구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겠는데"라고 말했다.

캘리포니아 시골 출신의 닉슨은 10년 전 로스쿨을 졸업하고 FBI에 지원했다가 낙방한 바 있다. 그는 하원의원이 된 직후인 1947년 2월 볼티모어의 반공 가톨릭 신부 존 크로닌을 통해 FBI와 연을 맺었다. FBI 요원은 그에게 미국 공산주의의 실태와 소련의 간첩 행위에 대한 FBI 수사 내용과 방식을 일러주었다.

크로닌 신부는 노동운동에 침투해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해온 인물로 1946년 중간선거에 앞서 '미국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침투'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국 상공회의소는 이 보고서 40만 부를 전국에 배포했고, 보고서가 일으킨 반공 열기는 공화당의 총선 승리에 일조했다.

트루먼과 후버의 정치적 내전

트루먼이 대통령에 오른 지 열흘 후인 1945년 4월 23일, 후버는 트루먼을 처음 만났다. 후버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 공산주의와의 수 십 년에 걸친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세계를 아우르는 새 정보기관의 수장이 돼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후버의 FBI는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막강해졌다. 1940년 이후 인력은 5배, 예산은 3배가 늘었으며 인력과 예산의 80%를 안보 부문에 투입했다. 1939년 6월 26일에는 FBI와 육군 및 해군 정보기관 등이 부처간정보위원회를 결성했고 후버가 영구 위원장을 맡았다.

이어 2차 대전 발발 직후인 9월 6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앞으로 FBI가 "간첩 행위와 관련된 수사를 전담하게 될 것"이며 경찰, 검찰 등 모든 사법 관리들은 "간첩, 테러, 전복 행위 등과 관련해 취득한 모든 정보를" FBI에 넘기라고 명령했다. 즉 후버가 사실상 미 정보기관들의 수장이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패권 확보가 확실해지면서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정보기관의 필요성은 분명해졌다. 후버는 FBI가 그 역할을 맡길 원했다. 반면 윌리엄 도노반, 알렌 덜레스 등 동부 금융가들은 전시 중 창설한 전략정보국(OSS)을 중앙정보국(CIA)으로 개편하려 했다. 하지만 후버가 보기에 OSS는 햇병아리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FBI는 이미 1940년 7월부터 남미 국가들을 대상으로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었다(Special Intelligence Service : SIS). 나머지 지역은 육군과 해군 정보기관이 담당했다.

이러한 후버의 꿈은 트루먼과의 첫 만남에서 깨졌다. 트루먼은 대놓고 후버를 냉대했다. 자신의 측근인 해리 본을 후버에게 소개하면서 앞으로 필요한 사항은 본과 상의하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트루먼은 FBI를 혐오했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5월 4일 트루먼은 예산담당 책임자 해롤드 스미스에게 후버가 "일종의 게슈타포를 만들려 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5월 12일 일기에는 "우리에겐 게슈타포나 비밀경찰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FBI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사생활을 염탐하고 대놓고 협박하기도 한다. (중략) 이런 짓은 반드시 멈춰야 한다"고 적었다.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앨저 히스

1945년 11월 27일 후버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는 대통령과 법무, 국무장관에게 보낸 비밀 보고서('미국에서의 소련의 간첩활동')에서 재무부 관리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전 국무부 관리 앨저 히스를 소련의 첩자로 적시했다.

화이트는 국제통화기금(IMF)을 설계한 인물이다. 그는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영국 케인스의 안을 물리치고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켰다. 히스는 유엔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즉 전후 미국의 세계 전략을 위한 정치, 경제 분야 국제기구를 만든 인물들이다. 이 두 사람이 소련의 첩자라는 애기는 미국의 세계 전략이 소련에 놀아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두 사람은 소련과 우호적인 편이었다. 화이트는 소련에서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미래를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히스에 대해 그의 공평함과 공정함에 탄복했다고 말했다. 열렬한 뉴딜주의자인 히스는 1934년 나이위원회의 수사관으로 일하면서 1차 대전 당시 군수물자생산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금융가 버나드 바루크와 군수기업 듀퐁의 경영진을 조사했다. 이 때문에 보수 세력에 미운 털이 박혔다. 후버 또한 리버럴과 뉴딜주의자를 증오했다.

2차 대전 동안 미국과 소련은 동맹국이었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민감한 정보를 공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를 간첩 행위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반역자가 미국의 중요 대외정책을 결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후버의 보고서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트루먼으로서는 보고서 내용을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여서도 안 됐을 것이다. 트루먼은 보고서를 무시했고, 1946년 1월 23일 화이트를 IMF의 미국 측 이사로 지명했다.

이때부터 후버는 트루먼을 적대시했다. 그가 확보한, 국내 정치인들에 대한 방대한 정치 정보가 그의 최대 무기였다. 대통령인 트루먼도 감히 공개적으로 도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946년 5월 29일 후버는 트루먼과 법무장관에게 두 번째 비밀 보고서를 제출했다. 미 정부 내 상당 수 고위공무원이 간첩 행위에 연루됐다면서 이번에는 딘 애치슨 국무 차관과 존 매클로이 전 전쟁부 차관보를 명시했다. 보고서를 받은 프랜시스 비들 법무장관은 자신도 FBI의 감시 대상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훗날 공화당 의원들이 애치슨을 공산주의로 공격한 것은 나름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후버가 제공한 정보가 근원이었다.

애치슨은 물론이고 매클로이를 소련 첩자로 지목한 것은 그야말로 편집증의 발로다. 매클로이는 '의장 각하(Mr. Chairman)'으로 불리며 냉전 시대 "현인들(Wise Men)'의 맏형 역할을 했던 동부 기득권(The Establishment) 출신의 국제주의자다. 한 마디로 이 시기는 후버의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리는 이념적 내전의 시기였음을 말해준다.

1946년 6월 트루먼은 FBI 수사 요원 600명을 삭감했다. 전체 요원의 7분의 1이다. 증원을 요구하는 후버의 요구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후버의 요구가 거부된 것도, 요원이 삭감된 것도 FBI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이제 후버에게는 미국 정보기관 장악과 장기간의 냉전 수행이라는 두 가지 목표 외에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트루먼과의 정치 투쟁이 그것이다. 결국 후버는 공화당 의원들과 손을 잡는다.

닉슨, 히스의 유죄를 이끌어내다

1947년 3월 연방공무원 충성도 심사로 시작된 빨갱이 사냥은 1948년 8월 앨저 히스와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하원 비미국행위위원회(HUAC)에 소환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민주당 고위 관리에 대한 빨갱이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앞서 후버는 1930년대 소련 첩자로 활동했다 전향한 미국인 엘리자베스 벤틀리와 휘태커 체임버스를 각각 7월 31일과 8월 3일에 증인으로 출석시켜 증언을 들었다. 8월 13일 청문회에 출석한 화이트는 증언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사흘 뒤 두 번째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에 앞서 화이트는 1947년 6월 19일 미 정부가 자신에 대한 공식 수사를 시작하자 바로 당일 IMF를 사직했다. 화이트의 가족들은 현재까지 그의 간첩 행위를 부인하지만 미 정부의 공식 견해는 그가 소련 첩자였다는 것이다.

한편 8월 5일 첫 출석한 앨저 히스는 간첩 행위를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두 번의 재판 끝에 결국 1950년 1월 21일 배심원에 의해 유죄가 평결됐고 1월 25일 위증죄로 5년형이 확정된다. 그의 간첩 행위는 1938년 이전의 일로 공소 시효가 지났다. 히스 역시 죽을 때까지 간첩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미 정부의 공식 견해는 그가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육군 방첩사령관 출신으로 당시 트루먼의 안보담당 보좌관이었던 스티븐 스핀간은 "후버는 제 멋대로 일을 했다. 트루먼을 비롯해 누구로부터도 명령을 받지 않았다. 하물며 법무장관 정도야"라고 말했다.

히스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닉슨이다. 닉슨은 이미 5개월 전부터 FBI의 관련 자료를 비밀리에 넘겨받아(이는 연방범죄에 해당된다) 사건을 면밀히 연구했으며, 히스에 대한 조사 소위 위원장을 자원해 히스의 유죄를 이끌어냈다. 공산주의자로 공직에 앉아 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부도덕할지언정 죄가 되지 않지만,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것은 처벌 대상이라는 게 닉슨이 주목한 지점이었다.

히스의 유죄 확정은 매카시 빨갱이 사냥의 도화선이 됐고, 닉슨에게는 출세 길을 열어 주었다. 닉슨은 그해 중간선거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2년 후에는 부통령이 된 다. 정계 입문 불과 6년만이다. 닉슨은 부통령이 된 후 후버와 매일 두 차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정보를 공급받았다고 한다.

반면 민주당에게는 치명적 악재가 됐다. 히스의 재판에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데이비스, 1952년 대선 후보 아들라이 스티븐슨, 대법관 펠릭스 프랑크푸르터 등 쟁쟁한 인물들이 증인으로 나와 그를 옹호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히스의 유죄 평결 다음 날 애치슨 국무장관이 "절대로 히스에게 등을 돌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억울함과 결백함의 호소였겠지만 오히려 불난 데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이후 수많은 국무부 외교관들이 숙청을 당했기 때문이다.

트루먼과 후버의 정치적 내전은 히스의 유죄 확정으로 끝이 났다. 후버의 압승이었다. 이후 1950년대 말까지 미국의 반공주의는 최고조에 달했으며 후버는 국가 안보에서 민권운동에 이르기까지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됐다.

한국전쟁과 후버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후버의 편집증적 우려가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미국인들은 북한의 남침을 소련에 의한 세계 정복의 시작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FBI의 권한은 대폭 확대됐다.

7월 24일 트루먼은 FBI가 미국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 수집, 사보타지, 전복 행위 및 기타 관련 사안들을" 조사할 권한을 갖는다고 공표했다. FBI는 2차 대전 때보다 더 큰 권한을 갖게 됐다.

8월 24일 후버는 트루먼에 특급 비밀 보고서를 제출했다. 조만간 소련이 미국에 핵 기습 공격을 가할 것이며 지하에서 잠복해 있는 수만 명의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그 선봉에 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전향한 미국 공산당원과 20년간 암약했던 소련 첩자 등 10명의 매우 믿을 만한 소식통의 정보를 취합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은 전쟁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소련 지도자들은 세계 정복을 위해서 무슨 수단이든 쓸 것"이며 "미소 간 분쟁이 발생하면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봉기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를 파괴하려 할 것"이다. 군대에 침투해 반란을 선동하고, 흑인들을 선동해 인종 폭동을 일으키며, 파업과 태업으로 경제를 마비시키고, TV와 라디오를 장악해 흑색선전을 퍼뜨릴 것이다. 한 정보원에 따르면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미국의 주요 산업 시설을 모두 조사"했고 "전쟁이 일어날 경우 전략적 지점들을 장악하거나 파괴할 것"이다.

또한 "소련은 자살 폭탄 테러를 포함해 미국에 대한 핵 공격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원폭을 장착한 비행기의 자살 폭격, 소규모 폭탄을 휴대한 대규모 낙하산 부대의 자살 테러가 이어질 것이다. 이미 러시아에서는 수백만의 10대 어린이들이 낙하산 부대 요원으로 훈련 받고 있다.

원폭과 수폭 부품들을 몰래 미국에 들여와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특공대원들이 원격조종에 의해 폭발시킬 것이며 "전쟁이 일어나면 2만 명의 골수 미국 공산당원들이 소련의 지령에 따라 공격에 나설 것"이다.

후버가 이 보고서를 제출한 날은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원폭 비밀 유출죄로 기소된 지 딱 1주일 뒤였다. 즉 미 국민들에게 내부 배신자가 소련이 공격에 호응할 것이란 공포를 심어주기에 적절한 시점이었다.

핵 카미가제, 하늘에서 침투하는 10대 낙하산 부대 등 최악의 전쟁 시나리오는 미국 정부를 겁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버 또한 이러한 최악의 상황이 실제로 벌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30년 이상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주시해온 최고전문가, FBI 국장의 예언은 쉽사리 무시될 수 없었다.

게다가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이 패퇴하면서 이러한 예언은 현실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12월 9일 트루먼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마치 3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리는 대처해야 하며 그렇게 할 것이다."

반공의 내면화

미국의 반공주의는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FBI의 영향력이 거의 모든 정부 부처에 미쳤다. FBI 요원이 백악관, 국방부, 합참, 국가안보국(NSA), 중앙정보국(CIA), 국무부, 의회, 그리고 6개 해외 미 대사관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육군 정보부대 등에 상주했다.

이제 후버는 국가안보회의(NSC) 정규 멤버로서 국가 안보에서 민권운동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거의 모든 정책과 전략을 수립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백악관에게 후버의 보고서는 소련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문서가 됐다.

미국의 반공주의는 195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한다. 대법원이 무분별한 사상 검증을 제한하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예컨대 1955년 대법원은 연방공무원 충성도 심사는 안보와 직접 관련된 부서에만 적용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1957년에는 하원 비미국행위 위원회 등 의회 조사위원회의 권한을 제한하는 판결을 내렸다. 나아가 1959년에는 익명의 증언은 증거 능력이 없으며, 또한 조사 대상자는 자신을 고발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와 대질심문의 기회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매카시즘은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뿌리 깊은 반공 의식과 소련에 대한 공포심을 남겼다. 1950년대 미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압도적 최강국이었지만 국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미 국민의 반공 의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앨저 히스를 유죄로 만든 닉슨은 1960년 대선에서 패배한 데 1962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낙선했다. 그 직후인 1962년 11월 11일 앨저 히스는 ABC방송 한 프로그램에 '닉슨의 정치적 사망선고(The Political Obituary of Richard M. Nixon)'란 주제의 코너에 출연했다.

아마도 닉슨의 두 차례 정치적 패배가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히스는 이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유죄로 몰아간 주범으로 후버와 담당 판사, 배심원들, 그리고 특히 닉슨을 꼽았다. 그러나 방송 직후 시청자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광고가 끊어지면서 이 프로그램은 다음 해 6월 문을 닫아야 했다.

1% 독트린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에서는 '1% 독트린'이란 말이 유행했다. 미국의 안보에 1%의 위험성만 있어도 실제 위협인 것처럼 초기에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이다. 체니 부통령이 주장했다고 해서 '체니 독트린'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원칙은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 때 처음 공식적으로 천명됐다.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은 '실제 핵 버섯구름을 보기 전에'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을 차단해야 한다며 이라크 침공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라크 핵개발은 거짓임이 드러났고 대중동지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아직까지 미국은 그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최악의 시나리오에 바탕을 둔 미국의 과잉 군사대응이 대중동지역의 혼란을 불러온 것이다.

아마도 '1% 독트린'의 창시자는 체니가 아니라 후버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1차 대전 이후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극단적으로 과장해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은 해외에서는 과도한 군사 개입, 국내에서는 불법적인 시민 사찰과 탄압을 일삼았다. 실제로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래 미국은 이란에서 베트남, 쿠바에 이르기까지 해외 도처에 군사 개입과 비밀공작을 일삼으면서 세계를 혼란에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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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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