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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즘, 미 노동인구의 20%를 사상 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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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즘, 미 노동인구의 20%를 사상 검증

[전쟁국가 미국·3강-③] 매카시즘과 반공군사주의의 확립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은 민주주의 수호가 명분이었다. 2차 대전 참전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결정적 계기였다. 진주만 기습은 1930년대 이후 강화돼온 미 국민의 고립주의, 반전 정서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렇다면 냉전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어떻게 확보했을까?

전쟁이 끝난 후 5년도 안 돼 새롭고도 기나긴 전쟁(냉전)에의 돌입을 미 국민이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2차 대전 이후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주적으로 돌리고 교전 상대였던 독일과 일본을 우방국으로 끌어들인다는, 외교정책의 180도 표변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대공황을 통해 자본주의의 폐해를 절감하고, 뉴딜을 통해 개혁과 정의를 추구하며, 반파시즘 전쟁에서 소련과의 연대를 경험했던 국내의 평화진보 세력은 트루먼 행정부의 반공군사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기에는 미 국민과 평화진보세력을 향한 대대적인 사상 탄압, 즉 빨갱이 사냥이 있었다. 매카시즘이 그것이다.

2차 대전은 미국 자본주의를 소생시켰다. 뉴딜도 해결하지 못한 대공황의 극복을 전쟁 특수가 해냈다. 그로부터 5년 후 미국은 영구 전쟁국가로 변모한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소련과의 무한 군비 경쟁, 군사 대결에 돌입한 것이다.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인구의 6%에 불과했지만 세계 경제의 50%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 자본주의가 유지되려면 미국의 잉여 생산을 소비할 시장 확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즉 미국식 체제를 세계에 확산시켜야 했다.

하지만 전후 세계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열기가 분출하고 있었다. 윌슨이 주창한 민족 자결이 실현된다면 미국식 체제의 확산은 불가능할 터였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군사주의다. 미국은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해 행동의 자유를 확보했다. 즉 소련의 견제를 무시하고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둘째로 군사원조와 군사동맹을 통해 자본주의 핵심국가인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마지막으로 제3세계의 혁명운동을 제압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위해서는 군사주의가 불가피했으며, 군사주의를 위해서는 외부의 적이 필요했다. 그 적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소련이다. 미국은 소련을 모든 혁명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스탈린을 제2의 히틀러로 악마화 하면서 소련에 대한 군사적 봉쇄를 강화했다.

NSC-68은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며 미국의 군비 강화를 정당화했다. 그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2차 대전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소련이, 2차 대전을 통해 더욱 강력해진 미국을 상대로 어떻게 군사 정복을 꾀한단 말인가. 소련이 미국의 주적으로 간택된 것은 미국의 군사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반공군사주의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한 두 가지 작업이 필요했다. 하나는 2차 대전의 동맹이었던 소련이 전쟁 이후에는 미국 안보의 최대 적이라는 점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930년대 이후 꾸준히 성장해온 국내 진보평화 세력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뉴딜주의자들을 비롯해 사회주의자, 노동조합, 반전평화주의자 등으로 구성된 이들 세력은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소련의 동조 세력, 즉 빨갱이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패권 확보를 위해서는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외부 공산주의 세력과 대결하는 동시에 국내 진보 세력의 척결이 필요했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는 "정복국가는 적국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만큼이나 자국 신민들과도 전쟁을 한다"고 갈파했는데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상황이 바로 이러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트루먼 행정부가 외부의 적 소련과의 대결에 전념했다면 야당인 공화당은 국내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과 척결에 앞장섰다. 트럼프 행정부가 소련에 대한 군사적 봉쇄에 열중하는 동안 공화당은 국내 진보세력에 대한 빨갱이 사냥에 집중했다. 이른바 '매카시즘'이 그것이다. 특히 1933년 이후 10년 이상 권력을 잡지 못했던 공화당은 집권 민주당에 대해 '공산당에 유약하다'며 집요한 정치 공세를 퍼부었다. 중국 공산화가 빌미였다.

한국전쟁이 종결될 무렵 미국에서는 반공군사주의가 초당적 합의로 정착된다. 이에 따라 뉴딜에서 2차 대전까지 미국 정치를 주도했던 급진주의-자유주의 블록은 해체되고(급진주의의 몰락) 자유주의-보수주의 블록이 형성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민주당은 '공산당에 유약하다'는 치명적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고 이것이 훗날 베트남전의 실패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된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1947년에서 1950년대 말까지 미국에서는 대대적 사상 검증과 빨갱이 사냥이 벌어지면서 모든 국민의 마음을 전쟁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를 통해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의 안보를 지킨다'는 반공주의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실상은 다양한 세력이 서로 다른 동기에서 벌인 정치투쟁이었다.

트루먼 행정부가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의 자유주의적 제도와 가치를 지키려 했다면, 공화당은 무엇보다 정권 탈환이 우선이었고 (그들의 눈에는 사회주의로 보였던) 뉴딜의 성과를 해체하려 했다. 또한 기업과 남부 인종주의자들은 노동운동과 인종차별철폐 운동을 공산주의로 몰아붙였다.

한 마디로 이 기간은 이념적 내전의 시기였다. 그 결과 대다수 미국인 마음속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깊게 뿌리내렸으며 미국의 진보평화세력은 크게 위축된다.

연방공무원 충성도 심사

매카시즘이란 적법한 증거 없이, 오로지 공산주의자라는 의심만으로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 행태를 말한다. 이 말은 1950-54년 빨갱이 사냥에 앞장섰던 공화당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시대는 이보다 훨씬 먼저 시작돼 훨씬 더 오래 지속됐다. 대략 1947년에서 1950년대 말까지다.

1947년 3월 트루먼 행정부가 모든 연방공무원에 대한 충성도 심사를 시행하고, 10월 미 하원이 영화계에 대한 공산주의자 색출에 나선 것이 그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연방공무원에서 시작된 빨갱이 사냥은 이후 영화, 방송, 언론, 대학, 노동 등 사회 각 분야로 확산돼 수 백 명이 투옥되고 수 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 때문에 한 연구자는 이 시기 미국인들은 '정신적 예비 구금 상태'에 있었다고 진단한다. 언제라도 사상 검증에 의해 빨갱이로 낙인찍혀 사회에서 추방될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 살았다는 것이다.

1947년 봄부터 미 행정부와 의회가 빨갱이 색출에 나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의회 권력의 교체, 다른 하나는 소련과의 냉전 본격화다. 우선 1946년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했다. 1932년 이후 12년만의 의회 권력 탈환이다. 훗날 매카시즘의 선봉이 되는 리처드 닉슨과 조셉 매카시가 의회에 진출한 것도 바로 이 선거였다. 닉슨은 캘리포니아주에서, 매카시는 위스콘신주에서 반공을 앞세워 각각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한편 3월 12일 트루먼은 트루먼 독트린 발표를 통해 소련과의 냉전을 공식화한다. 이때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 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4억 달러의 원조를 의회에 요청했다. 그런데 연방정부의 돈줄은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이 쥐고 있었고, 공화당은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척결을 요구했다. 결국 트루먼은 외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위해 내부의 공산분자를 척결하자는 공화당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9일 후인 3월 21일 트루먼 대통령은 연방공무원에 대한 충성도 심사를 의무화 하는 내용의 대통령령 9835호를 발표했다. 연방정부에 침투한 공산당원 등 불충분자들을 색출해 제거한다는, 미 정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조사프로그램이었다. 구체적으로 연방공무원 중 "전체주의와 파시즘, 공산주의, 그리고 위헌적 수단으로 미국의 정부 형태를 바꾸려 하는" 조직들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동조자들까지 가려내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연방공무원에 대한 충성도 심사는 트루먼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2차 대전 기간 동안 공직심사위원회(CSC, Civil Service Commission)를 통해 나치당원 등 불순분자들을 가려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요구, 그리고 소련과의 냉전 수행을 위해 트루먼은 충성도 심사를 받아들였다.

충성도 심사, 즉 연방공무원에 대한 사상 검증은 연방수사국(FBI) 주도로 진행됐다. 연방정부의 각 기관들은 FBI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소속 공무원들을 심사했다. 이를 위해 FBI의 수사요원은 1946년 3559명에서 1952년 7029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문제는 충성도 심사가 매우 자의적이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해 FBI가 공산주의자, 또는 동조자로 규정하면 이를 피해 갈 수 없게 돼있었다. 존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은 보안을 이유로 정보제공자(밀고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불충분자로 찍힌 사람은 누가 자신을 신고했는지, 심지어 자신의 혐의가 뭔지도 알 수 없었다. 변호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던 셈이다.

1947년에서 1956년까지 10년간 500만 명 이상의 연방공무원이 충성도 심사를 받았으며 이 가운데 2700명이 '충성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해직됐고 1만 2000명이 사직했다. 여기에 공무원이 되려다 충성도 심사에서 탈락한 구직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밖에 수 만 명은 재심사 끝에 구제되기도 했다. 충성도 심사에서 탈락한 공무원은 공산주의자라는 낙인 속에 장기 실업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대대적인 빨갱이 사냥에도 불구하고 충성도 심사를 통해 소련의 간첩으로 적발된 연방공무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미 정부 내에 소련 첩자가 다수 침투해 있다'는 공화당의 주장이 허구였음을 드러낸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소련을 위한 미국인 첩자는 약 3백 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미국과 소련이 동맹국이었던 2차 대전 때 활동했다.

헐리우드 텐과 블랙리스트

한편 하원 비미국행위위원회(HUAC)는 1947년 10월 헐리우드 영화계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1930년대 이래 진보적 이념 확산의 진원지로 영화계를 지목한 것이다. HUAC은 1938년 정부의 경제 개입, 노동권 신장 등 뉴딜 정책에 반대하는 의원들에 의해 출범한 위원회다. 이들은 뉴딜을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적이라고 보았다.

위원회는 당시 배우노조 위원장이었던 로널드 레이건과 월트 디즈니, 개리 쿠퍼 등 이른바 우호적 증인들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감독, 작가, 배우 등 10명을 추려내 워싱턴으로 소환했다. 이들이 바로 '헐리우드 텐'이다.

의원들은 의회 청문회에서 이들에게 "당신은 현재 미국공산당원이거나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상 검증에 해당된다. 더구나 공산당은 합법적 조직이었다. 행동을 통해 공공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한 단지 사상을 이유로 처벌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연방공무원들이 공산주의자, 또는 그 동조자라는 이유로 해직 당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공산주의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곧 정치적 자살과 다름없었다.

결국 헐리우드 텐은 언론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를 들어 묵비권을 행사했고, 이 때문에 의회모독죄로 기소돼(11월 24일, 346 대 17) 10명 전원이 6개월에서 1년의 실형을 살았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월 25일 에릭 존스턴 영화협회 회장은 헐리우드 텐의 영화계 퇴출과 함께 "공산주의자이거나 미국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조직의 구성원을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블랙리스트의 시작이다. 이로 인해 약 3백 명의 영화계 인사가 퇴출됐다.

지난 2016년 개봉된 영화 <트럼보>는 헐리우드 텐 중 한 명인 작가 달톤 트럼보의 삶을 다룬다. 1939년 <자니, 총을 들다>(Johnny Got His Gun)란 반전 소설을 써내기도 했던 트럼보는 영화계 퇴출 이후 익명의 시나리오 작가로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면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두 번이나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는다. <로마의 휴일>(1953년)과 <용감한 사람>(Brave One, 1956년)이 그것이다. 1947년 영화계에서 추방된 트럼보가 명예를 회복한 것은 1960년이다. 이 해 개봉된 <엑소더스>, <스파르타쿠스>에 비로소 자기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역사가 하워드 진은 빨갱이 사냥이 미국 사회에 가져온 변화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일반대중으로 하여금 공산당원을 두려워하고, 공산당에 대한 단호한 조치-국내에서는 투옥하고 국외에서는 군사행동-에 익숙해지게 만들려는 시도는 확실히 성공을 거뒀다. 문화 전반에 반공주의가 스며들었다.

1948-54년 <나는 공산당원과 결혼했다> <나는 FBI를 위한 공산당원이었다> 등 40편 이상의 반공영화가 제작됐고 잡지들은 '공산당원들은 어떻게 세력을 확대할까' '공산당원들이 당신의 아이를 노리고 있다' 등의 기사를 게재했다."

중요한 것은 충성도 심사와 블랙리스트가 연방정부와 영화계를 넘어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됐다는 점이다. 주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와 심지어 기업에서도 충성도 심사가 시행됐다.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한 민간 조사기관이 번창했으며 이들은 대상자들의 정치 성향과 사생활, 그리고 소속 단체를 조사했다. 심사 대상자는 변호사 없이, 자신을 고발한 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조사를 받아야 했다.

1958년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노동인구의 20%가 충성도 심사를 받았다. 1962년 미 정부의 인사 관련 책임자는 1950년대 초 충성도 심사를 통해 해직된 공무원 중 90%는 현재 기준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공산주의, 사회주의 단체와 개인을 고발하는 책자들이 넘쳐났다. 예컨대 1950년 6월 <카운터어택>이란 잡지는 <레드 채널 : 라디오, TV에 침투한 공산주의자에 관한 보고서>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배우, 감독, 작가, 제작자, 음악가, 방송인 등 151명이 적시됐다. 그리고 이들이 참여한 방송 프로그램에 광고를 주는 기업에 대해서는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1951년이 되면 주요 라디오, TV방송국은 자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의심스러운 인물의 방송 참여를 봉쇄했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도 강화됐다. 1947년 트루먼의 거부권에도 불구하고 개정된 태프트하틀리법은 노조 간부에 대해 반공 선서(나는 공산당원이 아닙니다)를 의무화 했다. 거부할 경우 전국노동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했다. 그 결과 1930년대 크게 위세를 떨쳤던 산업별회의(CIO)에서 공산당 소속 노조 간부가 대거 축출됐고 노동운동은 크게 약화됐다.

또한 기업과 남부 인종주의자 등 보수 세력은 민권운동 등 정치적 반대세력을 공산주의로 공격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예컨대 전쟁 이후 수요 급감으로 불황에 허덕이던 항공산업은 군부, 정치인과 함께 외부의 군사 위협을 과장하면서 고용 창출, 방위력 증강, 이윤 확대를 추구했다. 그 결과 1948년 이후 항공기 주문은 크게 늘어난다.

남부의 인종주의자들은 흑백통합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인종분리적 생활양식을 지키려 했다. 한편 버지니아대학은 1947년 말 공산주의는 "버지니아대학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위협하는 치명적 적대세력"이라고 규정했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은 미국 사회에서 보수파가 진보세력을 제압하는 만능의 부적이 된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 충성도 심사와 영화계 블랙리스트는 빨갱이 사냥의 서막에 불과했다.

1950년 2월 9일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국무부 내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암약하고 있다'는 폭탄선언을 한 이후 1954년 12월까지 약 5년간 미국 정치계는 빨갱이 사냥의 광기에 휘둘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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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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