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에 지난 해 6월 실린 신독재 4단계를 인용하여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문재인 정권은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이 아닌 정권의 절대권력 완성을 위해 민주주의를 악용하고 있다"며 이를 "신독재 현상과 부합한다"고 했다.
'수십 년의 승리 뒤 후퇴하는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글에서 내세운 신독재의 첫 단계는 위기시에 유권자들은 그들을 구해주겠다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지지하고, 두 번째, 적들을 찾아가서 몰아내고, 세 번째, 장기집권을 위해 독립 권력기구들을 장악하며, 네 번째, 독재자를 몰아내기 어렵게 하기 위해 법을 바꾼다는 것이다.
나 원내대표는 문재인 정권을 새로운 형태의 독재로 규정하고, 현안인 패스트트랙을 진보진영의 재집권 플랜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좌파사회주의'와 '좌파독재'로 규정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새삼 독재의 이론적 배경과 개념을 논하는 것은 부질없다. 현 정권을 독재나 신독재로 규정한다면 이는 명백히 사회과학적 분석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공세와 정치언어는 현실정치의 특성상 논리적 정합성을 정교하게 갖추지 않아도 인정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색깔론과 독재 프레임의 정치적 이용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할 정치적 적폐다. 한국당은 냉전논리로 극우반공 세력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극단적 언어로 수구세력의 지지를 공고화하려는 정치적 지체(political delay)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재 프레임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훼손시킨다. 한국정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권자인 국민과 유리된 대의기관은 국민에 대한 수직적 책임(vertical accountability)과 국가기구간의 수평적 책임(horizontal accountability)을 망각한지 오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침체의 주범으로 오도되는 현실에서 계층간의 연대와 공존이 비집고 들갈 공간은 협량하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이 사회통합을 어렵게 하고, 이는 참여의 위기와 신뢰의 위기로 이어진다. 결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절차적이며 최소강령적 의미의 민주주의로는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지연될 수밖에 없고, 평등을 담보할 실질적 민주주의는 요원해진다. 이러한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리 만무하다.
한국당이 민주당과 집권세력을 비판하려면 시대와 사회에 대한 적실성 있는 객관적 시각과 탄핵에 대한 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 제1야당으로서의 품격과 위상을 누릴 수 있다. 한국당은 박근혜 탄핵에 대해 아직도 반성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당 소속 모 의원은 지난 8일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 때 최순실의 태블릿 피시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당이 지지도 50%를 넘나드는 정권을 독재라고 규정한다면 극렬 우파 지지층을 제외하고 누가 이러한 논리에 동조할 것인가.
한국당 지도부는 최소한의 형식논리를 갖추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야 한다. 선출된 지도자가 교묘하게 국민을 속이고, 법과 제도를 바꿔 권력을 연장하려 하는 권력형태가 신독재라는 외국 주간지의 지적은 한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한국당 지도부가 이를 모를 리 없으면서 탄핵 이후 정권교체와 적폐수사, 패스트트랙을 신독재의 논리에 억지로 꿰맞추는 건 비논리적이며, 정당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에 국민 과반 내외가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나타나는 여론조사가 다수인 상황에서 현 정부를 신독재 정권인 것처럼 주장한다면 국민의 상당수가 신독재의 수법에 놀아나고 있다는 논리로도 연결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박근혜 정권의 집권당이었던 한국당은 냉전체제와 성장이 모든 가치에 우선했던 시대의 사고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권자의 인식 수준을 개발독재 시대의 잣대로 본다면 이는 정치적 쇠퇴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쇠퇴가 한국정치에 끼치는 해악은 막대하다. 한국사회에 필요한 쟁점과 논점을 흐리기 때문이다. 건강한 제1야당의 존재가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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