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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정치의 실패다

[2020년 총선과 234연대] ② 우리는 왜 6.25를 막지 못했을까

70여 년을 먹잇감으로 사육되고 있는 한반도

6.25동란이 일어난 지도 벌써 69년이 흘렀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끔찍한 전쟁에 대해 필자는 인민의 시각에서 굳이 '6.25동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남북한 인민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난리가 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곧 출간될 글쓴이의 소책자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필자 주)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6.25가 만들어 놓은 냉전 구조의 아주 좋은 먹잇감 덫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월가의 거대 금융세력이야말로 바로 남북 대립과 긴장을 숙주로 한반도 인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대한 기생동물에 다름 아니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4.27 판문점 선언, 그 뒤를 이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미국의 무기를 사 준 액수는 정말로 상상을 넘어선다. 2008~2017년 10년간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67억3100만 달러(약 7조6000억 원)어치의 무기를 구매했다. 사우디아라비아, 호주에 이어 세계 3위다.

앞으로도 한국은 남북 간 평화체제 확립에 대해 미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라도 트럼프의 미국으로부터 줄줄이 추가로 무기를 사들여야 한다.

남북 적대적 공존의 냉전 세력 또한 하위 파트너로서 기생충이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남한의 친일 독재세력은 북풍까지 조작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다.

미국과 남북한 냉전 세력들, 특히나 한국의 친일독재 세력들은 기회만 있으면 남북 전쟁과 대결을 조장한다.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깨트리기 위해서라면 통킹만 사건과 같은 조작 사건까지 일으킬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이른바 친일독재 보수언론은 누구누구 숙청설 등 수시로 가짜뉴스를 양산하면서 남북 대결 분위기 조성을 위해 사활을 건다. 그게 그들의 생존 방식이자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한 상황과 이상한 체제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 그것도 이제는 한국 인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끝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5조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는 조항 그대로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주권자들이 나서서 끝내야 한다. 남북 지도자들의 결단과 의지만으로는 한반도 평화체제는 위태하다.

6.25전쟁과 냉전을 기획한 전쟁국가 미국

미국은 전쟁 국가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프레시안>에 연재하고 있는 박인규의 '전쟁국가 미국'이 상세하고도 훌륭한 안내서이다.(☞ 관련 기사 : "코리아가 나타나 미국을 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서는 나치 독일과 야합한 군산복합체와 월가 금융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그러나 이런 여론은 광란의 매카시 소동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생존 자체가 오리무중이던 군산복합체는 제2차 세계대전을 대체하는 새로운 냉전의 시작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당시 독가스 제조 화학회사들이 수요가 줄어든 독가스 원료로 개발한 게 샴푸와 제초제 등이었다. 냉전은 이런 화학회사들에게 다시금 돈벌이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전쟁만큼 수지맞는 장사가 없다는 사실이 다시금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6.25는 바로 이 같은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월가 금융세력들에게 딱 들어맞는 구도의 전쟁이었다. 사실 이들이 6.25를 기획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산더미처럼 많다. 6.25는 일본의 진주만 습격처럼 김일성-박헌영과 소련, 중국이 미국이 쳐놓은 그물에 스스로 걸려 든 먹잇감의 전쟁이었다.

6.25와 냉전 기획자 가운데 한 사람인 딘 애치슨 전 국무장관이 "코리아가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Korea came along and saved us)"란 발언은 정확히 이를 설명한 것이다.

전쟁국가 미국을 거론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이제 6.25동란을 백팔십도 다른 시각에서 성찰하고 6.25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가 가능해진다.

6.25에 대해서는 전쟁 발발과 책임을 둘러싸고 지금까지도 남침설, 남침유도설, 북침설 등이 치열하게 논쟁을 거듭해 왔다. 내전과 국제전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전쟁의 기원을 둘러싸고도 수정주의 해석 등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조사연구들이 1950년 6월 25일 전면 전쟁은 명백한 북한의 남침이었음을 명확히 밝혀 놓고 있다. 물론 그 이전 크고 작은 남북의 군사 충돌은 연대급 전투였던 1949년 5월 4일의 개성 송악산 292전투 등을 비롯해서 수도 없이 많았다.

1949년 9월까지 남한은 정규군 수준에서 최대 1만 명 북한에 앞서 있었다. 그러나 중국 인민 해방군에서 단련된 조선인 병력이 3만 7000여 명이나 북한군에 편입된 1949년 9월 이후 상황은 역전된다. 1950년 6월 당시 전선에 배치된 병력 규모는 북한이 남한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많았다.

문제는 남침이냐 북침이냐 내전이냐 국제전이냐 미국과 소련, 중국의 책임이 어느 정도이냐 따지는 데 있지 않다. 그런 논쟁은 과거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미래를 전혀 성찰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제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에 매달려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한반도 미래를 낭비할 수 없다.

수백만의 한반도 인민이 떼죽음을 당한 전쟁을 우리 인민들은 왜 막지 못했을까 그 원인을 성찰하는 게 급선무다. 도대체 당시 어지간한 사람이면 전쟁이 임박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왜 전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인민의 전쟁 방지 행동을 조직하지 못했는가 그것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다시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수 없는 확고한 평화체제 구축이 가능해질 수 있다.

234연대가 전쟁을 억제하는 평화의 힘이다

전쟁은 정치의 실패다. 아무리 좌우 대립과 갈등이 극심하다 해도 타협과 갈등 조정을 통해 정치가 활성화되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주권자인 인민의 전쟁을 반대하는 단호한 결의와 평화세력의 기반이 강력해야만 전쟁은 방지된다. 전쟁세력을 압도하는 평화세력의 기반과 힘이 있어야만 언제든 뛰쳐나올 수 있는 전쟁이라는 우리 안팎의 괴물을 제압할 수 있다.

아무리 미국이 전쟁을 기획한다고 해도, 무슨 그럴듯한 조작 사건을 벌인다 해도, 남북한 인민이 전쟁에 나서지 않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의 남로당은 남조선 인민 해방이라는 목적의식을 뚜렷이 가지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만식 등은 북한에서 이미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고, 이들도 현상타파의 전쟁을 은연중 원하고 있었다.

당시 스탈린은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중국 또한 이제 막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뒤라 내정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앞서 밝혔듯이 개미핥기처럼 전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평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좌우합작 세력은 김구, 여운형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잃고 사실상 무력화되어 있었다. 한때 미소공동위원회는 좌우합작 정부 수립을 적극 지원하기까지 해서 만약 좌우합작 정부가 수립되고 10년의 신탁통치를 수용했다면 전쟁을 막고 독립국가를 세울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좌우합작 세력을 비롯한 대다수 정치세력이 '단정 단선(단독정부 단독선거) 반대'를 내걸면서 1948년 5.30 총선거에 불참하고, 이승만과 한민당 중심의 남한 단정 세력이 국회를 장악,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순간 6.25동란은 필연의 외통수에 걸리고 말았다.

뒤늦게 2년 뒤인 1950년 5.10 총선거에서 잔존한 좌우합작 세력과 중간파가 상당수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한민당 등 단독정부 세력이 참패해 이승만은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이미 전쟁의 브레이크를 잡기에는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여운형과 김구, 김규식 등은 좌우합작을 통한 평화와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지만 결국 전쟁을 막지는 못했다. 아니 전쟁 이전에 그들은 전쟁세력에게 모두 암살당하고 말았다.

해방에서부터 6.25까지 5년의 기간 동안 평화세력은 남북 모두에서 조직된 힘이 없었다. 이들의 정치 경제 사회 기반은 지극히 취약했으며 이것이 6.25를 막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좌우합작 정부를 운영하면서 10년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인 오스트리아의 경험은 우리에게는 반면교사의 사례다. 역사와 정치 문화가 다르고 유럽이라는 지정학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좌우합작이 무산되고 신탁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전쟁으로 치달았던 한반도와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6.25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인민이 평화 세력으로 무장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인민의 주권자 자유인으로서의 자각, 인민의 좌우 합작과 연대 정치력이야말로 평화체제 구축의 주춧돌이다.

1948년 2월 10일 김구가 38선을 넘으면서 발표한 '3000만 동포에게 읍고(泣告, 눈물로 알리다)함'을 다시 읽어보면 그 정확한 전쟁 예측과 전쟁을 막고자 하는 절절한 심정을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김구가 개탄하듯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한반도에는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하듯 국가와 민족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이 평화를 외면하는 매판 전쟁세력이 여전히 극단주의 기득권 세력으로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지도자들끼리의 대화와 약속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평화 체제 구축은 그것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7.4공동성명을 비롯해서 북미 간 숱한 핵 합의와 선언, 협정의 역사만 보아도 이는 자명하다. 우리는 바로 엊그제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남북 평화 협상을 한 순간에 무로 돌리는 '이명박근혜' 정권 9년을 생생하게 체험하지 않았던가.

결국 주권자 국민의 234 평화 연대가 전쟁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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