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독재자 박정희가 가장 미워하던 '정적 김대중'의 아내로 알려진 이희호 여사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974년 12월 하순이었다. 당시 서울 광화문의 동아일보사에서는 편집국과 출판국의 기자들, 동아방송의 피디,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이 박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결사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발단은 그해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 150여 명이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로 시작되는 그 성명서에서 그들은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간섭 배제',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 연행 거부'를 결의했다. '10·24 선언'은 박정희가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발표한 '특별선언'(종신집권을 위한 헌정쿠데타)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언론인들의 투쟁이 벌어지자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동아일보사의 모든 매체에 대한 광고탄압을 자행했다. 그러자 전국 각지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지원하는 격려광고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 무렵, 이희호 여사가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 등과 더불어 동아일보사 편집국을 찾아 언론인들을 격려한 것이다.
결국 박정희는 1975년 3월 17일 새벽, 동아일보 사주 김상만과 야합해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 113명을 거리로 몰아냈다. 폭력배들에 밀려 회사 정문을 나서던 새벽 5시쯤, 함석헌·천관우 선생 등 재야민주인사 수십 명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껴안았다. 이희호 여사도 여성 언론인들을 포옹하며 흐느껴 울었다. 그 무렵 이 여사는 박 정권의 긴급조치로 철창에 갇힌 학생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의 가족이 결성한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원들과 행동을 함께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난 동아일보사 기자, 피디, 아나운서 등 113명은 바로 그날 오후 태평로 신문회관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그들은 공휴일만 빼고 매일 아침 동아일보사 정문 앞에 도열해 침묵시위를 벌였다. 서슬이 퍼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감옥 가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그 이후 동아투위 위원 10명이 구속되어 쇠창살 안에 갇혔다. 이희호 여사는 당시 서소문에 있던 법원에서 공판이 열릴 때마다 공덕귀·김한림 여사를 비롯한 개신교·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방청을 하며 '피고인들'을 격려하고 성원했다.
그런데 정작 1977년에는 김대중 선생이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발표한 '3·1 구국선언문' 때문에 구속되었다.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0년 5월 17일, 김대중 선생은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일당(이른바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들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해 1심과 2심에서 사형선고를 내리도록 했다. 대법원에서 무기로 감형된 김 선생은 어렵사리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모든 시련의 시기에 세 아들을 보살피며 가정을 이끄는 것은 오롯이 이 여사의 몫이었다.
결국, 온갖 시련 끝에 김대중 선생은 1998년 2월 25일 제15 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여사의 감회는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DJP연합'이라는 정권의 한계 때문에 김 대통령은 온전한 민주화와 개혁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희호 여사는 그 점을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김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죽음의 길을 택한 지 반 년 뒤인 2009년 8월 18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올해 6월 10일, 이희호 여사가 사랑하는 배우자이자 민주화의 동지인 김 전 대통령처럼 '하늘나라'로 떠났다.
동아투위의 대표로서, 지난 40여 년 동안 저희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동지애를 보여주신 고 이희호 여사의 명복을 삼가 두 손 모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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