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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는 이희호다

"여자는 남자 밑 보조, 승복할 수 없었다"

이희호가 잠들었다. 여성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 그리고 민주화 투사이자 평화운동가였던 그가 향년 9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희호의 삶은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가 아닌, 이희호 자체였다. 10여 년 전 이희호가 쓴 자서전 <동행>(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을 중심으로 그의 삶을 재조명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여성운동가 이희호

이희호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화목한 유년기를 보냈다. "무엇보다 남아 선호 사상이 지배했던 시대에 아들딸 차별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이화고녀 시절, 그는 모국어인 조선어가 제2외국어로 전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화여전에 다니면서는 황국신민 교육 지도원으로 농촌 지역에 파견되기도 했다.

"이때 지켜본 농촌 아낙네들의 현실은 가혹했다. 권위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중노동에 짓눌렸다. 농촌 여인들의 삶은 오로지 가족을 위한 희생뿐이었다."(<이희호 자서전 - 동행> 26쪽)

해방 후 이희호는 남녀공학인 서울대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여학교에서 비교적 민주적인 교육을 받아온 그의 눈에는 기를 펴지 못하는 여학생과 마음껏 호연지기를 뽐내는 남학생의 모습이 불공평하게 비쳤다.

"그때 여자들의 자리는 당연히 안방이나 부엌이었다. 그리고 학교와 사회에서는 언제나 뒷자리 차지이며 이등 시민이었다. 남녀공학 체험은 여성들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주었다."(같은 책, 34쪽)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던 그도 부산 피란길에 올랐다. 정부도, 학교도, 팔도 각지 사람들도 모두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이희호는 친구 김정례, 박기순, 장옥분과 의기투합해 별도의 여자 청년단을 조직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는 남자 청년단 산하 여성국이 아닌 독립적인 여자 청년단을 꿈꾸면서 "여자는 왜 늘 남자 밑에서 보조로 일해야 하는지 승복할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나는 여성운동이 하고 싶었다. 여성은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다. 남성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전사하면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순국선열의 반열에 올라간다. 그러나 후방의 희생자인 여성들에게는 불명예와 수모만 있을 뿐이었다. 몽골군에게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는 화냥년으로, 일제 강점기에 끌려간 '정신대'는 가문의 수치로, 한국전쟁의 피해자는 '양공주'로 낙인찍히고 멸시당했다. 원인은 가부장제였다. 우리말 속에는 남성을 중시하고 여성을 경시하는 말이 수없이 많다. 무심코 던지는 말 가운데 스며 있는 여성 비하는 또 얼마나 많은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남자는 도둑질 말고는 뭐든지 해도 된다' 등등. 나는 유독 '그녀'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그남'은 없는데 왜 '그녀'라고 하는지. 이는 일본어 '가노조'에서 온 일제 문화의 잔재다. 나는 한때 우리말 속에 은연중에 자리 잡은 남성들의 터무니없는 우월 의식과 그 언사를 연구하여 책을 내려고 한 적도 있다."(같은 책, 39쪽)

그의 문제의식은 분명했다. 오랫동안 가부장제에 갇힌 여성 대부분은 자신들이 받고 있는 불공정과 불이익을 자각하지 못했다. 일상의 언어에서도 차별과 비하가 만연했다.

이희호는 황신덕, 이태영, 박순천 등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만들어 본격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매달 법률 강좌를 통해 여성의 법적 지위 향상, 특히 민법상 여성의 권리를 집중적으로 계몽하며 무료 상담을 진행했다.

여성문제연구원은 오늘날 '가정법률상담소'의 모태가 됐다. 또한 여성들의 권리장전으로 불리는 1989년 가족법 개정에 영향을 끼쳤다.

이희호의 여성운동은 정치적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제1, 2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순천이 1954년 5월 윤보선을 상대로 종로에서 출마하자, "여성은 여성 대표를 찍읍시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그때 내가 선거운동을 신명 나게 하자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오해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관심은 있었지만 직접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운명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었나 보다. 후에 결혼하게 될 사람도 이 선거에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같은 책, 44쪽)

이희호는 그해 8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8년 뒤, 석사 학위를 들고 귀국했다. 그는 학문의 길과 사회운동이라는 갈림길에서 대한YWCA연합회(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선택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벌인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첩을 둔 남자가 많던 때, 혼인신고는 여성의 권리 찾기였다.

ⓒ김대중평화센터

민주화 투사 이희호

"이희호 총무가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부드러운 성격에 강한 책임감으로 좋은 사회운동가 자질을 타고났다고 기대를 많이 걸었던 YWCA 관련 어른들은 김대중 씨와의 결혼을 반대하기로 했다. 조건이 나쁜 그와의 결혼으로 헤어 나오기 어려운 함정에 빠져 좋은 일꾼 하나 빼앗기고 앞으로 여성 지도자로 대성할 재목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서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도록 공작을 폈다. 그러나 평소 신중했던 그가 비장한 각오로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고 말하는 데는 더 이상 반대를 할 수 없었다."(같은 책, 66쪽)

이희호의 이화여전 스승이자 대한YWCA연합회 회장은 지낸 김갑순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의 결혼은 당시 여성계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희호의 결심을 바꿀 수 없었다. 그렇게 1962년 5월 10일 이희호는 김대중과 결혼했다.

그는 김대중과 만남을 "운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참된 민주주의"와 "국민"이 들어간 김대중의 청혼이 "무척 정치적이고 논리적"이었다고 기억했다.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같은 책, 69쪽)

이희호와 김대중의 결혼 생활은 어땠을까. <동행>에 등장하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독재자가 한창 '요정 정치'를 이어가던 1960년대, 이희호와 여성 단체들은 '4.4 운동'이라는 이름의 요정 정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어느날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남자들은 요정이 아니면 정치를 못하나요?"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며 말머리를 돌렸다. 이희호는 곧바로, "언젠가 남자들 큰코다칠 겁니다"라고 경고했다.

요정 정치의 폐단은 이내 현실로 드러났다. 1970년 요정 아가씨 정인숙이 피살당한 것. 이 사건으로 당시 최고위층 정치인들을 둘러싼 풍문은 구름처럼 일어났다.

사랑보다는 신뢰로 동여맨 결혼이었지만, 이희호는 "정치는 배우자에게 최대의 경쟁자"이자 "자녀들에겐 최대의 적"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의 부재와 상관없이 집에는 손님으로 북적였고, 가족이 사생활을 영위할 공간도 시간도 사라졌다.

그 와중에 김대중은 국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말 잘하는 김대중'이라는 브랜드까지 생겼다.

"내가 그를 돕는 일은 신문을 샅샅이 읽어 정책 제안에 도움이 될 만한 기사를 스크랩하는 일이었다. 영자지도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국제 정세를 보는 미국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자료들이 그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선 나 자신에게 큰 공부가 되었다. 이러한 습관은 이후에 그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국제사회를 향해 구명 운동을 할 때 나침반이 되었다. 또한 그가 옥중에서 시대의 흐름에서 낙오하지 않고 미래를 볼 수 있게끔 독서 목록을 만드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같은 책, 82쪽)

이희호는 계속해서 김대중에게는 도움이 되는, 동시에 자신에게는 공부가 되는 일을 해나갔다. 1967년 6월 7대 총선 당시 그는 목포 골목을 누비며 선거운동을 했다. 당시로써는 후보자의 아내가 유권자들을 일대일로 만나는 일은 생경한 풍경이었다. 그 역시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마음을 담아 상대방의 손을 꼭 쥐는" 이희호 식 악수가 시작됐다. 그는 이후 김대중 지지를 호소하는 찬조 연설가로도 나섰는데, 언론은 그를 "후보 부인 찬조 연설 1호"라며 "웬만한 정치 연설꾼 실력을 웃"돈다고 평가했다.

"나는 선거 과정을 통해서 만난 서민들이 참 좋았다. 그들에게서 지식인으로부터 느끼지 못하는 따스한 진정을 느끼곤 했다. 하루 종일 산동네를 다녀도 피곤한 줄 몰랐다. 그래서인지 나는 설이나 추석 명절 때 국회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와 수위 아저씨들 선물을 먼저 챙겼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어느 매체에서 의원 사무실을 청소하며 많은 의원을 지켜본 아머니들이 가장 인상에 남는 의원 중 한 사람으로 남편을 꼽았다. 그가 아주머니들에게 존칭을 쓰며 인격적으로 대해주었고 명절 때마다 선물을 잊지 않았던 결과다. 선거용 선심이 아니라 그도 나도 서민들을 편하게 느끼는 감성을 공통으로 갖고 있지 않았나 싶다. 이후에 그의 경제정책이 소수 독점재벌이 아닌 중산층과 서민층을 돌보는 대중경제론으로 정착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같은 책, 100쪽)

이희호와 김대중은 서민뿐 아니라 여성 문제에 있어서도 공통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이 주도해 제13대 국회를 통과한 '가족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김대중의 양성 평등 인식은 알려진 대로, 문패 일화에서 드러난다. 김대중은 1963년 당시 변두리였던 동교동에 집을 마련하고 '김대중'과 '이희호'라는 두 개의 문패를 직접 마련해 걸었다. 그때 김대중은 이희호에게 "부부가 동등하다는 걸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입시다"라고 말했다.

"남편은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당선되면 여성지위향상위원회를 두겠다는 공약 발표를 시작으로 대선과 총선, 모든 선거에서 가장 앞선 여성 정책을 제시한 페미니스트 후보였다."(같은 책, 292쪽)

그러나 여성계의 우려처럼 김대중과의 결혼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독재 정권은 정적의 아내인 이희호의 사회 활동 역시 집요하게 방해했다. 이희호는 1982년 김대중과 미국 망명길에 오르면서 결국 모든 직책을 사임한다. 사실상 강제된 중단이었다.

ⓒ김대중평화센터

독재자가 바뀌어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이희호와 김대중의 '동교동 교도소' 생활은 계속됐다. 1985년 2월부터 1987년 6월까지 28개월 동안 무려 54차례 '연금 중'이었다. 당시 정권은 김대중을 고사(枯死)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야만과 광기의 1980년대 이희호는 5.18 광주에 아파하고,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분노했다. 민주화 투쟁 속에 유가족은 늘어만 갔다. 그들은 일이 생길 때마다 동교동을 찾았고, 이희호와 김대중 역시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들을 만났다. 이희호는 영부인이 되어서도 '동교동 사모님'으로 불렸다.


이희호는 여성운동가이자 민주화 투사, 그리고 김대중의 정치적 동지로 1998년 2월 25일 청와대에 입성했다. 이희호는 행사 참여 등 내조 중심이었던 제2부속실의 역할을 아동과 여성을 위하는 일로 확대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양성평등과 인권을 중심으로 한 '일상의 민주화'를 실천했다. '
국민의 정부'에서 새롭게 신설된 여성부 및 문화관광부, 환경부, 보건복지부에서 4명의 여성 장관이 나왔다. 이어 주러시아대사를 비롯한 4대국 여성 대사가 등장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이희호와 김대중의 합작품이다.

이희호는 또 2002년 5월 유엔 총회 의장국 대표로 임시의장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한 첫 여성이었다. 당시 그는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해 '전 세계 아이들을 빈곤, 학대, 질병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자'고 촉구했다.

이희호의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동지였던 김대중은 2009년 8월 먼저 눈을 감았다. 그는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이희호와 김대중에게는 정치가 각자의 꿈을 이루는 길이었다. 그 고난의 길, 서로가 있어 견디었다. 인동초처럼
….


▲ 김대중은 이희호가 자서전 <동행>을 출간한 이듬해, 잠들었다. ⓒ김대중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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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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