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내세운다. 공동체의 책임을 역설하기 때문에 개인의 도덕적 해이는 불가피하다. 나 대신 국가가, 노조가 내 역할을 해주기 바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의타심 풍토 속에서 진보 정치인은 생존하는 것이다."
1일자 중앙일보 문창극 논설위원실장이 쓴 '그들을 떠나 보내라'는 칼럼의 한 대목이다.
***조선에 이은 중앙의 '한나라당 숙정' 주문**
문 실장의 이 글은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에게 보내는 주문의 성격이 짙다. 요지는 한나라당 탈당을 준비하는 진보진영 출신인사들을 '떠나 보내고', 동시에 한나라당내 비도적적 보수인사들을 함께 숙정해 한나라당을 '윤리적 보수정당'으로 재건하라는 주문이다.
"한나라당은 진보성향의 의원들을 떠나보내고 자신의 도덕적인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깨끗한 보수주의로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보세력과 함께 함께 떠나보낼 사람들이 또 있다.
기름기 번들번들한 얼굴들, 세월이 어떻게 바뀌든 살아남는 뻔뻔하고 두꺼운 얼굴들, 권력자에게는 아부하고 약자에게는 군림하는 얼굴들, 이런 얼굴들을 함께 떠나 보내야 한다. 국민은 이런 사람들을 보수 정치인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새 인물을 충원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책임의식이 투철하면서 열심히 살고, 공정하고, 윤리적이며, 따듯한 사람들을 골라야 한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닌 얼치기 정당으로는 안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양분됐다. 이제는 보수든 진보든 노선을 확실히 하여 누가 더 도덕적이고 건강하며, 누가 더 나라의 장래를 맡을 자격이 있나를 경쟁하는 길밖에 없다."
문 실장의 이 글은 최병렬 체제 출범 다음날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주문한 바와 같은 맥락의 글이다. 조선일보는 27일자 사설 "'최병렬 한나라당'은 다 바꿀 각오부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문했었다.
"한나라당의 개혁은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국민은 한나라당의 '그 얼굴에 그 얼굴'들을 보며 식상한 정도를 넘어 염증을 느끼고 있다. 지역 몰표에 기대서 국회의원을 좋은 취직자리 정도로 여겨온 인사들을 혁명하듯 갈아치우지 못한다면 국민은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최 대표도 평소 이런 소신을 밝혀온 바 있다. 그가 온정주의에 이끌려 소신을 바꿀지, 아니면 국민을 보고 당내 저항을 돌파할지 국민은 지켜볼 것이다."
***"보수는 본래 깨끗, 진보는 부패"?**
조선일보에 이은 중앙일보의 이같은 '한나라당 숙정' 주문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국회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야당의 '환골탈태'야말로 우리 정치계의 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 문창극 실장이 드러낸 '진보세력에 대한 적개감과 왜곡'은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하겠다.
우선 문 실장은 "보수는 비도덕적 세력이고 진보는 도덕적인 세력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그렇다면 보수는 비도덕적인 세력이고 진보는 도덕적인 세력인가. 그렇지 않다.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은 개인에 달린 문제다. 보수도 부패하고 진보도 부패한다. DJ정권을 돌아보라. 개혁을 특허낸 것인양 외치던 무리들이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이어 그는 '보수의 본질'은 본디 '깨끗함'이라고 주장한다.
"보수주의를 표방한 한나라당은 보수의 얼굴로 도덕적이 돼야 한다. 어설프게 진보세력을 끼워넣어 그들의 이미지를 빌려 도덕적 모습을 갖추려 하면 안된다. 그런 가면은 국민만 혼란케 만들 뿐이다.
보수는 본래 깨끗한 것이다. 보수는 남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남의 탓도 하지 않는다. 자기 책임하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여 성공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뿐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어 나온 구절이 문제다.
"진보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내세운다. 공동체의 책임을 역설하기 때문에 개인의 도덕적 해이는 불가피하다. 나 대신 국가가, 노조가 내 역할을 해주기 바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의타심 풍토 속에서 진보 정치인은 생존하는 것이다."
진보는 '구조적'으로 도덕적 해이, 보다 직설적인 표현을 빌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중앙일보의 대표적 '보수주의자' 문창극 실장의 '대(對)진보관'이 어떤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언론의 남 부끄러운 '야합의 역사'**
국내 유수대학의 정모 총장은 연전에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전두환 정권초기 경제수석을 지냈던 고 김재익 수석에 대해 다음과 같은 회고를 한 적이 있다.
"80년대초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일이다. 김재익 수석이 불러서 갔다. 김 수석이 '정 교수, 국내에 집이나 마련했나'라고 물었다. '초년병 교수가 웬 집입니까.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김 수석이 '정교수, 내가 집 하나 마련해줄까' 했다. 김 수석은 '요즘 주위에 굴러다니는 게 아파트'라고 했다. 전대통령이 광주학살후 언론을 순환시키기 위해 강남 일원동 등에 기자 전용 아파트 단지를 지어주던 일을 일컫는 말이었다. 김 수석은 '같잖은 기자 나부랭이들에게도 아파트 한채씩을 주는데, 정교수처럼 나라를 위해 미국 대학교수 자리를 버리고 귀국한 사람에게 아파트 주는 게 훨씬 나은 일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괜찮다'고 말해 없던 일이 됐지만, 당시 정권이 언론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다."
정모 총장의 회고에서도 읽을 수 있듯, 우리 언론은 많은 '야합의 역사'를 갖고 있다. 특히 지금 언론계의 중견들일수록 그러하다.
한 예로 지난 70년대 중반 동아투위 사태때 박정희 대통령은 동아투위 기자들을 집단해고한 뒤 동아일보에 잔류한 기자들에게는 월급을 두세배 대폭 '현실화'해 주었다.
70년대말 내로라 하는 언론인들은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금싸라기 같은 강남 압구정동 아파트를 받아 사회적 지탄을 받은 바 있다.
80년대 광주학살 직후에는 앞서 말했듯 수천여명의 기자들이 전통으로부터 아파트 공세를 받아 중산층 대열에 손쉽게 합류할 수 있었다.
이런 야합의 역사 속에서 살아온 많은 언론인들이 지금 언론계 고위직에서 행세하고 있고, 정계 등지에 진출해 내로라 행세하고 있는 게 적나라한 현실이다.
***'바람 풍, 바담 풍'**
보수든 진보든 자체내의 '부패 숙정'은 지상과제다. 그리고 당연히 언론은 정치세력에게 이를 주문해야 한다.
하지만 이때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일은 언론 스스로의 '자체 숙정'이다. 스스로를 정화하지 않고 하는 타집단에 대한 숙정 주문은 "너는 얼마나 깨끗하기에?"라는 반격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진보는 공동체의 책임을 역설하기 때문에 개인의 도덕적 해이는 불가피하다"는 따위의 발언은 감히 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일천한가를 드러내는 발언인 동시에, 무의식에 깔려있는 보수세력의 '진보 컴플렉스'까지도 엿보게 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바람 풍, 바담 풍'의 우화를 돌이켜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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