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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1일 전두환이 광주에 왔고, 오후에 사살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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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5월21일 전두환이 광주에 왔고, 오후에 사살이 이뤄졌다"

前 미군 정보관 증언…"사복군인 30여명 목격, 시민으로 위장 공작"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리콥터를 타고 광주를 방문해 군 관계자들과 회의를 했으며, 이 회의 직후 광주시민에 대한 대대적인 사살 행위가 이뤄졌다는 증언이 나왔다.

1980년 당시 미 육군 501 정보여단 광주파견대에서 군사정보관으로 근무했던 김용장 씨는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김 씨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21일 점심시간 전에 헬기를 타고 광주 K57 비행장에 왔다"며 "오자마자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부대장 등 3명과 모두 4명이서 회의를 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5.18 특조위나 언론이 비행계획서를 찾아보면, 파기되지 않은 한 절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며 이같이 증언했다. 김 씨는 "이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른다"면서도 "그러나 같은날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집단 사살이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바로 사살 명령이었다고 생각된다"고 주장했다.

"한국국 특수부대, 민간인 행세하며 시민·진압군 충돌 유도"

김 씨는 또 당시 한국군 특수부대원으로 추정되는 군인 30여 명이 거지 등 민간인으로 변복·위장한 모습으로 K57 공군기지에서 목격됐으며, 이들이 광주 시내에 잠입해 광주시민들과 진압군이 무력 충돌을 일으키도록 선동·조작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씨는 "제가 직접 작성한 보고서에 있는 내용으로, 일명 편의대(便衣隊)라 불리는 사복 차림의 민간인 행세를 한 군인들이 존재했다"며 "이들은 19일 또는 20일 성남에서 C130 수송기를 타고 왔고, 약 30~40명가량이었으며 K57 비행장 격납고에서 2~3일 주둔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이 첩보를 입수한 후 격납고로 찾아가 제 눈으로 확인했다. 나이는 20대 혹은 30대 젊은이들이었고, 짧은 머리에 일부는 가발을 썼다.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고, 거지처럼 넝마를 걸친 사람도 있었다"고 비교적 자세하게 자신이 목격한 바를 증언했다.

김 씨는 "이들을 광주로 보낸 사람은 바로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였고, 당시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과 서의남 505부대 대공과장이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K57에 출입했다. 여기까지가 제가 상부(미군)에 보고한 내용"이라고 밝혔다.

단 김 씨는 이들의 신원을 직접 확인하거나 대화를 나눠본 것은 아니며 "얼굴이나 움직임을 봐서 군인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이들이 C130 수송기를 타고 왔고, 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로 들어갔다. 그들이 격납고에 들어가 있을 때 우연찮게 밖으로 나온 사람이 2명 있어서 30미터 거리에서 그 2명의 얼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김 씨는 이들이 온 이유에 대해 "북한 특수군이 했다는 방화, 총격, 장갑차·수송차 탈취는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 어려운 매우 극렬한 행위들인데, 이 편의대가 선봉에서 시민을 유도하거나 직접 벌인 소행으로 추정한다"며 "유언비어 역시 이들이 시민으로 위장해 벌인 공작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람들의 역할은 시내에서 데모 군중 속에 들어가 '경상도 군인이 광주시민 다 죽이려 한다', '북한 게릴라가 침투했다' 등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우리가 낸 귀한 세금이 전부 군사정부에 사용된다'고 광주세무서에 불을 지르고, 'MBC는 허위방송이 너무 많다'며 (방송국에) 방화를 한 것"이라고 추정하며 "편의대, 남한 특수공작원 의해 이뤄졌다고 저는 확신한다"고 했다.

1980년 당시 보안사령부 특명부대장으로 근무했던 허장환 씨는 "1988년 광주 청문회를 보면,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이 광주 방문 목적에 대해 '대원들에게 편의복을 가져다주러 갔다'고 증언했다"며 "편의대의 존재를 정호용이 인정했다는 중요 발언"이라고 부연했다.

"북한군 침투설은 난센스…희생자 시신 화장, 수장 가능성"

김용장 씨는 한편 북한 특수군 침투설에 대해서는 "허위 날조된 것"이라며 "북한군 600명이 광주에 왔다는 주장은 미국의 정보망이 완전히 뚫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600명이 (미국 정보자산의) 첨단 감시를 피해 광주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따라서 당시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보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광주 희생자 시신에 대해 신군부가 무단으로 화장하거나 심지어 시신을 김해공항으로 옮겨 바다에 수장했다는 정황에 대한 증언도 나왔다. 김 씨는 "5공 청문회 때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이 '암매장은 없었다. 다만 있다면 가매장은 있었다'고 했는데, 당시 청문회를 들은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을 것"이라며 "가매장한 시신을 재발굴해서 일부는 광주통합병원에서 소각했고, 일부는 최근 보도를 보면 김해 공항으로 수송됐다고 한다. 왜 김해로 갔겠는가, 틀림없이 거기서 수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장환 씨도 시신에 대해 비슷한 증언을 했다. 허 씨는 "가매장은 다시 발굴하기 위해 일단 묻어놓는 것"이라며 "당시 공수특전단에서 (보안사에) 가매장 위치, 좌표를 표시해 면밀히 보고했는데, 이는 '북괴의 간첩이 있는지 엄중히 가려내라'는 지시에 따라 지문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고 증언했다.

허 씨는 "나는 지문 감식관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며 "발굴한 시신을 다시 묻을 수 없으니 통합병원에서 화장 처리했다. 통합병원 원장은 전두환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는데, 병원 굴뚝은 난방용 보일러에 쓸 높이나 용량을 초과하는 것이었고 당시 날씨가 더워 난방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인근 민가에서 굴뚝 연기 때문에 장독 뚜껑을 못 열었다고 했다. (희생자) 화장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 씨는 "태우다 태우다 모자라서 용량이 넘치니 김해공항으로 빼가지고 해양투기를 해버렸다(고 추정된다)"며 "그 때 소각한 유골을 광주시 청소부들을 동원해 모처에 매장하고, 청소부들에게 보안 유지를 위해 급부도 저희(보안사)가 제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헬기 사격에 전투기까지 '출격 대기'…광주시민과 전쟁한 전두환


허 씨로부터는 좀더 아찔한 정황 증언도 나왔다. 그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1980년 5월 24일로 추정된다. 그때 제가 광주 시내에서 외근을 하고 있는데 '급히 귀대하라'는 무전 연락이 왔다. (보안)사령부에 와서 대기하고 있으니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처장이 전화를 해서 '주변에 아무도 접근시키지 말라'고 해서 단독으로 전화를 받았다. 이학봉 처장은 '쌍방교전사건(1980년 5월24일 송암동에서 공수11여단과 전투교육사 보병학교 교도대와의 오인사격으로 공수부대원 8명이 사망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너, 여순반란사건 알지? 이 (쌍방교전)사건이 여순사건과 유사한 거냐 아니냐?'고 했다. 내가 '제가 외근하고 들어와 파악을 못 했습니다'라고 하니 이 처장이 '긴급하게 파악해 보고하라. 믿을 놈은 너뿐이다'라고 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란 것은 당시 보안사 광주파견대에서 유일한 경상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급히 파악해 보고하겠다'고 하고, 보안과 등 담당 부서에 가서 진상을 빠르게 파악해서 (이 대령에게 보고하기를) '이건 여순반란과는 관계 없고, 오인사격으로 인한 쌍방교전이다'고 했더니 (이 대령이) '확실하냐?'고 3번을 물었다. 그러면서 '너만 믿는다'고 하고 '네가 광주를 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전화를 끊기 위해) 수화기를 건네주면서 들리는 소리가 '○○에 연락해서 출격 취소시켜'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허 씨는 "당시에는 '광주 폭격'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후에 조종사 양심선언도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그게 이거였구나' 하고 알았다"고 했다. 자신이 정확하게 듣지 못한 '○○'부분에 대해 "1전비(공군 제1전투비행단)이라고 했는지 어디라고 했는지 잘 듣지 못했다"고 부연 설명도 했다.

허 씨는 전일빌딩 헬기 사격 사건에 대해서도 "27일 새벽 미명에 공수특전단에 내려온 지침이 '진압군은 한 명도 사상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고층 건물에 시민군 저격병이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그래서 헬기로 저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며 "헬기가 호버링 스탠스(정지상태로 공중에 떠 있는 것)에서 비행 계류하며 사격을 하는 것은 실시간으로 명령을 받는다. 내가 당시 진압하기 전 도청과 YWCA에 가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해서 정황을 알고 있다. 이건 헬기 비행계획서에도 나와있을 것이고, 공군과 보안사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장 씨는 헬기 사격 사건에 대해 자신이 미군에 보고한 내용이 있다고 증언했다. 김 씨는 "'5월 21일 낮에 UH1H 소형 헬기로 M60 '머신-거닝(gunning)했고 위치는 도청 주변'이라고 보고했고, 27일 광주천 상류에서 위협사격을 했다'고 보고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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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훈

프레시안 정치팀 기자입니다. 국제·외교안보분야를 거쳤습니다. 민주주의, 페미니즘, 평화만들기가 관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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