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여성의 안위가 곧 태아의 안위이며, 이들의 이해관계는 그 방향을 달리하지 않고 일치한다." - 헌법재판소 판결문
지난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를 헌법불합치로 판단했다. 국가가 여성에게 임신 중지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이었다. 그간 낙태죄 존폐의 문제에서 태아와 여성의 권리는 제로섬 관계에 놓여 있는 것처럼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기존의 이해 방식이 결국 여성과 태아, 모두의 존엄을 훼손시키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누구의 존엄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기준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숙제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국가와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던 인식부터 돌아봐야 한다.
여성이 겪는 현실
언젠가 거리를 지나는데 흡연을 하는 여성에게 어떤 노인이 다가가 손가락질을 하는 모습을 봤다. "미래에 임신을 해야 하는데 담배를 피우느냐"고 호통을 쳤다. 여성은 불쾌해하며 대거리를 했고 노인은 혀를 차며 사라졌다. 노인에겐 흡연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이 문제였으며, 더 정확하게는 임신, 출산을 해야 하는 '몸'을 '보호'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 노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 시장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도 다르지 않다. 취업을 준비하는 여성에게 회사는 면접에서 결남출(결혼, 남자친구, 출산계획)을 서슴없이 물어본다. 어떤 대답을 해도 같은 질문을 받지 않는 남성 구직자에 비하면 감점요소다. 어렵게 구직에 성공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몇 년 지나 임신하면 어차피 그만둘 사람으로 취급당하며 승진에서 배제되고 퇴직을 강요당한다. 회사에서 임신, 출산이 가능한 '몸'은 보호의 대상에서 '결점'이 될 뿐이다.
현실을 바꿔야하는 정부는 더 노골적
멋대로 보호하다가도 결점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여성의 몸을 단지 출산, 양육의 도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인식은 이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교육부가 2015년에 만들고 2017년 수정한 '학교 성교육 표준안'은 여성의 생식기를 '아기가 자라는 공간', '아기가 나오는 길'로 설명한다. 단순히 신체에 대한 설명이 문제가 아니다. 같은 자료에서 '너무 일찍 시작한 사랑, 생식기 건강에 '빨간불'(청소년기 여성의 인공임신중절을 뜻함)'라 말하며 여성 청소년의 성욕을 통제할 것을 주문한다.
임신·출산·양육의 지원 대책도 마찬가지다. 지난 10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는 저출산이었다. 정부마다 출산장려지원금, 아동수당, 무상보육, 비혼모 지원 등 '모성'보호를 근거로 저출산 대책을 꺼내 들었다. 지원이 늘어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어느 정부든 국가가 지원하는 대상에 모성은 있지만 여성은 없었다. 아니 모성조차 명분에 불과했다. 지방자치 단체의 출산율 경쟁을 위한 '가임기 여성지도' 작성·배포의 과정은 국가가 여성을 아이 낳는 도구로 바라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낙태죄 폐지가 바꿔놓을 사회
낙태죄가 작동해온 방식도 다르지 않다. 국가의 처벌은 국가의 지원과 매우 달라 보이지만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국가는 여성의 출산 촉진을 위해 지원하지만, 임신 중지를 결정하면 단죄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여성과 재생산을 통제해온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이 시스템의 한 축인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여성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시작점에 낙태죄 폐지가 있다. 낙태죄 폐지라는 요구는 그저 임신중지를 '허용'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말해왔듯이 임신 중지를 하고 싶어서 하는 여성은 없다. 여성들이 낙태죄 폐지를 외친 이유는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분노였다. 성차별적인 교육 과정, 입사부터 퇴사까지 임금, 승진, 업무에서 차별 받고, 출산과 양육의 책임을 홀로 감당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바꿔내기 위해 낙태죄 폐지를 외친 것이다. 임신 중지에 어떤 허락도 처벌도 필요 없다는 외침에는 법·제도는 물론 교육, 노동, 보건의료, 장애, 이주, 가족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성평등과 재생산권을 보장하는 목소리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국가와 사회는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 여성이 도구가 아닌 공동체의 동등한 인간으로서 성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만드는 사회적 실천이 시작될 수 있다. 임신·출산·양육이 차별을 매개하는 게 아니라 평등과 존엄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한 명의 인간으로 산다는 기쁨이 이런 것일까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폐지 판결이 나던 날 헌법재판소 앞 집회에 함께한 여성이 이렇게 말했다.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낙태죄 폐지 판결의 기쁨으로만 이 여성의 말을 설명할 수 없다. 여성을 임신출산의 도구로만 바라보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울분, 앞으로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의 등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여성을 도구로만 취급하는 사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싸워온, 그래서 낙태죄를 기어코 폐지한 사람들의 힘이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지금부터 2020년 낙태죄가 완전히 폐기되기 전까지 후속 입법과제가 국회에서 논의될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아무리 위헌을 판단해도 정부나 국회가 인공임신중절의 허용 사유를 추가하거나 허용 주수를 촘촘하게 설계해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후속대책을 내놓을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권의 인식이 따라오지 못한다고 낙태죄 폐지를 만들어온 사람들의 의지와 흐름이 뒤바뀔 순 없다. 진정으로 낙태죄 폐지 이후 사회가 달라지길 원한다면, 낙태죄 폐지가 열어젖힌 장에서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외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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