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2'라는 서울시 정책 사업이 있다. 이는 '최중증 성인 발달장애인 낮 활동 지원 사업'이다. 최중증에 해당하는 분들은 웬만한 복지관이나 지원기관에는 갈 수가 없고, 성인이라 학교도 이미 졸업했기에 1년 내내 오직 가족의 보호 속에 지낼 수밖에 없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보호가 아니라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몇 번, 낮 시간 만이라도 이분들께 돌봄-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곳이 있다면 장애인 당사자도 긍정적인 행동 변화를 만들 수 있고, 가족 모두의 삶의 질이 현격하게 높아질 수 있다. 이에 서울시가 2년 시범 사업으로 낮활동 지원 사업을 실시했고, 36명의 최중증 성인 발달장애인분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동네가 나서야 더 잘할 수 있는 '핀셋 복지'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장애인 당사자들도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돌봄을 받을 수 있고, 그 가족들도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약간의 자유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최중증 발달장애인 아들 때문에 단 한 번도 둘이 외출하거나 커피 한 잔 할 수도 없었던 어떤 부부는 처음으로 두어 시간이나마 서로의 마음을 들어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떤 가정은 '허덕이는 삶의 유지'를 넘어 처음으로 '장애인 가족을 포함한 삶의 희망'을 위한 준비와 노력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꼭 필요한 사람에게 콕 찍어서 하는 이러한 복지가 '핀셋 복지'다(이 글에서는 보통 '보편적 복지'의 반대 개념으로 흔히 쓰는 '선별적 복지'와는 다른 개념으로 쓰고자 한다). 이런 복지정책이 가져올 변화는 그냥 휴식이 아니라 '삶의 질'의 변화이다. 핀셋 복지가 주는 것은 내 삶이 조금 더 편해지고 나에게 뭐 하나가 더 생기는 수준이 아니라, '삶의 숨통'이 열리고 '삶의 의욕'을 주는 사활적인 변화이다. 그 당사자들과 가족들에게는 말이다.
오는 6월이면 2년 시범 사업이 종료된다. 또 다른 분들이 서비스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참여했던 분들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동네 구의원인 내게 이런 상황을 고민하는 민원이 왔고, 구로구청 사회복지과부터 서울시 발달장애인 복지관까지 이곳저곳 다니며 문제 해결을 위해 뛰기 시작했다.
이러한 복지는 '비가역적'이다. '절대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구청 사회복지과와 협조하여 이어갈 방안을 연구했고 구로구 차원에서 별도의 예산과 공간 준비도 시도했다. 그러던 중 서울시가 이 프로그램을 확대하기로 했고, 이번에는 구로구의회까지 나서서 관내 장애인 복지관을 섭외하고 설득해서 사업을 구로구도 받아 확대 지속하기로 했다. 기존에 서비스를 받던 장애인과 그 가족들도 계속 서비스를 받고, 신규로 대상자를 더 많이 발굴하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관내 복지관은 아무래도 인력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이 '최중증 발달장애인' 사업에 주저하는 모습도 있었지만 당사자들의 사활적인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구로구청과 구로구의회가 적극적으로 복지관을 설득했고 결국 이 사업을 받아 진행하기로 했다.
복지에도 양날개가 있지 않을까?
나는 사회복지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챌린지2' 사업 과정을 통해 복지에도 양날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균형이 맞아야 하는 양날개 말이다. 여전히 정부도 지자체도 보편적 복지의 확대가 대세이다. 나도 인간의 보편적 권리와 사회적 최소 안전망으로서의 보편적 복지 정책을 지지한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나 투자만큼 '핀셋 복지'가 따라가지 못하는 듯 하다.
정치인들은 유권자가 몰리는 보편적 복지에 더 적극적이고, 인적, 물적 자원들도 그쪽으로 쏠린다. 창의적이고 좋은 정책들도 계속 생산된다. 반면 '핀셋 복지'로 지켜야 할 복지 영역은 정치적 관심이 떨어지고, 창의적이고 알찬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회 의제가 되는 '정치'의 영역이 아닌 '그냥 어려운 사람을 돕는' '공무원들의 행정' 수준으로 계속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정작 복지라는 사회적 정책이 없다면 삶 자체가 불가능하고, 최소한의 인간적 삶이 불가능한 사람들에 대해 나와 정치권은 얼마나 고민하고, 얼마나 적극적인지 묻는다. 이러한 복지는 보건복지부가, 지방자치단체 사회복지과가 법이 정한 매뉴얼 수준에서 딱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 단순히 행정과 집행의 영역으로 모두가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장애인 복지, 저소득층 복지, 정치적 소수자들을 위한 목소리가 무상 급식을 외치는 목소리, 기초연금을 외치는 목소리, 아동 수당을 외치는 목소리만큼 강력하고 끝질기고 책임있게 외쳐지고 있는가?
'보편적 복지'는 중앙 정부가 주관하고 이를 위한 자원 투입이 중요하다. 위에서부터 내려와서 지역에서 실현되고 피드백된다. 이와 비교해 '핀셋 복지'는 지역에서 시작해 정부의 재정적, 정책적 지원으로 올라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주는대로 받아라'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개인의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당연히 중앙 정부가 전부를 파악하고 지원할 수 없다.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응' 해야 하기에 기초지자체, 동주민센터, 동네단위의 발굴과 협력과 지원이 필수적이다.
지역에서부터 만나는 이 복지 양날개가 앞으로 우리 사회 복지 정책의 새로운 방향이 되어야 한다. 장애인 등급제 같이 획일화된 지원을 넘어선 새로운 복지, 부양 의무제의 한계와 복지 사각지대를 극복하는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동네에서부터 밀착된 '핀셋 복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핀셋 복지'에 대한 정치적 복권이 필요하다
어떤 복지 영역은 우르르 표가 되지는 않지만 그것이 절실한 소수 사람과 그 가족들에게는 삶을 좌지우지 하는 경우가 있다. 그냥 두면 연령별, 세대별로 많은 유권자의 관심을 받는 보편적 복지 정책에 우선순위가 밀리기 쉽다. 사명감을 가진 지역 사회 구성원과 지방자치단체, 지역의 정치인의 의식적인 노력과 역할이 특별히 필요한 이유이다. 그래야 균형을 맞출 수 있다.
물론 논쟁이 있을 수 있다. '어떤 방식이 효용이 큰지',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가' 등 여러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런 질문들을 포용하고 논의하면서 우리 사회의 복지 패러다임을 발전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온동네가 움직였던 한 사업을 보며 동네 구의원이 '복지에 대한 나라 걱정'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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