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의 동백림사건에 대해 국가정보원의 진실위원회는 26일 '간첩단 사건이 아니었다'는 취지의 발표를 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관련자들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는 권고를 하기도 했다.
한 세대도 훨씬 지난 과거의 아픈 사건이 이제 전혀 다른 기조로 재상영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당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프레시안>은 이 사건으로 기소됐던 인사 두 명에게 연락을 취해 소회를 들었다.
앞의 글은 1967년 국내로 납치될 당시 독일에 유학중이던 김종대(당시 33세, 하이델베르크대 독문학 박사과정) 씨가 26일의 발표를 본 뒤 직접 작성해 보내온 소회다. 당시 "저는 카프카의 '심판'의 주인공 K의 상태에 있습니다. 저를 더이상 찾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한국으로 갑니다"라는 편지를 하숙집 여주인에게 남겨 이 내용이 독일 일간지에 보도되기도 했던 당사자다.
그는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풀려났지만 중앙정보부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시절의 기억을 아직도 '깊은 상흔'으로 안고 있다. 그 이후 단국대 독문과 교수와 문과대 학장을 거쳐 정년퇴직했고, 지금은 세계 괴테학회의 이사로 있다.
뒤의 글은 당시 프랑스 유학생으로서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뿐만 아니라 평양도 몇 차례 왕래해 사형을 구형받았고 최종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조영수가 26일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밝힌 회고 및 오늘의 소회다. 그는 사건 당시 '거물급 간첩'으로 꼽힐 정도였으나 그 역시 최종심에서는 간첩죄의 혐의를 벗었다. 그는 출소 이후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소기업을 경영해 왔다.
길지 않은 두 분의 말과 글을 보면, 두 분 모두 사건 당시와 그 이후 마음 속에 쌓였던 분을 스스로 삭힌 듯 했다. 국가 테러리즘의 당사자가 이들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스스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험한 세월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혹은 그게 세월의 힘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편집자>
***철책의 시대를 넘어서서**
통행금지와 철책의 시대를 산 우리 세대
탈출구가 전혀 없던 시대를 산 우리 세대
국제적인 정보가 결핍된 작은 산악의 나라. 북으로 휴전선
동해, 서해, 남해 모두가 철책과 국경수비의 삼엄함 속,
그 속에서 살던 젊은 세대들은 깃털이 찢어진 새들
그래도 소수의 한국인들 속에 포함되어 나는 해외로 날아갈 수 있었다.
작은 물새는 독일, 동서독 분단국에서 분단 상황을 보았다.
그리고 한국의 분단과 비교해보았다.
아! 한국의 분단은 참담하다는 걸 확인했다.
동서독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 우편, 인적 왕래가 가능했던 독일의 분단.
남북관계가 동서독의 현실만큼 변화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지성의 의무라고 내 스스로 합리화하고 남북인 접촉을 시도해보았다.
우리는 적어도 남북대화의 실마리를 동서독 관계에서 찾아보려고 노력해보았다.
작은 나라, 가난한 나라, 어디 나갈 수 없던 우리 국민들은 뉴스 꺼리라도 먹고살았다.
갈 곳 없는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구경꺼리로 만들면서 어려운 시대를 살아나간 것 같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뉴스 꺼리로 잘 포장하여 국민을 그 속에서 살도록 배려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빵과 유희'를 제공하려 했던 노력이 이렇게 관련자들에게 긴 세월 괴로움을 안겨 주었나보다.
'명예회복', 이 단어 속에 조금은 서글픔이 담겼지만 참 다행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증오했던 사람들을 마음으로 이미 오래전에 모두를 용서했다.
우리 모두가 성숙하지 못해서 서로가 오해하고 증오했던 시대는 끝나야 한다. (김종대)
***"그때는 그런 시대…온전한 자유가 주어진 걸까?"**
내가 유학하던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는 북한이 한국보다 잘 살던 시기였다. 그 무렵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고 싶어 평양까지 갔던 것인데, 가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한 것과 다른 것은 물론이고 계급구조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보다 더했으면 더햇지 덜하지 않았다. 북한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했다. "아직 공산주의 체제가 자리를 덜 잡아 문제가 없지는 않다"고.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북한 사회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살기 힘든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은 서구 민주주의는 '광란'일 뿐이고 자기들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이러니 대화가 이뤄질 수 있었겠는가? 동서독 처럼 개방도 하고 교류도 하고 UN에도 함께 가자는 얘기를 해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우리가 통일에 도움을 주면 줬지 해악을 끼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애국'이었다는 생각도 한다.
감옥에서 나온 뒤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세월이었다. 사건 관계자들과는 거의 만나지도 않았다. 오해 살까봐 그런 것이다. 죽었다면 연락이나 올까….
내년이면 사건이 난 지 꼭 40년이다. 이제라도 국가가 나서서 간첩이 아니라고 확인해주고 '사과' 권유도 나오는 걸 보니 고맙다. 그것이나마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혜택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국가가 보상해달라는 생각을 한 적도 없고 그런 요청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박정희 시절은 그런 스타일의 국가였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제 무엇인가에 구애받지 않고 살게 된 것이라면 기쁜 일이다. 지금도 여권 갱신하려고 신청하면 다른 사람보다 꼭 1주일 정도 더 걸린다. 아마도 서류가 국정원을 경우하느라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내년이 여권 갱신하는 때이니 과연 그런 짐까지 덜 수 있을 것인지 한번 지켜보겠다. (조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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