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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림 사건' 박정희 승인 하에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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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동백림 사건' 박정희 승인 하에 이뤄졌다

강제연행ㆍ고문은 사실…'민비련 사건'은 정치적 목적으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했던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승인 아래 이뤄졌으며 간첩 혐의를 무리하게 적용해 확대된 것이라고 26일 발표했다.

***"박정희가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국정원 진실위는 이날 '동백림 사건 조사결과 발표회'에서 당시 독일 프랑스 등 유럽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학생, 지식인, 예술가 등을 국내로 연행해 오는 과정에서 "주요 우방들과 주권침해 시비를 가져올 해외연행을 대통령에게 보고·승인을 받지 않고 중앙정보부가 독자적으로 추진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밝혔다.

진실위는 "강제 연행이 박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다"면서도 "박 대통령이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는 증언이 있으며 외교분쟁의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대통령이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간첩단'으로 포장"**

진실위는 또 재독 음악가인 고 윤이상 선생을 비롯, 예술계.학계.관계 인사 무려 194명이 연루됐던 이 사건을 당시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간첩단'으로 포장했던 것으로 보았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피의자들의 단순한 대북 접촉 및 동조행위에까지도 국가보안법 및 형법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과장했다는 것.

진실위는 사건 관련자들이 당시 수사결과와 마찬가지로 북한방문, 금품수수, 특수교육 이수, 북측 요청사항 이행 등 실정법을 위반한 것으로 확인된다면서도 "특수교육의 경우 강요된 측면이 강하고 귀국자들에 대한 북한의 지하조직 구축 등 지령사항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이행하지 않았고 3∼4명만이 호기심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안착신호를 발송하고 북한 방송을 1∼2회 청취하는 등 활동의 위반 정도가 약한 편이었다"고 판단했다.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중정은 당시 관련자 203명 가운데 66명을 검찰에 송치하면서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했고 검찰도 23명을 간첩죄와 간첩미수죄로 기소했지만 최종심에서 간첩죄를 적용받은 피고인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진실위는 이어 "중정은 혐의가 미미하고 범의가 없었던 사람에 대해 범죄혐의를 확대하고 귀국 후 대북접촉 활동을 과장하고 특정사실 적용을 왜곡하는 등 사건 외연과 범죄 사실을 확대 발표했다"고 설명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진실위는 천상병 시인의 경우를 꼽았다. 천상병 시인이 '대학 친구가 동백림을 다녀온 사실을 들은 것'을 '암약 중인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으로 확대해 기소했다는 것이다.

***"해외기관과의 협력설은 사실무근"**

또한 당시 해외 거주 관련자들의 연행을 위해 작성된 'GK-공작계획'이라는 중정 문건에 따르면 해당국 기관과의 협조까지 고려했으며 필요한 경우 강압 수단을 사용한 강제연행도 계획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진실위는 연행 대상자들이 거짓말로 대사관으로 유인된 뒤 "실질적인 강제연행"에 의해 국내에 들어왔다고 발표했다. 연행과정에서의 강압성이 있었다는 의혹을 사실로 확인한 것이다.

특히 세계적인 음악가로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던 윤이상 씨의 경우 "연행과정에서 중정은 '국내 초청'이라는 거짓말을 통해 그를 대사관이 있는 본(Bonn)으로 유인했고, 대사관에서는 '한국에 가 간단한 조사를 받고 오면 된다'는 식으로 설득해 한국행을 수락하게 했다"고 조사 결과를 설명했다.

사건 당시 해외 언론들을 통해 제기됐던 독일·프랑스 등 해외정보기관과의 협력 의혹에 대해 진실위는 'GK-공작계획'과 관련된 국정원 내부 문서에 "독일기관 및 경찰협조 불가함으로 은밀 활동 전개, 현지경찰과 마찰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해결", "파견관은 주재국 관계기관에 물적 증거가 포착되지 않도록 유의할 것" 등의 문구가 있는 점으로 미뤄 볼 때 사실무근이라고 확인했다.

천상병 시인 등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됐던 수사 과정의 고문 의혹에 대해서는 수사 관련자들은 가혹행위를 부정하고 있지만, 재판과정 기록 검토와 면접 등의 조사를 통해 "구타·물고문·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도 행사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진실위는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 당시 중정이 재판진행 중 검찰과 재판부에 금품을 제공하려고 계획했던 것이 확인됐다. 진실위는 중정 기조실의 예산국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자료를 발견했으나 실제 예산 집행 여부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만 "자백 이외에 물증을 제시하기 어려웠던 중정이 일정한 금품을 통해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 진실위의 판단이다.

***"기획된 조작사건은 아니다…민비연은 정치적 의도로 조작"**

국정원 진실위는 이 사건과 관련된 또 하나의 쟁점인 '6.8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약화시키려는 기획수사' 논란과 관련해서는 당시 수사계획 등을 검토한 결과 "중앙정보부가 1967년 5월 17일 임석진의 자수에 따라 선거 이전에 계획을 수립해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판단해 '기획된 조작사건'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설명했다.

진실위는 그러나 동백림 사건에 덧붙여져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사건의 경우는 중정이 무리하게 동백림 사건에 포함시킨 것으로 민비연 관련자들은 이미 사법부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중정이 학생시위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 대학생들의 6.8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고 강조했다. 민비연 사건은 명백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목적이 개입된 조작이라는 것이다.

다만 동백림 사건 연루자들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당시 재판부에서도 확인된 것으로 진실위는 이 사실을 재확인했다.

관련자들이 북한 대사관 및 북한 방문, 북한으로부터 금품 수수, 특수교육 이수, 북측 요청사항의 이행 등 실정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위는 이들의 활동은 "그 위반의 정도가 약한 편"이라며 중정이 "단순한 대북접촉 및 동조행위에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간첩으로 확대시켰다"고 발표했다.

실제 당시 재판부는 최종적으로 동백림 사건 관련자 어느 누구에게도 간첩죄를 적용하지 않았다. 민비연 사건의 경우도 관련자 7명이 전원이 최초 공소제기 내용인 반국가단체 구성, 가입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관련자들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진실위는 "해외거주 관련자들에 대한 불법연행, 조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간첩죄의 무리한 적용과 사건 외연 및 범죄사실의 확대과정, 동백림 사건의 민비연에 대한 확대 적용 등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며 "정부는 관련자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진실위는 남은 조사 대상 사건들 중 '김대중 납치 사건'과 '중부지역당 사건'은 오는 3월에, 'KAL기 폭발 사건'은 오는 4-5월 중에 조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BOX〉

***동백림 사건은**

1967년 7월 8일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은 '동백림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규모면이나 관련 인사들의 인지도 면에서 대형 공안사건이었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유학생들과 문화예술인 등 194명이 1958년 9월부터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 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아 기소됐다.

사건에 연루된 사람으로는 문화예술인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임석진, 6.3 학생운동의 주역인 김중태·현승일 등을 포함해 교수·예술인·의사·공무원 등 다양한 사람이 포함돼 있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 부장은 이들 중 일부는 입북하거나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특히 황성모 교수의 경우 북한의 지령을 받아 귀국 후 서울대에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을 조직해 내란 음모 및 선동 시위를 배후 조정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동백림 사건이 발표된 시점은 6.8 부정선거로 박정희 정권이 여러 곳에서 저항에 부딪혔던 때로, 학생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점차 확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동백림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실체를 조작했다는 의혹과 수사과정에서의 고문 등 가혹행위로 허위 진술을 받아냈다는 의혹 등을 받아 왔다.

해외 거주자들의 연행 과정에서는 관련자들이 거주하던 독일·프랑스 등으로부터 주권 침해 논란을 일으켜 심각한 외교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1967년 7월 8일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사건 발표에서부터 1969년 3월 31일 재상고심 선고에 이르기까지 무려 1년 9개월 동안 진행된 수사 및 재판의 결과는 사형 2명(정하룡, 정규명), 무기징역 1명(조영수) 등이었다.

그러나 1970년 12월 사형수들이 마지막으로 풀려나면서 더 이상 감옥에 있는 이 사건 관련자는 아무도 없었다. 전형적인 ‘태산명동에 서일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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