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두 신문의 상반된 분석**
12월5일 고려증권이 도산했다. 1963년 증권파동 이후 34년만에 처음 생긴 일이었다. 고려증권은 국내 36개 증권회사 가운데 자기자본 규모 15위, 거래약정 규모 8위의 중견 상장회사라는 점에서 금융계에 주는 파장은 컸다. 뒤이어 재계 12위의 한라그룹의 7개 계열사가 부도났다. 영진구론산으로 유명한 중견 제약사 영진약품도 부도가 났다. 적자 기업뿐 아니라 흑자기업들마져 자금순환 불순으로 부도 핀치에 몰리는 현상이었다. 한 보도는 부도-파산에 몰린 기업이 1만여개에 달하고 있다고 전했다. 자금과 경영 핀치에 몰려있던 쌍용자동차는 전격적으로 대우로 넘어갔다. 바야흐로 산업-기업의 구조조정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흐름이었다.
이제 기존의 문법으로는 세상을 해석하기 힘든 시대가 되고 있었다. 이회창 후보는 어제까지 자신이 몸담았던 신한국당의 보스 YS에게 공개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에게 사죄하고 기업의 연쇄부도를 막아야 한다"는 대선 캠페인 광고문을 던졌다. 경제위기는 대통령후보자들을 '반YS'로 연대시키는 기묘한 결과를 빚었다. 여당마저도 현직 대통령을 반대하고 공격함으로서 보다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트리플 다크'(2 2 2: 환율2000원, 주가지수200, 금리 20%)시대로 간다는 항간의 속설을 입증이라도 하듯 금융변수들은 IMF 협정 체결 이후에도 계속 상승세를 멈추지 않았다. 12월8일 환율은 달러당 1300원, 회사채 금리는 연 23%로 뛰었고 주가는 무려 21포인트가 하룻만에 빠졌다. 이런 금융혼란은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환율은 1400원을 넘어섰고 실세금리는 25%선에 육박했으며 주가는 400선이 무너졌다. 또 그 다음 날은 환율이 1500선을 돌파했고 금리는 법정 상한선인 연 25%선을 넘어 섰다.
예금 인출이 시중은행에서도 계속되자 정부는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에 대해 1조1천8백억원씩을 각각 출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두 부실은행의 신용상태를 개선시켜 예금인출을 막아보자는 고육지책이었다. 얼떨결에 두 은행은 국책은행이 되게 되었고 금융민영화는 잠정적이나마 후퇴하게 되었다. 원칙은 부서져 나가고 국가 정책의 방향은 오리무중이 되고 있었다.
정부는 12월10일 나라.대한.신한.중앙.한화 등 5개 종금사에 대한 영업을 추가로 정지시켰다. 일거에 이들 종금사에 대한 30조원의 여신이 시한부이지만 동결됨으로서 금융 혼란은 극도에 달했다. 외환시장은 안정세로 돌아설 어떤 징후도 보여주지 못했다.
대규모 IMF 금융지원 협약에도 불구하고 금융마비 현상이 일어나자 새로운 논리가 등장했다. 정치권의 'IMF 재협상' 발언과 국내 언론의 '국치일' 등 감정적 보도가 국제금융 사회의 의심을 받아 외화 자금난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신문 칼럼에서 일제히 이런 주장들이 등장했다. '재협상'은 대선 후보 가운데 특히 DJ가 주장하고 있어 정치적으로 묘한 여운을 던졌다. 이 문제를 신문 1면 톱으로 제시한 조선일보의 기사 내용은 이러했다.
"IMF가 한국 정부의 경제개혁 약속 이행 여부에 불안한 시각을 갖고 있는 데다 정치권의 재협상 발언, 국내 언론의 감정적인 보도 등이 겹치면서 국제 금융계가 한국에 자금지원을 더욱 꺼리고 있다. 산업은행이 이번 주중 발행하려던 20억달러 규모의 3년짜리 '양키본드'에 대해 뉴욕 금융시장은 싸늘한 반응으로 돌아선 것으로 전해졌다. 산업은행은 당초 가산금리를 연 3% 수준으로 협상했으나 며칠새 연 3.25-3.5%로 올려도 발행이 힘들어졌다는 것. 시중은행 국제담당 데스크들은 "한국 언론들이 IMF 지원을 '국치'로 규정하고 대선 후보가 10일부터 '왜 IMF 재협상을 요구하는가'라는 신문 광고를 실으면서 해외 금융기관들 간에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이 번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김대중 이회창씨 등 대선 후보들이 IMF 조건 재협상이나 유보 의사를 밝히고 있다며 '대선이 끝난 후 당선자가 IMF 권고 이행의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을 경우 제 2차 금융쇼크가 한국을 강타할 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도 투자 분석가의 말을 인용, '한국 정부가 2개의 은행에 대해 직접 출자한 것은 비록 IMF 조건에는 명시돼 있지 않더라도 금융산업 구조 조정을 요구한 IMF 프로그램의 기본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작 파이낸셜타임스는 <IMF 처방 과연 최선책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띄워 보냈다.
"하지만 IMF가 지원 조건으로 요구한 사항은 3가지 측면에서 아시아의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 첫째, iMF의 요구사항은 경제활동을 지나치게 위축시켜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는커녕 더 떨어뜨릴 수 있다. 둘째, 자본유입을 급속도로 자유화해 이번 사태의 원인인 금융시장의 취약성이 더욱 심해질 수 있다. 셋째, 대규모의 구제금융은 지금까지 돈을 낭비한 사업을 계속 가능하게 해줘 비효율을 오히려 증대시킬 수 있다.
실제로 IMF의 처방 이후 한국의 경제상황을 보면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다가온다. 한국은 IMF의 구제금융을 신청한 후 단기금리가 21% 이상으로 올라 실질금리가 15%를 넘고 있다. 한국의 원화는 지난 1년간 미국 달러화에 대해 30% 이상 절하됐는 데도 인플레 억제 목표를 5%이하로 잡고 있다. 재정정책도 또한 국내 총생산의 1.5%에 달하는 재정수지 균형 목표 때문에 실효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국 기업과 은행은 회복은커녕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밖에 단기금융상품과 채권시장을 시차를 두지 않고 급격하게 외국투자자에 개방하고 기업의 국외 차입규제를 철폐하기로 한 결정도 문제가 많다.
한국의 위기는 방만한 재정운용이나 높은 인플레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금융시장의 취약에다 정부의 외환정책 실수, 외국금융시장의 불안정 등이 겹쳤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런 점에서 IMF의 한국에 대한 처방은 적절치 않다."
한국에 대한 IMF협정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깔고 있었다. 따라서 '재협상'으로 장애가 일어났다는 보도는 몇가지 탐색이 필요했다. 국제정세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에서였는지, 또는 시국 흐름을 장악한다는 제작 이데올로기에서 연유한 것인지, 혹은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의도를 깔고자 했음에서인지는 분명치 않았다는 점에서다.
국제 경제사회에서 '혹독한 IMF 협정'이 지닌 함정을 또 한쪽에서 지적하고 있음에도 이런 기류는 크게 보도하지 않았다. '경제국치'를 통해 국민 분발을 유도하는 문화적 대응과, '재협상'을 하자는 정치적 주장마저 침묵시킨다면 IMF협정은 진짜 '국치조약'일 수밖에 없다는 반대논리도 성립할 수가 있을 터였다. 태국, 인도네시아 그리고 한국에 총 1천억달러에 육박하는 돈을 끌어 대면서 워싱턴이 노리는 것은 과연 경제적 이유 때문만일까. 일본 엔화에 걷어 차이고 아시아 경제개발국들의 경제부흥으로 퇴색해 온 이래 그린 빽(달러화)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기 10여년, 이제 와신상담 끝에 미국은 신패권주의의 질서와 문법으로 군림하려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재협상 논쟁'은 조선일보의 보도 이후 선거쟁점이 되고 계속되는 외환위기로 해서 '재협상 주장은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주범'처럼 전파되었다. 이회창후보와 동맹자인 조순 한나라당 총재는 재빨리 미국의 캉드쉬 IMF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재협상 불가론'을 얻어냈다. 이를 이어받아 이회창 후보는 공개적으로 김대중 후보에게 '재협상론 철회'를 요구하는 정치적 공세를 취했다.
핀치에 몰린 DJ측은 '재협상'이라는 용어를 '추가협상'으로 바꾸고 <누가 국민의 편입니까>라는 신문 광고를 전 일간지에 게재했다. 이 광고에는 김대중후보가 김대통령에게 보낸 IMF 협약 준수 여부에 대한 각서 사본이 공개되었다.
"김영삼 대통령 귀하; 우리 당의 정책위 의장을 통해 IMF와의 협의 결과를 상세히 보고 받았습니다. 이러한 파국에 이르게 되어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오늘의 파국을 초래한 대통령과 집권당은 어려움에 처한 국민들께 분명한 사과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본인은 대통령에 당선되면 IMF와 협의된 내용을 원칙적으로 이행할 것입니다. 현재로선 IMF와의 협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협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행함에 있어서 계속적인 논의와 세부사항에 대한 협상을 통해서 급격한 경기후퇴에 따른 대량부도 대량실업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위기극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렵다던 산업은행의 양키본드 27억원은 뉴욕의 대형투자은행인 J.P.모건을 주간사로 발행에 성공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같은날 김대통령의 IMF와의 합의 이행 등을 포함한 특별담화 탓인지 '재협상'이란 말을 철회한 김대중후보의 태도 천명이 유효해서였는지는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보도는 하룻만에 허위 보도로 판명났다.
한편 동아일보는 워싱턴 포스트지의 12월11일자를 인용, 한국의 모언론이 IMF문서를 보도해 금융위기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는 보도를 전재했다. 포스트지는 "이 언론의 보도로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고가 정부가 설명하는 것보다 현저히 낮고 단기채무는 월등히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며 "보도가 투자심리에 큰 타격을 미쳤으며 투자가들도 정부의 보안체제에 대해서도 의심을 갖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연이어 워싱턴발 홍은택 특파원의 기사로 이 문제를 계속 보도했다.
"IMF는 최근 한국의 한 신문이 한국에 관한 IMF 이사회 비밀보고서를 보도한 것과 관련, 자체 진상조사를 벌이는 동시에 한국 정부에도 문서 유출경위 조사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IMF는 IMF 내부에서 문서가 유출됐을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 사법기관에 수사를 의뢰할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경우 FBI(미 연방수사국)가 수사를 맡을 가능성이 크다고 워싱턴의 한 소식통이 전했다.
이 소식통은 IMF는 비밀문서가 유출됐을 경우 유출한 당사자를 파면처분했다며 만약 한국 정부에서 이 문서가 유출된 것으로 확인될 경우 관계자 문책을 요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IMF측은 한국에 대한 IMF의 긴급구제금융 제공 이후에도 원화 가치가 폭락한 것은 이 보고서의 공개로 인해 투자자들이 한국 경제의 실상을 오해한 것도 원인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문제의 한 한국언론은 어디인가. 조선일보는 12월8일자 1면톱으로 바로 문제의 IMF극비보고서를 '단독입수'의 특종으로 보도한 바 있었다. 이 신문은 IMF지원 결정 이후에도 외환위기가 꺼지지 않자 '재협상론 때문'이라는 기획분석 보도를 대서 특필했다. 이회창후보의 캠프는 즉각 < 김대중후보의 IMF재협상 주장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선거 캠페인 광고를 각 신문의 1면 5단 통 광고로 띄워 보냈다.
IMF 극비보고서의 단독 보도로 야기된 국제금융시장의 불신을 감추기 위해 표적을 돌린 것이라는 의혹이 언론가와 정치적 피해를 입은 국민회의 쪽에서 대두되었다. 그러나 언론은 과연 무엇이 국제금융사회의 불신을 받은 진짜 원인인지를 규명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동아일보만이 이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전면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한국 신문들이 가지고 있는 감성적 측면과 이성적 측면에서 곧잘 대립상을 보여 온 두 라이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소리없는 싸움의 발로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재협상론'으로 몰린 DJ측을 구원하기 위한 동아일보의 견제구라는 해석들도 나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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