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한 기자가 고백한 '언론의 다섯가지 대죄'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한 기자가 고백한 '언론의 다섯가지 대죄'

<손광식의 '1997 비망록'> (50) ‘오늘은 경제국치일’

***50.'오늘은 경제국치일'**

12월의 첫 화요일,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기온은 영하 12도로 급강하했다. 그러나 날씨의 급변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날부터 IMF의 강풍이 한국의 전역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그 강풍은 청와대부터 휘몰아 들어갔다. YS는 이날 아침 청와대로 국무위원들과 비상경제대책 자문위원들을 소집했다. 구제금융 타결과 관련된 이른바 IMF의 '양해각서'를 의결하기 위해서였다.

막 회의가 시작될 무렵 한통의 긴급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는 말레이시아에서 열리고 있는 '아세안+6' 재무장관 회의에 참석중인 미셸 캉드쉬 IMF 총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대통령 부속실로 뛰어 올라 온 임창열은 수화기를 들었다.

"임장관,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 협상이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한시가 급하다. 이미 협의단과 원칙 합의를 보았으므로 곧 타결 결과를 발표하려 한다."
"안된다. 언론에 협상타결이 됐다고 밝혀서는 안된다. 아직 협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소집해 놓고 있다."
"뭔가 인포메이션이 잘못된 것 같다. 절대로 협상타결이란 해석 아래 움직여서는 안된다. 그러면 이제까지 양 당국이 합의해 온 것도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다."

캉드쉬는 강경했다. 절차상의 문제와 협조융자에 따른 트리가 크로스(방아쇠 조항; 안 지킬 경우의 강압 조항)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대체적 원칙이 합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를 봉쇄한 것은 어쩌면 캉드쉬의 의전적 권위의 발동인지 몰랐다. 임창열은 회의실로 돌아와 상황변경의 급박성을 YS에게 알렸다.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들은 일순 YS의 얼굴에 스치는 참담한 그림자를 보았다. 곧바로 IMF 자료는 국무회의 석상에서 회수되고 안건 심의는 '없던 일'이 되었다.

임창열은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으로 돌아갔고 한국의 조야는 무엇인가 껄끄럽게 돌아가고 있는 IMF외의 협상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이튿날 언론들은 "IMF가 재벌해체를 요구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내 보냈다.

재정경제원은 청솔.경남.경일.고려.신세계.삼삼.쌍용.한솔.항도등 9개 종금사에 대해 연말까지 업무를 정지할 것을 전격적으로 통고했다. 이들 9개 종금사의 총수신은 8조3천억원이 넘었다. 이 조치에 따라 예탁금마저 연말까지 동결됨으로서 대 혼란이 창구에서 일어났다. 블랙 리스트에 끼지 않은 종금사에서도 예탁금의 인출사태가 벌어졌다. 그 파장은 은행권에까지 미쳤다. 제일.서울은행등 두 개 은행이 폐쇄된다는 설이 유포되어 예금이 엄청나게 빠져 나갔다. 금리는 치솟아 올랐고 주가는 더욱 내려 앉았다. 항간에는 '2-2-2설'이 나돌았다. 환율 2천원, 종합주가지수 200, 금리 20%선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12월3일 캉드쉬 IMF총재가 서울로 들어왔다. 정부와 IMF는 이날 밤 '대기성 차관 협약을 위한 양해각서'에 최종 합의, 임창열 부총리와 캉드쉬총재가 조인했다. 이 협정에 따라 IMF등 3개 국제금융기구에서 3백50억달러, 미국 일본등 7개국으로부터의 협조융자 2백억달러등 도합 5백50억달러의 지원자금이 확보되었다. 이를 위해 한국은 경제성장율을 3% 이내로 억제하고 한국은행법을 개정하며 외국금융기관의 설립을 즉각 허용하고 수입제한 승인제도와 수입선 다변화제도를 폐지하며 외국인의 주식취득 한도를 종목당 50%까지 허용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며 금융실명제는 기본 골격을 유지한다는 조건을 이행하겠다고 IMF측에 약속했다.

이 내용이 전달되자 언론들은 일제히 경제주권을 상실했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1면 제목으로 '12월3일은 경제 국치일'이라고 뽑았다. 신문에 보도된 정부의 조인식 배석자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침통했다. 부총리 임창열은 "오늘의 난국을 초래한 데 대해 국민에게 사죄한다"고 발표문을 읽었다.

국가적 위기감과 국민적 허탈감은 극에 달했다. 이미 분노의 차원을 넘어서 좌절에 휩싸인 국민의 집단심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언론과 사회단체들은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이 난국을 극복하자는 슬로건을 흔들고 나왔지만 국민적 좌절의 늪은 깊게 패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기간에 치유되는 쇼크가 아니라 적어도 수년 이상이 걸리는 길고 어두운 세월이 지나야함을 의미한다는 데서, 실업자의 양산과 물가고와 내핍을 요구하는 희생이 대가로 지불되어야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공포감을 확산시켰다.

이런 가운데 일부 지식층은 미국과 일본이 IMF지원을 계기로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시나리오를 IMF 협상진행을 이용해 작성한 것이 아니냐며 강한 의혹들을 제기했다. 힐튼 호텔 19층에서 한국정부와 IMF당국의 실무자들이 협상을 진행시키고 있는 같은 시간에 워싱턴과 일본의 관료들이 '배후연출'을 했음이 분명하다고 이들은 분석했다. 그만큼 한국에 요구한 조건들이 가혹하고 자국 이익 계산이 드러나고 있다고 보았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 IMF가 지나치게 한국측을 몰아세웠다는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IMF측은 한국과의 합의이행에 새로운 요구를 들고 나와 이를 관철시켰다. 바로 3당 대통령후보들의 이행보장 각서였다. 이회창후보와 이인제후보는 각서형식의 문서에 서명했고, 김대중후보는 서명을 하지 않는 대신 김영삼 대통령 앞으로 별도의 이행 서한을 보냈다. 다음 대통령의 통치권 행사까지 간접적으로 구속하는 행위라는 정치적 비판론이 나왔으나 워낙 사태가 급박했으므로 쟁점화되지는 못했다. 엄청난 'IMF의 버섯구름'이 뒤덮여 웬만한 이슈들은 매몰되는 흐름이었다.

손병수기자는 이날 언론의 <5가지 대죄>라는 제목의 작은 칼럼 한편을 띄웠다.

"기자의 잘못이 컸음을 반성한다. 고백하자면 다섯가지 큰 죄를 저질렀다.

첫째, 환상 유포죄다. OECD가입으로 이제 선진국이 됐다는 정부의 허황된 선전을 여과없이 독자들에게 전했다. 해외여행이나 유학열풍 과소비 바람의 바탕엔 언론이 잘못 전한 환상이 깔려 있다고 본다.

둘째, 단순 중계죄. 정부발표를 검증 없이 단순 중계하기에 급급했던 기사가 너무 많았다. 종금사 대책이 하나의 예이다. 정부가 3년간 예금 원리금을 책임지고 보장해 준다는 발표만 전달했지 전격적인 영업정지로 생돈이 종금사 금고에 묶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외면했다.

셋째, 진상 외면죄. 하루 하루 바닥나고 있는 외환보유고의 진상을 외면했다. 한달 전 어느 외국 언론이 '외환보유고 1백50억달러'라고 보도하고 정부는 이를 '악의적인 오보'라며 흥분했었다. 기자는 진상을 파헤치기보다 정부의 반발에 동조했다.

넷째는 대안 부재죄. 기아사태가 좋은 사례다. 법정관리도 반대, 3자 인수도 반대, 신문은 반대와 비판만 했다. 그렇게 1백일을 허송하는 동안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고 있었다.

다섯째는 관찰 소홀죄다. 가장 뼈 아픈 부분이다. 무역외 적자가 늘고 기업이 연쇄 도산하는 데도 나라 경제가 무너질 가능성을 관찰하지 못했다. 실물감각이 너무 무뎠다는 얘기다."

언론 밖에서 이 글은 상당한 공감을 얻었다. 이날의 여러 논평중 하이라이트였다.

국가적 반성의 '대기회'가 확산되고 있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홍사중은 절약과 내핍의 캠페인이 흐름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그의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이 주장들이 과연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를 물었다. 지하철과 버스에 부대끼며 출근하고 빠듯하게 가계를 운영해 온 더 많은 성실한 서민들에게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크게 울리지 못했다.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가하는 의문조차도 매몰될 정도로 'IMF 폭풍'은 엄청났던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반성하고 잘 해 보자'는 자책론에는 사태를 호도하는 함정이 숨어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경제위기의 실체가 IMF의 개입으로 드러나자 시민적 분노는 위정자에 대한 비판과 지탄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나라 경제가 이 꼴이 되도록 무엇들을 했으며 그 책임은 마땅히 밝혀야 할 것이 아니냐는 분노의 분출이었다. 언론은 검찰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 청와대와 경제부처의 전 현직 고위관료를 대상으로 검찰이 경제실정을 내사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탐색 기사는 검찰의 실제적인 조사보다도 국민감정을 전파하기 위한 자체 기획 기사에 가까웠다. 이 기사는 민간 경제연구소와 한국금융연구원 같은 곳에서 일찍이 외환위기를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당국은 '기초 튼튼론'만 내세워 대처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강경식 전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찍어 책임을 물었다.

고건총리가 지하철을 타고 김포공항으로 가던 도중 시민들로부터 받은 냉대는 국민심성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지하철의 시민들은 고총리를 보았지만 한 사람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고 고총리가 묻는 말에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한 승객은 "지금 쇼하고 있냐"는 말을 내 뱉았다.

한편 조선일보는 같은 날 김대중 주필의 글을 시작으로 'IMF를 넘어서...'라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국난을 극복하자는 내용이었다. 비판주의와 국가주의가 갈리는 언론의 한 단면이었다.

경제위기를 자초한 데 대한 검찰조사의 진원지는 좀 묘한 배경이 있었다. IMF의 캉드쉬총재가 몰아부친 배경에는 항간에는 알려지지 안했지만 외환관계 비밀자료가 한은 쪽에서 유출되어 그것을 강압 카드의 자료로 삼았다는 첩보가 있었다. 이 자료는 한국의 외채가 한국 정부가 주장하는 1천억달러 수준이 아니라 그 2배에 가깝다는 자료였다. 그만큼 상황이 다급한 데 한국 정부가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IMF측은 간파한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IMF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외채는 중장기 외채 5백40억7천1백만달러, 단기외채 6백56억2천6백만달러로 총외채는 1천1백96억9천7백만달러였다. 그런데 총외채에 잡히지 않은 국내기업의 해외법인 현지금융이 5백12억달러로 추산된다는 추가 자료가 나왔다. 이를 합치면 외채는 1천7백억달러를 넘는다는 계산이었다. 거기다가 10월말 현재 3백5억달러라고 발표한 외환보유고가 과장되었다는 평가였다. 현금화가 어려운 대외자산까지 포함시켜 외환보유고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그나마 11월 한달 동안 만기 외채 상환 및 원화 방위에 달러를 풀어 실제 가용외환은 70억달러에 불과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이같은 상황이 알려졌으니 '굴욕적' 협상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여러 차례 경고와 국무회의까지 취소하는 굴욕을 당한 YS는 이 책임 문제를 강하게 들고 나왔다. 한국은행이 혐의자로 지목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핀치에 몰린 한은은 반격자료를 작성했다. <한은의 외환대책 일지>가 작성되었다. 그동안 외환위기를 계속 경고하고 대책을 촉구한 한국은행의 상황판단 보고 자료였다. 통계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의 문제로 사안의 핵심을 바꾸어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이 일지가 한 신문에 입수되었다. 의도적으로 리크시켰을(흘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한국은행은 죄가 없다. 판단을 그르친 재경원과 경제수석이 잘못했다'는 메시지가 이 자료에는 담겨있었던 것이다.

한은의 일지 내용은 이러했다.

"97년 3월 중순;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에 "비상시기에는 IMF구제금융도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서 전달.
8월24일; '금융시장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청와대와 재경원에 전달. "비상사태시 IMF구제금융도 필요하다"고 입장 재차 강조.
10월 중순; "환율변동 폭을 확대해 달라"고 재경원에 공식 요청.
10월27일; '외환사정과 대응방안'보고서를 통해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자고 청와대 재경원에 공식 건의.
11월6일; 청와대와 재경원에 전달한 '외화유동성 사정과 대응방안'이란 보고서에서 외환보유고의 실상을 제시하며 "외환사정이 정말 어렵다. 오래 버티기 어렵다"고 재차 강조.
11월9일; 이경식총재는 강경식부총리,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을 만나 환율변동 제한 폭 폐지, IMF구제금융 요청, 외환규제 대폭 강화 등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시큰둥한 반응.
11월10일; 이총재는 김영삼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각하, 정말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라며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거듭 강조한 뒤 재경원.청와대 관계자들을 설득해주도록 요청.
11월13일 강부총리. 이총재. 김수석을 만나 IMF 구제금융을 받기로 합의.
11월15일; 캉드쉬 IMF총재 만나기에 앞서 3자 대책회의.
11월16일; 강부총리, 캉드쉬 만나 IMF 구제금융 요청.
11월19일; 개각 단행, 신임 임창열부총리 기자회견 자리에서 IMF 구제요청 사실을 부인.
11월20일; 임부총리. 이총재, 미 재무부 차관보와 IMF 수석 부총재를 면담.
11월21일; 정부, IMF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공식 발표."

어떻게 보면 한은 문책에 대한 변론자료의 성격을 넘어 국가운영에 대한 대통령의 무능과 판단력 부족을 고발하는 메시지로 이해되는 보고서였다. 이 일지가 보도된 후 이경식 한은총재는 곧바로 YS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이 사의표명과 관련하여 그는 "내가 확인해줄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묘한 뉘앙스의 답변을 했다. <계속>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