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IMF사태에 이끌린 대선**
11월23일 오후 대한항공 082편으로 세사람의 IMF 실무팀 일행이 도착했다. 토마스 밸리노 IMF 통화환율국 소속 팀장 등 이들 일행은 넥타이도 매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일행 가운데는 불과 한달 전 한국을 방문했던 피터 헤이워드도 끼어 있었다. 그는 "한달 전만 해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고 말했다. 밸리노 팀장은 공항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금융위기는 금융시스템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들 일행이 한국을 향해 비행기 속에 있을 때 일본의 4대 증권사 가운데 하나인 야마이치 증권은 긴급임원회의를 열고 폐업을 결정했다. 막대한 부실채권에 의한 경영파탄이었다. 일본 금융기관들이 이 사태를 계기로 국내외 단기대출금 회수에 나서는 경우 외채 상환 압박을 받고 있는 한국은 상황악화가 가속화될 잠재성이 있어 위기감은 더욱 진폭을 넓혀갔다.
예고된 것이긴 했지만 '환율폭격'은 엄청난 파장으로 한국을 초토화시켰다. 전쟁에 버금가는 쇼크가 일어났다. IMF 실무단이 들어오고 무슨 일이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나게 될 것인가를 일반시민도 알아차리기 시작하자 시장교란 현상이 일어났다. 증권시세는 다시 대폭락, 종합주가지수 4백선을 향해 곤두박질쳤으며 시중금리는 치솟아 올랐다. 주요 재벌기업들은 비상대책 회의를 열고 감원과 투자계획 감축에 들어갔다.
더욱이 IMF측은 금융지원을 조건으로 엄청난 강도의 긴축과 정책조정을 요구하고 나설 것이라는 예측들이 지배되어 심리적 공포감은 사회적 패닉(공황) 현상을 일으킬 정도였다. 바야흐로 리더십과 국가적 통일성이 필요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YS는 이런 상황을 야기시킨 장본인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었고 정치는 대선 때문에 구심력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IMF의 살무자의 말처럼 도대체 지난 1개월 동안에 이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나 이 의문도 정확한 답을 끌어내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다. 세계 금융계와 워싱턴의 여러 세력의 이너써클은 지금 어떤 자료를 입력해서 어떤 '패권의 문법'을 작성하고 있는가가 이 해답을 찾아내는 데 보다 접근된 물음일지 몰랐다.
언론은 경제 재건 캠페인에 들어갔다. 이 고통은 국민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며 고통을 감내하고 위기를 기회로 삼자고 호소했다. '장농 속의 달러 내놓기'를 비롯한 절약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보도로 위기돌파를 위한 심리전을 폈다.
다른 한편 대기업을 중심으로한 구조조정이 일어났다. 정주영의 동생 정인영의 한라중공업은 전 임직원의 50%에 해당하는 3천여명을 감축하고 임직원 62명의 일괄 사표를 받았다. 삼성그룹은 98년 1월부터 임원급여를 10% 삭감하고 조직을 30% 줄이는 한편 경비도 50% 짜르는 경영체질 혁신방안을 결정했다.
문제의 종금사에 대해서는 강제 정리작업이 시작됐다. 재정경제원은 경남. 고려. 대한. 삼삼. 경일. 영남. 한길. 삼양등 8개 종금사에 대해 11월29일안으로 외화자산과 부채를 은행에 넘기도록 통보했다. 핀치에 몰린 종금사들이 자금회수를 강행하자 중견기업들은 '부도 도미노 현상'을 일으켰다. 태일정밀. 뉴맥스에 이어 중원. 핵심텔레텍이 쓰러졌고 동성철강․수산중공업․온누리여행사․금경이 잇따라 부도를 내거나 화의신청에 들어갔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S&P사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다시 2등급이나 강등시켰다. 이와 함께 수출입은행 산업은행등 국제금융기관과 한국전력 한국통신등 주요 공기업에 대한 등급도 일제히 낮추었다. 환율인상에 따라 국내 정유업계는 휘발유값을 일거에 리터당 81원 올렸다. 리터당 9백23원. 불원간 1천원이 될 것이라는 예고 기사에도 소비자는 아무런 저항들을 하지 못했다. 30대 재벌들은 통상산업부장관을 불러 놓고 금융기관 대출기간을 연장하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동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이제 IMF는 '마법의 지팡이'가 되고 있었다. 국민정서와 여론이라는 압력에 의해 움쭉을 펴지 못해 온 이른바 시장원리가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시장권력의 문법이 숨어 있었다. '다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겠다'는 바로 그 법칙이었다. 정유업계의 가격 인상분중 휘발유의 경우 자체 소화액은 19원이라고 해당 업계는 생색을 냈다. 1백원 올릴 것이로되 81원만 올렸다는 설명이었다. 가격전가에 의해 해법을 찾는 방법이 시작된 것은 서서히 사라졌던 인플레의 망령이 다시 배회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11월26일 한나라당 이회창. 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 이인제후보는 일제히 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등록을 마쳤다. 이로써 대통령 자리를 잡기 위한 열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군소후보로는 국민승리21의 권영길. 공화당의 허경영. 통일한국당의 신정일. 바른정치연합의 김한식 등이 있었다. 이날 각 후보들이 선관위에 제출한 재산신고액은 이회창후보 10억3천5백38만원, 김대중후보 9억7천33만원, 이인제후보 8억2천1백52만원이었다. 이 재산액이 공개되자 김대중후보는 정직성에서 의심을 받았다. 특히 반DJ세력들은 그의 일산 집 하나만이라도 수십억원은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신문 1면의 광고지면을 제일 먼저 장악한 것은 이회창후보.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를 선언하고 나섰다. 다음날 김대중후보는 '든든해요 김대중'으로 신문의 광고수입을 올려주었다. 그러나 이회창후보는 역시 경제에서 역부족이고 김대중후보는 건강도에서 역부족인 것을 역으로 드러낸 선전구들이었다. 광고문안을 뒤집어 보면 그랬다.
경제대란과 대통령선거가 맞물린 상황으로 해서 선거쟁점은 불가분 경제를 망친 '갱제'로 집중되었다. 3당은 예외없이 금융실명제에 낙인을 찍고 나섰다. 하나같이 금융실명제의 유보 내지 보완을 주장했다. 국민회의 김대중후보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통령긴급재정명령'을 발동해야한다고 주장하고 IMF의 관리기간중 금융실명제의 전면 유보, 전 금융기관의 대출금 상환 6개월 유예, 98년 예산 10조원 경감 등을 단행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이를 YS가 단행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도 불사하겠다고 정치적 공세를 취했다. 한나라당도 성명을 발표, 대통령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며 대통령의 긴급경제명령 발동을 요구했다. 국민신당도 금융실명제 보완을 위한 대책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YS는 이에 강력히 반발, 실명제를 건드리는 것은 일부 특정 세력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오히려 투명성을 요구하는 IMF의 주장에도 위배되는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대통령긴급재정명령권은 25년 전 박정희정권 때 단행된 '8.3조치' 같은 비상대권 발동을 말한다. 한국경제의 왜곡된 금융 구조는 뒤집어 말해서 25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는 소리였다.
어쨌든 허탈로부터 분노로 변한 민심은 경제대란의 스케이프 고트(속죄양)를 요구했고 표를 모아야 하는 각 정파는 일제히 그 표적을 YS와 금융실명제로 겨누었다. 자신들도 유권자와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인 것처럼.
부총리 임창열은 11월28일 급거 일본으로 건너갔다. 마쓰즈카 히로시 일본 대장상과 만나 금융지원을 요청했다. 두 장관은 양국의 협조를 천명하는 성명을 냈지만 일본의 지원 원칙만 확인되었을 뿐이었다. 임부총리의 일본 방문은 이같은 경제외교 차원의 협력문제보다도 다급한 현실상황 때문이었다. 후지은행을 비롯한 일본계 은행들은 자신들의 외화자금난 등을 이유로 외환은행등 시중은행에 거래중단 사실을 통보하고 기존 대출금도 만기가 된 것은 곧바로 회수해 가고 있었다. 이 규모는 약 80억 달러에 달해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외환사정을 악화시키고 있었던 터였다.
이날 김포공항 도착 램프에 최형우 의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대선을 앞두고 권력쟁투 와중에서 쓰러져 세미 코마(반 마비)상태에 들어갔던 최형우는 수족이 불편해 보였지만 그래도 휠체어 없이 걸어들어왔다. 이제 세미 코마 상태에 들어간 한국경제가 최의원처럼 수개월 후 상처를 입긴 했지만 제발로 다시 걷는 모습을 보여주게 될런지 아무에게도 자신감은 없었다. 그만큼 재건심리는 집단적 좌절감과 황당함에 매몰되어 있었다.
금융은 완전히 혼수상태에 들어갔다. 증시는 붕괴의 조짐을 들어내 종합주가 지수는 4백선마저 무너지고 환금성을 상실한 주식은 거래조차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자금순환은 차단되어 견실한 기업까지 부도 위협을 받았으며 소비절약 캠페인과 외화절약 운동에 따라 해외여행업등 일부 사업은 즉각적인 영향을 받아 도산행렬이 줄을 이었다. 견실한 여행사로 알려졌던 씨에 프랑스 등 큰 여행사도 부도를 막지 못해 도산했다.
11월30일 힐튼 호텔 19층 한 방에서 정부와 IMF의 실무진은 긴급금융지원에 따른 협상을 진행시켰다. 임창열 부총리와 나이스 IMF 단장은 청와대와 워싱턴의 핫 라인을 열어 놓고 마지막 조정안을 놓고 협상에 들어갔다. 한 참석자는 이날 아침부터 계속된 긴장된 분위기의 협상 모습을 '마치 칼날 위에 서 있는 기분'으로 표현했다. 양측은 이튿날 새벽 협상안에 합의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 협상에 따라 한국은 98년 경제성장률을 3% 이내로 하고 경상수지 적자는 GDP의 1% 이내인 50억달러 선으로 하며 재정수지도 GDP대비 0.2% 흑자를 유지토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조건을 이행하는 것을 전제로 IMF는 빠르면 12월4일 안으로 1차 자금지원을 하고 계속 자금 파이프 라인을 보장키로 했다. 대략적인 규모는 IMF 자체자금 1백억 달러 이상을 포함, IBRD(세계은행) ADB(아시아 개발은행)등 국제기구 1백억 달러 이상, 미국 일본 등 협조융자 3백억 달러 이상등 최소한 5백억 달러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이로써 외환위기로 빚어진 대혼란은 수습되는 듯 보였으나 IMF측의 테크니컬 노트(기술적 이행문서)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긴축금융정책을 고리로 걸어 이번에는 대대적 혼란이 현재화되기 시작했다. 우선 종금사의 예치금이 대거 인출되는 금융 패닉이 일어났다. 부실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종금사의 통폐합이 단행된다는 방향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주가도 곤두박질을 쳐 3백선을 위협했다. 유보쪽으로 기울어진 실명제가 IMF의 반대로 살아난다는 소문이 퍼져 대투매 현상이 일어났다. 여기다가 IMF측이 강력한 여신규제를 요구해 금융 유동성은 극도로 위축되어 극한적 자금난이 일어났다. 감각적으로 한국 경제의 상황을 얘기해서 '탈출구는 없다'였다.
밖으로는 IMF의 파상공세를 받고 있는 가운데 대선 레이스는 12월 들어서 막판 피치를 올렸다. 대중집회를 중심으로 했던 '거리의 선거'로부터 '미디어 선거'로 선거양상이 바뀐 것이 97년 대선의 한 변화였다. 후보 등록 이전까지는 여론조사 기관의 인기도 조사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신문보도와 논조가 이끌어 왔다면 본격 선거전으로 돌입하면서는 TV가 주도하는 양상이었다.
12월1일. 전국의 시청자들은 TV앞에 모여들었다. 이회창 -김대중-이인제로 압축된 선거 양상에 따라 3당 후보가 브라운관을 통한 정책토론 대결이 진행된 것이다. 일반 유권자는 경제정책 대결을 놓고 후보를 저울질하는 기회를 맞았지만 각 후보 캠프는 이 토론회를 계기로 하여 인기도가 어떻게 변하는가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후보마감과 동시에 지지도 여론조사 공표는 법에 의해 차단되고 있었지만 여론조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몇 개의 여론조사기관에 의하면 이회창후보는 김대중후보를 누르고 3%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미디어 리서치의 조사에서는 33 대 30으로, 코리아 리서치 조사로는 36 대 33으로 이회창후보의 역전 추세를 보여주었다. 이 조사는 TV토론회가 있기 전인 11월27, 28일께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3당후보가 동시에 출연하는 12월1일의 토론회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첫 공개토론회의 주제는 경제정책이었다. IMF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긴박해진 경제상황과 3당후보를 한곳에 모아놓고 벌이는 공개된 자리이기 때문에 후보들에 대한 상대적 평가가 가능한 기회였으며 수백만의 유권자가 바로 코앞에서 TV로 지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이 토론회에서 각 당의 차별화된 경제정책과 그에 따른 논쟁이 유도되지는 못했다. 후보 각자는 원론적인 얘기들만 했다.
예컨대 구조조정을 위한 방법으로 기업의 감원문제가 예각화되었음에도 각 후보는 실업을 최소화한다는 말을 복창했을 따름이다. 경제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전략 전술을 시장원리로 풀기보다는 유권자의 표를 의식한 정치 사회산술적 각도에서 접근했다. 급한 것은 경제가 아니라 '표'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경제대란에 대한 확실한 철학과 전략 전술은 빈곤함을 드러냈다.
이 토론회는 오히려 후보들간의 정치적 공세가 시청자의 흥미를 모았다. 2위의 인기 순위를 누리다가 3위로 밀려난 이인제후보는 인사말부터 2위인 이회창후보를 공격했다. 아들의 병역시비였다. 이인제 후보는 이회창 후보에게 미국에 가 있는 둘째 아들을 불러들여 키를 재보라고 제의했다. 그는 여기서 의혹이 일어날 경우 이회창 후보는 사퇴해야 마땅할 것이며, 만약 이후보측이 주장한대로라면 자신이 후보직을 사퇴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이회창후보의 둘째 아들의 키는 160센티미터인데 165센티미터로 조작되어 병역을 기피시켰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불합격 판정을 위해 키를 늘려 체중 미달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국군통수권자로 이회창후보는 자격이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회창후보는 이에 대해 "아마도 진실이 밝혀지면 이인제후보가 사퇴하는 결과가 나오게 될 것이니 유감이다"라고 응수했다. 이 문제뿐만 아니라 YS가 국민신당 창당자금 2백억원을 지원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데 대해서도 진위를 밝히라고 이인제후보는 공격했다. 이 공격은 이회창후보뿐 아니라 김대중후보에게도 공통적으로 화살을 돌린 것이긴 했지만 토론의 흐름을 간파한 DJ는 이인제후보에게 곧바로 사과를 하여 사정권을 피하는 기동력을 보였다. 자연 이회창후보와 이인제후보간의 공방이 되었다.
어떻든 경제실정과 두 후보로부터의 연합공세로 이회창후보는 이 토론회에서 점수를 잃었다. 토론회 직후 한나라당 부속 연구기관인 사개연(사회개발연구원) 조사에서 조차 이후보는 DJ에 비해 3%정도의 열세로 반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공격적이었던 이인제후보도 지지도의 반동 상승효과를 얻었다. 물론 이런 조사들은 그 공표가 선거법상 금지되어 있었음으로 언론 내부에서만 유통되는 정보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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