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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통은 물가 잡고 김통은 깡통만 남겨"

<손광식의 '1997 비망록'> (48) 이틀간의 거짓말

***48. 이틀간의 거짓말**

이런 국면 가운데 쇼킹한 사건이 안기부에 의해 발표되었다. 저명한 사회학자로 알려져 온 서울대학교의 고영복 명예고수가 36년간 북의 고정간첩 노릇을 해 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북한의 부부간첩 최정남(35)과 그의 처 강연정(28)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고교수는 61년 밀파간첩을 통해 북한에 포섭된 후 수시로 남파간첩들과 접선하며 은신처를 제공하고 국내정세 보고서를 제공하며 73년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회담 마지막 날 남측에 의해 이산가족 확인 및 상봉을 위한 면회소 설치등 구체적 제의가 있을 것'이라는 회담전략을 북측에 알려준 혐의였다.

고교수가 구속된 직후 그의 변호인으로 의뢰받은 한승헌 변호사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고교수가 혐의사실을 모두 고백한 것으로 안다고 말하고, 그러나 적극적으로 신념을 가지고 간첩행위를 한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한변호사는 고교수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모두 하나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양쪽 모두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북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으며 대한민국을 배반할 생각으로 한 짓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런 갈등의 일단인지 몰라도 고교수는 안기부 수사 도중 자살을 기도했다.

안기부는 고교수 간첩혐의와 함께 서울 지하철공사 동작설비분소장 심정웅등 4명이 북한의 지령으로 암약해 온 사실도 밝혀냈다. 안기부는 이 사건으로 1백여명을 참고인으로 조사했으며 고교수가 접촉했던 정치권 인사들과 제자등 2백여명에 대해 참고인 조사와 동향 조사를 계속중이라고 밝혔다.

부부간첩이 체포된 경위는 이러했다. 진보 혁신세력 단체인 민주주의 민족통일연합 울산지부장인 정모는 10월21일 이들 부부를 한 다방에서 만났다. 이들은 자신들은 북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접선 포섭을 시도했다. 정씨는 곧바로 112에 신고를 했고 안기부는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정씨는 부부간첩 접선이 안기부에 의한 함정 공작으로 판단하고 신고뒤 서울로 올라가 기자회견을 자청, "공안당국이 대선을 앞두고 공안사건을 조작하고 있다는 의심이 있다"고 말했다.

정씨는 10월27일 울산 코리아나 호텔에서 이들 부부간첩을 다시 만났다. 이때 안기부 요원들이 현장을 포착, 간첩부부를 체포했다. 부부중 여자쪽인 강연정은 수사도중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던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 고교수와 지하철 마비공작을 예비하고 있었던 심정웅의 간첩활동 이외에도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졌다. 2월15일 분당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일어난 이한영 피살사건도 북의 전문 킬러 '순호조'가 저지른 소행이었다는 것이다. 이한영은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로 남쪽으로 망명, 북의 권력내부를 파헤치는 책을 준비중에 있었다.

또하나 놀라운 사실은 78년 8월 군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실종된 김영남(당시16세. 군산공고 1년)군, 닷새 뒤 서해안 홍도에서 행방불명이 된 홍건표(당시17세. 청안상고 3년)군과 이명우(당시 17세. 천안농고 3년)군등은 북한공작원에게 납치되었으며 대남공작원들을 대상으로 한 이남화 교육에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의 부부간첩이 해상으로 침투, 거의 전국을 누비다 싶이 잠행을 하기 시작했던 때 남쪽은 기아사태로 전사회가 혼미의 와중에 휩싸여 있었고 정치권은 이회창 신한국당의 대통령 예비후보의 아들 '병역시비'로 들끓던 때였다.

한성진 대공수사실장은 이사건을 발표한 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현재 남한에는 좌익세력이 1만명, 동조세력이 3만명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보수 우익인사로 어용교수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던 고교수조차 북의 고첩이었다는 현실을 환기시켰다.

전 매스컴은 안보위기를 경고하고 나섰다. 그러면서도 이른바 '북풍'의 정치적 이용을 경계했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으로서도 이번 간첩단 사건을 호재니 악재니 하며 정략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벌써부터 이 사건을 놓고 자파의 유불리를 저울질하는 모양이나 안보에 관한 한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초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공안당국도 연루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간첩색출 작업에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선거철 민감한 시기인 만큼 불필요한 오해는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른바 '북풍'과 대선함수는 언론이 염려하는 방향과는 다른 흐름을 타고 있었다. 남파 부부간첩과 고영복 교수 사건으로 서울이 '안보 긴장'으로 덮인 날 워싱턴 시내 콜롬비아 대학 구내 한 회의실에서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개국 대표들이 자리를 같이했다. 이들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긴장완화에 관한 방안'이라는 단일 의제를 토의할 4자회담을 12월9일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열기로 극적 합의를 보고 있었다. 송영식 한국 외무부 1차관보, 김계관 북한 외교부 부부장, 찰스 카트만 미국 국무부 동-아태담당 부차관보, 첸친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는 회담개최에 합의하고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이 합의에서 북한측은 전제조건으로 물고늘어졌던 식량지원을 철회하고 '한반도 평화체제구축과 긴장완화를 위한 제반문제'로 의제를 단일화한다는 데 동의했다. 서울발로 타전된 간첩사건은 즉각적으로 평양에 전달되고 김정일정권은 워싱턴에 '긴장완화'로 대응한다는 전략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바로 타타담담의 전략이다.

한편 워싱턴 포스트지는 4자회담개최 합의와 관련, 미국측은 북한에 대해 1백만톤의 식량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미국 행정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 클린턴 행정부는 최근 북한에 WFP(세계식량계획)를 통한 대규모식량지원을 비공개적으로 약속했다고 전했다. 이 규모는 97년의 대북지원 식량규모 30만톤의 3배이상이나 되는 분량이었다. 결국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 환율과 식량으로 두 개의 와일드 카드를 동시에 잡아낸 결과가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이라크의 긴장상태도 해결되었다. 후세인은 유엔의 무기 사찰단의 재입국을 허용, 미국에 굴복했다.

임창열부총리는 11월21일 밤 10시30분 긴급기자회견을 요청하고 정부가 IMF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는 IMF당국은 언제든지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의사를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바로 하루 전날 IMF구제금융은 아직 요청할 단계가 아니라고 말했던 임부총리가 급전직하 방향을 바꾼 데는 몇가지 복잡한 상황이 있었다.

우선 정부의 금융안정화 대책에도 불구하고 환율은 진정세를 멈추지 않은 현실적인 시장상황이다. 그러나 대선을 앞둔 정권교체기이기 때문에 집권당에게는 엄청난 불이익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급적 이를 회피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다음으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 참석을 바로 앞두고 있는 YS의 정치적 체면 문제가 걸려 있었다. 세계지도자회의에서 부도가 난 국가원수로 얼굴을 내밀게 된 상황은 비록 자신의 책임이라는 비난을 받고는 있지만 YS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치욕이었다. 그래서 이미 IMF로 가기로 했으면서 임창열이 며칠 동안 거짓말을 한 것이다. 임창열이 부총리가 되어 권력에 대한 충성심에서 그랬는지 YS의 무지가 복합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사태가 급박한지라 YS는 굴복했다. 그리고 곧바로 3정파의 대선후보와 당 총재를 청와대로 초청, 경제위기 탈출을 위한 공동협력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 모임에 국민신당의 이인제후보와 이만섭총재는 불참했다. 명분은 경제를 망친 장본인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YS=국민신당'이라는 정치적 공세를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였다. 이날 청와대 회의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신한국당이라는 깃발을 한나라당으로 바꿔 단 이회창후보는 YS의 APEC 참가를 반대하는 등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 반면 김대중후보는 오히려 YS와 호흡을 맞추는 분위기였다.

11월22일 YS는 그의 재임중 14번째 외유로 제5차 APEC정상회담 참가를 위해 캐나다의 밴쿠버를 향해 날아갔다. 그 직전 YS는 경제난 극복을 위한 대국민 메시지를 청와대에서 낭독했다. 한 신문은 이렇게 논평했다.

"그의 해외순방은 노태우 전대통령보다 3차례나 많았고 경비도 40억원이나 더 들어갔지만 문민정부의 정상외교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는 아직 없다."

신문 논조들은 IMF 구제금융에 대해 불가피성을 지적하고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고 호소하고 나섰다. 그러나 경제 우등생으로부터 '부도국가'로 전락한 현실에 대해 민심은 경제불만을 정치적 비난으로 치환했으며 '경제 국치일' '신 한.미합방'등으로 표현하면서 YS와 그의 문민정부의 무정견하고 무능한 국가경영을 지탄하는 데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인페리오리티 컴플렉스(열등감)의 극치는 신문 만화에서였다. '갱제'를 망쳐 놓은 YS가 주인공이었다. 울고있는 고아(한국경제)를 고아원에 맢겨두고 APEC 잔치집으로 떠나는 YS, 그의 뒤에서 고아를 맡은 보모(IMF)의 눈초리가 무섭고 회초리는 바람을 일으킨다.

"'전통'은 물가를 잡고 '노통'은 정권을 문민에 이양했는데 김통은 '깡통'만 남겨."

4컷짜리 한 신문 만화의 소재였다. 국가경제가 이제는 한보나 기아와 같이 파산이나 법정관리 상태에 들어간 것이라고 비탄의 소리들이 높았다. 분명 국가는 최대의 긴장 국면에 들어갔는데 그것이 생산적 긴장 아닌 파멸적 긴장으로 지배되는 흐름이었다.

IMF구제금융 요청이 발표되기 직전부터 환율은 하향 추세를 나타내어 1천원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종합주가지수도 순식간에 5백선을 회복했다. 단 하루만에 '간첩 고용복 쇼크'는 신문지상에서 사라졌다. 독가스 앰플을 삼켜 자살한 여간첩의 사인을 놓고 검찰이 의혹을 제기, 국과수에 의한 재검시가 있을 예정이라는 기사가 한 귀퉁이에 실렸을 뿐이다.

11월의 마지막 월요일 주요 언론들은 거의 예외없이 대선흐름을 주요 이슈로 부활시켰다. 그리고 예외없이 '대선 판도 양자대결'로 1면 톱의 컷을 뽑았다. 모든 지지도 조사에서 급부상한 이회창 후보와 1위를 계속 고수해 온 김대중후보의 대결양상으로 흐름을 전파했다. 선거법이 허용하는 최종 여론조사가 될 11월24일자 각 후보별 지지율은 1위 김대중 2위 이회창 3위 이인제로 일제히 2위와 3위가 바뀐 것은 물론 불과 1주일전 조사에 비해 이회창 후보가 엄청난 격차로 이인제후보를 밀어낸 것으로 나타났다.

각 언론사들 조사에 따르면 1위 김대중후보와 2위 이회창후보의 차이조차도 박빙의 상태였다. 동아일보의 조사로는 김대중 33.8%대 이회창 32.2%로 불과 1.6%포인트의 차이였고, 중앙일보 조사에서도 김 36.8%대 이 34.1%로 그 차이는 불과 2.7%포인트였다. 조선일보와 MBC 공동조사에서는 33.1%대 28.9%로 4.2%포인트, 경향신문 조사에서는 35.2%대 30.3%로 4.9%포인트, 한겨레신문 조사에서는 34.4%대 29.9%로 4.5%포인트로 이회창 후보가 대추격전을 벌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대역전의 희생자는 물론 이인제후보였다. 그와 이회창 후보의 격차는 7내지 최고 10%포인트 이상까지 벌어진 것으로 나왔다. 커다란 낙차로 이회창 후보에게 역전당한 국민신당의 이인제후보는 '여론 조사의 조작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대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모방송국이 여론 조사를 의뢰한 코리아 리서치의 박영준씨는 한나라당의 정세분석 위원이자 이회창 캠프의 실질적인 여론조사 담당자"라고 폭로하고 "박씨는 이회창후보가 아들 병역문제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이후보의 측근 인물들로부터 여론조사 내용을 조작하도록 여러번 압력을 받아왔으며 이회창 후보와도 수시로 만나 지지율을 올릴 수 있는 방안을 보고해 온 인물"이라며 여론조작 음모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위협을 느끼고 있는 국민회의 쪽에서도 여론조사에 정치적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 실례로서 한나라당은 동아일보가 하지도 않은 여론 조사를 한 것처럼 조작해 당 부설기관인 사회개발조사연구소의 조사결과를 언론에 흘리고 있는 것도 정치공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1월24일에 발표된 각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김대중후보와 이회창후보의 차이기 가장 근소하게 나온 것은 동아일보의 조사였다.(1.6%포인트) 문제의 박영준은 한나라당 정세분석위원임이 밝혀졌으나 이회창 캠프에서는 코리아 리서치 조사와 다른 여론조사가 별 차이가 없다고 이 의혹설을 일축했다.

그러나 일부 신문의 경우 1차조사가 끝난 후 답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2차조사를 다시 해서 이회창후보의 지지율이 높아지자 그 결과를 발표했다. 2차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에 대한 추가 지지율이 낮아졌을 때도 이 언론기관이 그대로 발표했을 것인가 의문이 제기될만 했다. '2자 압축 구도'로 보도의 흐름을 잡아 이회창의 대역전을 기도한 흔적이 역연했다.

어떻든 '고영복 사건'과 금융대란 가운데 한나라당 이회창후보는 대약진을 한 것은 분명했다. 급기야 김대중 캠프는 예의 폭로전으로 대응했다. 병역문제로 소록도에 내려간 이회창후보의 아들 정연씨가 몰래 밤낚시를 나가고 노래방에서 놀았다고 했고 이후보의 부인으로 하여금 잡지사 여기자들을 대동, 소록도로 가서 아들과 눈물의 상봉을 하여 동정표를 끌어 모으자는 시나리오가 한나라당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고 흘렸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박무익소장은 이같은 여론조사를 둘러싼 공방에 대해 '여론조사 감상법'을 말했다.

"여론조사는 현재의 온도를 표시하는 것과 같다. 선거때까지 20여일이 남아있다. 현재의 지지도가 투표일까지 이어지기는 어렵다고 본다. 지난 3개월 동안 지지도는 뒤바뀌어 왔다. 그만큼 이번 선거는 혼란스런 구조다. 조사 표본이 5천명이지만 시.도별로는 작게는 3백명이 대상자가 된다. 오차가 클 수 있다. 전화로 조사대상자에게 질문할 경우 45%는 응답을 않고 전화를 끊는다. 응한 사람들일지라도 또 20%는 "말할 수 없다", "모르겠다"고 한다. 엄청난 변수가 숨어있을 수 있다. 지지율을 놓고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다. 현재의 흐름을 짚어보는 자세가 제대로 된 판독법이다."

이 해설은 하나의 문제점을 던져 주었다. 소박한 산술방식으로 치면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은 대상자 가운데 50%도 안되는 유권자의 성향으로 지지율이 나오고 있다는 결과다. 결국 이제까지의 여론조사는 '거품'일 수도 있고 진정한 유권자 성향을 판독하는 자료로 볼 수 없는 함정이 있었다. 만약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면 언론에 의해 전파되고 그것이 흐름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이끌려져 온 97년 대선은 '거품과 진실'이 따로 흐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국의 경제와도 흡사한 일면이었다. '경제 우등생'으로 전파되어 온 한국경제의 진실은 '거품 구조' 위에 떠 있었다는 사실이 금융대란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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