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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속에서도 정치인들은 대권에만 열중"

<손광식의 '1997 비망록'> (47) 신문에서 사라진 정치기사

***47. 신문에서 사라진 정치기사**

국회재경위 법률안 심사 소위원회는 11월13일 상오 이른바 금융개혁 법안을 찬성 5, 반대 3으로 통과시켜 전체회의에 회부했다. 정부안을 수정 보완한 13개 개혁법안은 중앙은행 명칭은 그대로 한국은행으로 하고 은행 증권 보험등 3개 감독원을 통합한 기구는 재경원 산하에 두되 직원의 신분을 공무원으로 하지 않으며 은행비상임이사회에는 5대 재벌 참여를 불허하는 내용으로 되어있었다.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이 개혁입법에 찬성하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반대하되 표결에는 참여한다는 정치협상이 이루어졌다. 지리멸렬하던 개혁법안이 국회회기내 처리로 급진전된 것은 여론의 엄호사격 덕이었다. 경제와 금융위기의 와중에서 정치권이 대권경쟁과 그에 따른 정치적 이해득실만 고려하고 어물어물 넘어가다가는 위기가 아니라 '재앙'이 불어닥칠 것이라는 경고를 각 언론은 계속 쏘아 올렸었다.

그러나 '주말 예결위 통과- 국회 본회의 표결'이라는 방침은 한국은행의 반발로 무산되고 막판 진통에 들어갔다. 한국은행과 보험감독원 전 직원들은 비상총회를 열고 감독기관의 통합과 이 통합기구의 재경원 산하 설치는 새로운 관치금융의 음모라고 비난하면서 법안 통과가 강행되면 총사퇴 운동을 벌이겠다고 협박했다. 민병도․하영기․김명호등 전직 한은총재들도 모임을 갖고 감독기관의 통합과 재경원 이관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 여론의 지지를 받은 현실론과 한은측의 이상론은 마지막 충돌을 빚었다.

이런 혼란 가운데 재계연합의 총본산인 전경련은 금융실명제의 사실상 폐기를 의미하는 이 제도의 전면 유보를 요구하고 나섰다. 권력의 누수현상과 경제 위기를 이용하여 '경제쿠데타'를 기도한 것이다. 최종현회장의 주재로 열린 회장단 회의를 끝마치고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은 브리핑을 통해 "92년 27.7%였던 민간저축률이 96년에는 23.7%로 떨어졌고 이로 인해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되어 환율이 급등하게 된 것"이라고 경제악화의 원인으로 실명제를 끌어들였다. 그는 현재 지하자금 규모가 30조원에 달하고 있어 실명제 유보로 자금순환을 터 주면 기업은 되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경련 측은 경제위기의 한 해법으로 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반 YS'의 도전을 의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부와 청와대는 "전경련이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대응하고 나섰다. 실명제 폐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회창 캠프는 여론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실명제 폐지같은 폭탄 선언을 은밀히 검토중이었고 전경련도 이 기미를 눈치 채고 선수를 치고 나온 배경이 깔려 있었다. 청와대의 강력한 반발을 받자 전경련은 일단 문제를 제기한 것뿐이라고 발을 뺐다.

대선 이벤트는 역시 3후보의 TV초청 토론회였다. 이인제 후보의 뒤를 이어 카메라 앞에 선 김대중 후보는 대의명분을 정권의 수평적 교체를 통한 민주주의로 설파하고 자신있는 자세로 패널리스트의 질문을 받아 넘겼다. 그러나 칠십 노인의 피로도가 역력했으며 경제현안 등에 대한 해법에서는 상식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특히 건강 문제와 관련, 종합평가를 서울대학병원 같은 객관적인 제 3기관에서 받을 용의가 없느냐는 질문에 거부감을 표시, 항간에 유포되고 있는 그의 건강유지 문제에 의혹감을 불러 일으켰다.

조순총재와 합당 합의서에 서명, 한나라당으로 깃발을 바꾼 다음날 TV초청석에 앉은 이회창후보는 자세를 크게 바꾸어 상당히 자신있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제까지는 없었던 여유와 유머 감각까지 발동한 그의 이날 면모를 시청한 많은 사람들은 지지성향을 바꾸었다. 당내 반대 세력들은 탈당을 취소했고 4분5열 되었던 세력들도 하나로 통합되는 흐름이었다. 신문 방송의 합동 초청회가 끝난 다음 그에 대한 지지율은 급상승, 드디어 2위 이인제후보를 추월하는 역전극이 연출되었다.

거의 전 매체가 실시한 11월17일자 각 후보별 지지율 발표에서 이회창 후보는 드디어 2위권으로 진입했다. 조선일보. MBC, 중앙일보, 한국일보, 한겨레신문의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이회창후보는 30.4%를 차지해 24.4%의 이인제후보(23.2-28.3%)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경향신문, 세계일보, SBS의조사에서는 이인제후보가 아직 2위를 지킨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회창후보의 대약진 현상으로 박빙의 우세를 지켰을 뿐이다. 여전히 김대중후보는 1위를 고수했지만 DJT연합에 따른 시너지 효과는 이 조사에서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왔고 오히려 지지율 곡선은 하향세였다.

후보등록일인 11월26일까지만 여론조사 공표가 가능했기 때문에 각 후보진영은 지지율 변화에 따른 분석과 대응책을 심각하게 검토하기 시작했고 특히 이회창.이인제후보 진영은 2위 자리라는 선점고지를 장악하기 위한 '7일전쟁'에 돌입했다. 여론 매체마다 다르게 나온 2위후보로 각 당은 여론조사에 대해 정치적 안경을 쓰고 보는 경향이 나타났고 각 매체마다 선호하는 지지자를 위해 여론을 조작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2위 자리를 놓고 전개되는 일대 각축전이 대선의 대중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이상한 변화가 있었지만 사회적 관심사는 11월19일에 있을 대학 수능시험에 쏠려 있었다. 으레 그랬듯 입시를 앞두고 기온은 급강하하기 시작했으며 기상대는 영하의 날씨를 예고했다.

대선 판도에 변화가 벌어진 이날 금융시장에서는 대파란이 일어났다. 환율이 다시 급등하고 주가가 폭락했다. 11월17일 외환시장은 기준환율 9백86원50전보다 50전 낮은 9백86원에서 출발했다. 별 이상이 없던 시중 환율은 오후 들어 외환당국이 갑자기 개입을 포기하자 순식간에 상승 제한폭인 1천8원60전으로 치솟았고 곧 거래가 중단되었다. 시중은행의 대고객 매도율은 1천20원7전으로 고시되었다. 주식시장도 7일만에 5백선이 붕괴되어 하루동안 종합주가지수는 22.39포인트가 폭락, 496.98로 내려 앉았다. 시중금리도 폭등, 자금난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기대했던 금융개혁입법안이 국회에서 무산되자 전 금융장세가 요동을 친 것이다.

금융개혁입법안은 당초 정당간의 정치적 옵션에 따라 여당이 밀고 나가면 야당은 반대표결에 참가하는 방식으로 '묵인'한다는 각본이었으나 한국은행 노조등 반대 세력의 행동이 거칠어지자 여야 할 것 없이 대선을 의식해 발을 빼 무산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신한국당측은 여당만으로 강행할 경우 노동법의 재판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야당이 표결에 불참하면 여당도 애써 표결을 강행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정부쪽에서 외환시장 개입을 포기한 것은 이같은 흐름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사한 행동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어떻든 이 금융쇼크로 정치세력들의 당리당략이 드러났다. 그러나 여론조차도 관계 세력들이 머리를 맞대고 협의하여 나라의 경제를 구해야 할 것 아니냐는 상투적인 논조들만 폈다. 바로 직전까지도 언론은 금융개혁입법의 국회 회기내 통과를 촉구하고 개혁안을 지지 했었다. 일부에서는 IMF(국제통화기금)에 4백억 내지 6백억달러의 긴급 결제외화 지원을 요청했다는 설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비지니스 위크지는 한국경제 특집을 커버 스토리로 게재하면서 충격적인 표지 도안을 내놓았다. 태극기의 핵심인 태극 마크가 바닥에 떨어져 나가고 1만원권 지폐의 뒷면 중앙에 있는 경회루가 한쪽으로 기울어 물에 잠기고 있는 그림을 모자이크한 것이었다.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경제를 상징화한 도안이었다. 이미 전세계 금융첩보들은 한국의 외환대란을 알고 있었다.

11월14일 YS는 경제막료들과 긴급 협의를 갖고 'IMF행'을 결정했으며 이 결정에 따라 캉드쉬 IMF총재가 비밀리에 청와대를 방문 이 문제를 협의하고 돌아갔다. 이 협의에서 한은총재 이경식은 3백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이 첩보를 제일 먼저 서울에서 입수한 곳은 김&장등 로펌의 외국 변호사들이었다. 위기는 이미 실체화된 단계였다.

같은날 3당 후보들은 조선일보가 주최한 합동 토론회에 참석, 한국경제는 계속 성장하여 선진국이 되고 5대 경제강국에 들어 갈 것이라는 장미빛 미래를 역설했다. 그러면서 금융개혁입법이나 예산안은 당리당략에 따라 내몰라라하고 발을 뺐는가 하면 불요불급한 것들을 예산안에 다투어 쑤셔넣는 데 합의했다. 구조개편의 상징처럼 되어있던 금융개혁 입법안은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지도 못한 채 유보되었다.

신문에서 정치기사가 싹 사라졌다. 경제는 위기가 아니라 '함몰'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되었다. 어제까지 빛나던 경제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문 사설들은 일제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강경식 부총리의 퇴진을 들고 나왔다. 시중은행은 이미 외환부도를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재자금 부족으로 한은으로부터 긴급차입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본으로부터 3백억 달러의 중앙은행 차입이 추진되고 있다는 설과 IMF로부터 5백억 내지 최대 1천억달러의 구제금융을 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미 '멕시코 현상'이 재현되고 있다는 비관적 전망이었다.

11월18일 광화문 종합청사. 이날의 국무회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오인환 공보처장관은 현재의 경제위기는 '국난'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은 "한국이 북한보다 먼저 붕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한 신문은 이 보도를 인용한 제목을 컷으로 뽑았다가 '경제, 무정부 상태'로 바꾸었다. 북한은 식량으로 무너지고 남한은 달러로 무너지고 있다는 남북공멸론이 진보세력들 가운데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음모론의 과장된 시각들은 미국이 군사적으로는 이라크의 후세인을 겨냥하고 경제적으로는 한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 놓기도 했다. 신질서는 희생양을 필요로한다는 권력의 문법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엔 무기 감시단을 내쫓은 후세인의 나라를 향해 미국 항공모함이 집결되고 있는 때와 한국의 외환위기가 시기적으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이들은 주목해야 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패권주의 그림자가 다시 날개를 피고 있는 흐름이라는 것이다.

YS는 11월19일 강경식부총리, 김인호 경제수석을 경질, 후임에 임창열 통상산업부장관, 김영섭 관세청장을 각각 임명했다. 임-김 경제 팀은 취임과 동시에 긴급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했다.

"하루중 환율변동 폭을 현행 기준환율의 2.25%에서 10%로 대폭 확대한다. 2000년 12월까지 3년간 한시적으로 은행 종합금융 보험사등 금융기관의 모든 예금에 대해 원금 및 이자 전액을 보장해 주는 '예금 전액 보장제'를 실시한다. 부실채권 정리기금을 10조원으로 확대한다. 경영상태가 나쁜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M&A(인수합병) 등을 권고하고 이행하지 않으면 강제로 정리한다."

임창열 신임 부총리는 IMF 구제금융은 이번 대책에서 배제되었다고 밝히고 아직 우리의 '경제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에 고려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외화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정부는 국제금융시장에서 단기국채를 발행하거나 외국 중앙은행간의 협조융자를 끌어내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직접 나서는 이상 국제금융계가 우리 금융기관의 단기 여신을 일방적으로 회수할 이유가 없을 것으로 본다. 태국의 경우 IMF등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 1백67억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초긴축 재정편성등 정책조정을 요구당하고 있다.

IMF구제금융은 돈 이외에 정책지원이 필요한 나라가 받는 것이다. 우리는 재정이 건전하고 국제수지가 대폭 개선되는 등 정책을 잘 하고 있다. 돈만 필요하다. 국채를 발행하거나 협조융자를 받으면 된다. 통화가 고평가 되었을 때는 평가절하를 기대하는 투기성 자금 이동이 많아진다. 그러나 환율이 안정되면 핫머니는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한국은 세계 11위권의 경제다. 한국경제가 탈이 나면 미국 일본도 문제가 생긴다. 그들도 한국경제 위기 수습에 협조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다."

환율변동폭을 확대하고 금융부실에 대한 전방위적인 정부대책을 발표했음에도 이날 환율은 1달러당 상한선인 1천1백39원을 기록하는 폭등세를 멈추지 않았다. IMF의 구제금융 문제를 놓고 정부와 경제계는 의견대립을 보였다. 현재가 비상사태라는 점을 들어 신용공황이 더 깊어지기 전에 체면이 깎이더라도 긴급구제금융을 해야한다는 경제계의 주장에 대해 정부는 일단 '예속 경제화'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임창열 신임부총리도 강경식 전임자의 '기초 튼튼론'을 고수하는 입장이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3분기중 GDP(국내총생산) 성장율은 6.3%로 비교적 견실했으며 수출증가유은 29%로 83년 4분기(32.5%) 이후 최고수준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런 총체지표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은 전체 경제의 위기감을 확산시켰다. 그리고 그 위기감은 정책당국이나 재계 금융기관 그리고 언론뿐 아니라 일반 시민의식에 까지 먹구름을 드리우는 사회심리적 공황증세까지 몰아왔다. 그 연결선상에서 YS는 통치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땅에 떨어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경제위기에 신문 1면을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대선쟁투는 허주 김윤환 한나라당 대선위원장의 '우리가 남이가'발언으로 치열한 공방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국의 USA 투데이지는 "정치인들이 국가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전념하기보다 여론조사에서 앞서려는 경쟁을 하는 데 더 열중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85만명의 수험생들은 환율로 빚어진 경제의 '국난' 가운데서 대학입학을 위한 수능시험을 마쳤다. 여기서도 '고득점 현상'이 일어나 학부모들은 으레 해마다 그러했지만 '교난'을 겪어야 했다. 입시전문기관들은 문제의 난이도를 분석한 결과 평균점수가 20~30점 가량 높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는가 하면 고득점자 무리에서는 지난해보다 50~60점이 높아져 일류대학 지망 경쟁율은 '기초'가 좋은 학생도 실패할 만큼 치열할 것으로 보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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