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YS의 이인제 대통령만들기 논란**
예상되어 온 바는 있지만 돌연 김현철이 법원의 보석결정으로 서울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11월3일이었다. 바로 같은 날 외환보유고는 6억5천만 달러가 하루만에 격감하는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YS에 대한 공적 보고 채널은 가동하지 않았다. '각하에게 심려를 끼쳐 드리지 않겠다'는 배려였다.
이날은 DJP가 후보 단일화와 내각제 개헌 합의문에 서명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YS는 청와대에서 연쇄 수뇌회담의 마지막 일정으로 JP와 독대를 하는 날이었다. 그 다음날은 이인제의 국민신당이 창당되고 이지사가 대통령 후보로 정식 추대되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정치적 반대세력에게는 기분이 썩 좋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신한국당의 이회창 진영엔 공식적으로 즐거운 이벤트가 없었다. 그러나 DJP연합에 대한 반감이 결집될 수 있다는 점에서 '모처럼 한마음'이 되는 날이었다.
각 정당들은 김현철의 석방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중립적 반응을 나타냈다. 다만 민주당과 국민승리21에서 정치적 흥정의 의혹을 제기했다. 민주당의 박연찬 부대변인은 "항간에는 김영삼-김대중 회담의 결과로 비자금 수사유보와 현철씨의 보석이 밀실 흥정됐다는 풍문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국민승리21은 "국민들은 아직 현철씨를 용서하지 안았다"며 "석방과 관련된 뒷거래를 염려한다"고 경고했다.
재판부(서울고법 형사 10부 권광중 부장판사)는 이제까지 정치인의 떡값에 대해 세금을 부과한 적도 없고 조세포탈죄로 처벌한 적이 없어 1심에서 김현철에게 적용된 조세포탈죄를 유죄로 판정한 데 대해 이의가 있다는 법리를 보석의 이유로 내세웠다.
주요 신문의 사회면은 김현철의 석방을 계기로 비리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풀려났다는 사실을 기획 특집으로 다루고 법의 형평성과 사법정의의 훼손문제를 제기했다. 사실상 한보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정치인들은 모두 집행유예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감옥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홍인길도 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드러났다. 권노갑도 풀려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모두 건강상의 이유를 표찰로 달고 나왔다.
신문의 사회면이 공격적 비판의 흐름을 만든 반면, 사설란들은 어물어물 넘어갔다. 다 법이 알아서 한 일이니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반성하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란 상투적 비판론으로 일관되었다. 어떤 논조는 이런 석방제도가 보편화되었으면 한다는 등 전혀 본질과 다른 쪽을 두드림으로서 '보석 사건'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김현철 석방을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식으로 넘겼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신 구속이라는 법률집행을 문제의 핵심으로 끌어 올렸어야 마땅했다.
김현철의 보석은 YS의 가족과 청와대에는 숙제 하나를 해결한 폭이 되었지만 새로운 정치공세가 일어났다. 이인제의 국민신당을 YS와 청와대 그리고 그의 영향하에 있는 정치세력들이 암묵리에 지원하고 있다는 DJ측과 이회창 캠프의 연합공격이었다.
이 문제를 대선 쟁점으로 전면에 끌어낸 것은 중앙일보였다. 김현철 보석과 DJP연합 서명식이 뉴스의 주 메뉴가 된 11월4일 중앙일보는 이 두 이벤트를 뒤로 밀어내고 <청와대, 국민신당 창당 지원>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1면 톱으로 대서특필했다. 보도내용은 이러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신한국당 관계자들을 빼내오기에 나서는 등 이회창후보 고사 및 신한국당 와해 작업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통령 본인과 청와대 참모들은 김윤환 선대위원장등 이회창후보를 지지하는 주류측 인사들에게 직.간접으로 이회창후보 지지 철회와 이 전 지사 지원을 설득 종용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회창후보 고립계획에 참여한 청와대 관계자는 김용태 비서실장, 조홍래 정무비서, 김광일 정치특보, 김기수 수행실장, 이원종 전 정무수석 등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본인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김윤환 위원장은 3일 "지난 1일 밤 만난 김광일 특보가 이후보로는 대선승리가 어렵게 됐다며 이후보에게서 손을 떼라고 권유했다"고 밝혔다. 그는 김용태 실장, 조홍래수석 등도 같은 권유를 했으나 당이 경선으로 선출한 이회창후보를 버리고 경선에 불복한 이 전 지사를 밀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고 말했다. 김용태실장, 김광일 특보, 조홍래수석은 오래 전에 김고문을 만난 사실을 인정했으나 이같은 대화 내용은 부인했다..."
새로운 정치 쟁점의 발원지로 지목받게 된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쪽은 대구지역 필승 결의대회후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이 사실을 확인했다. 신한국당의 주류측은 한걸음 더나아가 YS가 자신과 가까운 의원들에게 직접 전화로 이회창후보를 지지하지 말도록 종용했다고 폭로했다.
중앙일보는 신당에 대한 청와대 개입설에 이어 신당 창당 자금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는 신한국당 주류와 국민회의측의 주장을 1면톱으로 연이어 보도했다. 국민신당의 창당 자금을 신한국당은 70억원, 국민회의는 1백억원 안팎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여기에 창당 당일 동원된 1만5천명의 참석자 비용 등에 4~5억원이 들어 갔을 것으로 보았다. 거기다가 전국 31개 지구당을 급조하고 후원금을 보낼려면 상당한 자금이 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인제 후보의 97년 재산등록액이 9억4천만원에 불과했던 것으로 비추어 이 정치자금의 파이프 라인에 의혹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YS의 직계인 이원종 전 정무수석이 이 자금염출을 위해 기업들을 찾아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특히 김현철의 보석과 때를 같이 하여 그의 정치 고문관이었던 전병민이 구체적으로 '이인제 전략'에 가담하고 있다는 설까지 튀어나왔다. 이같은 여야의 공동 공세에 대해 이인제후보와 그의 신당은 이인제 돌풍을 두려워한 나머지 두 세력이 오월동주하여 있지도 않은 사실을 허위 날조하고 있다고 반격했다.
그 근거로 후보 지지율 변화를 들었다. 11월1일과 2일자로 조사한 문화일보와 국민일보 조사에서 이인제후보는 각각 26.8%와 25.3%의 지지율이었으나 지방 5개사와 YTN이 11월4일자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각 각 35.6%와 32.1%로 급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1위를 유지하고있는 김대중후보와의 지지율 차가 박빙지세라는 걸 의미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신당 지원설'은 계속 확대되었다. 신한국당과 국민회의는 각기 다른 이해득실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신한국당은 92년 대선 때부터 이른바 '광화문 팀' '여론조사 팀' '민주사회 연구소 팀' 등에서 김현철을 도왔던 30~40대의 김현철 인맥 10여명이 공식 직함을 갖거나 비선조직으로 국민신당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 신한국당 사회개발연구소 부소장 박종선. 동 부실장 김이곤. 전 청와대 인사 재무 비서관 강상일.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김현호. 전 청와대 비서실 정사동. 전 청와대 정무수석실 근무 김경철. 전 청와대 무적 근무자 정대희. 청와대 행정관 김봉헌. 전 미디어 리서치 전무 안부근 등이 그들이라고 했다.
구범회 신한국당 부대변인은 국민신당에 대해 "92년 대선자금 중 남은 돈 2백억원이 이인제 반란당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해명하라"고 공개적인 공세를 가했다. 2백억원의 자금유입설과 관련해서는 손명순 여사가 이인제 후보의 부인인 김은숙씨에게 전달했다는 말이 돌아 YS를 격노케 했다.
국민회의측도 이같은 공세에 가세했다. 정동영 대변인은 "10월25일 김대통령이 조순 민주당 총재와의 회담에서 조총재에게 이인제 후보의 신당에 합류할 것을 권유하면서 '지금까지 든 비용에 대해서는 보상하겠으며 이인제후보가 집권하면 사후보장을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얘기가 있다"고 주장했다.
YS와 청와대에 대한 파상공세가 세찬 기류를 몰아오자 청와대는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신우재 청와대 대변인은 청와대 기자실에서 반격성명을 발표했다.
"김대통령은 그동안 누차 밝힌 것처럼 어떤 정당에도 치우침 없이 이번 대선을 엄정하고 공정하게 치른다는 입장이며 국민회의가 대통령의 가족까지 거명, 허위 사실을 언론에 발표한 것은 개탄스럽고 용납할 수 없는 일로 즉각적인 조치가 없으면 공당의 이름으로 자행된 악의에 찬 명예훼손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 성명은 손명순 여사까지 거명된 후에 청와대 막료들이 대응책으로 만든 것으로 YS의 재가를 받은 것이었다.
이회창 캠프의 대 이인제 공세는 청와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계속 확전기류를 만들어 갔다. 여러번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배를 맞본 이회창 진영은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겠다는 듯 했다. 이사철 신한국당 대변인은 두 가지 의혹을 공개했다.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국민신당 정치자금을 모금하러 다닌 물증으로 모 재벌을 들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모 재벌에 이원종씨가 찾아와 이인제씨를 돕기 위한 자금요청을 해 온 것을 그 재벌에 고위 임원이 직접 제보를 해 왔다"고 밝혔다. 누가, 언제, 어디서 등 6하 원칙을 그 임원이 필요하다면 밝히겠다고 했으므로 이 물증은 꼼짝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는 청와대 류재호 총무수석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면서 그의 이인제 '선거운동'을 규탄했다. 류수석은 민주계 출신 청와대 근무자들을 삼삼오오 점심 이나 저녁 때 청와대 근처 음식점으로 초청, 이인제 지원 방안을 구하고 협의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이회창 총재가 김영삼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했던 10월22일을 전후하여 이런 움직임에 열을 올렸는데 구체적인 사안까지 오고갔다는 얘기였다. 그가 이런 의혹에 말려들만한 이유는 있었다. 그는 92년 대선 때 YS의 사조직인 '나라사랑실천본부'의 총괄국장을 지낸 뒤 국민체육진흥공단의 감사, 청와대 민정비서관, 조달청장을 거쳐 청와대 총무수석으로 기용되는 등 YS에 의해 파격적인 발탁을 받은 인물이었다.
공격을 받은 이원종은 재벌 접촉 사실을 부인하고 신한국당에 탈당계를 제출했다. 류수석은 청와대 비서실을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나가는 한 행정관의 송별 자리를 마련한 것이 이인제 지원 모임으로 둔갑했다고 해명했다.
이인제 캠프와 국민신당 측도 반격을 가했다. 이만섭 당 총재는 김현철 인맥은 문 앞에 얼씬도 못하도록 했으며 조사를 거쳐 '현철 인맥'으로 판정나는 사람은 모두 출당시키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그리고 비난 공세에 앞장 섰던 적진의 선봉장 가운데 김민석 국민회의 부대변인과 구범회 신한국당 부대변인을 명예훼손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소했다. 청와대와 국민신당은 같은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연합전선을 폈지만 YS의 지원이 정치적 부담이 된다고 판단, 이인제 캠프는 김운환 의원을 내세워 알리바이를 증명케 했다.
김의원은 자신이 이인제를 지지하고 나섰을 때 청와대와 직할 수사기관은 자신에 대한 뒷조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92년 1월부터 97년 9월4일까지 자신이 보유해 온 모든 예금계좌 명세가 조사됐는데 그 시기는 이인제가 탈당한 9월13일 직전이었다고 폭로했다. 여기에는 은행감독원 6국이 동원되었으며 곧 이어 자신의 후원회 회원 2명이 조사받았다고 했다. 이중 한 명은 여관에 5시간 동안 감금된 상태에서 추궁을 당했는데 4명의 수사관 중 한 명은 그 회원에게 한 건만 불어달라고 회유까지 했다고 밝혔다. 이인제 후보도 같은 시기에 본인과 친인척 계좌에 대한 조사를 받았으며 얼마후 청와대에서 YS와 만날 기회가 있어 항의했다고 말했다. 김의원은 이런 상황인데도 청와대가 지원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상호공방 속에서 사실과 진실은 매몰되고 각 세력간의 정략처럼 되어버리는 흐름속에 국민회의 추미애 의원은 새로운 '제보'를 하나 터뜨렸다. 이 여성의원은 국회 예산 결산위원회에서 이인제 신당의 창당 자금출처는 부산의 건설업자라고 했다. 부산시 백양산.아미산 개발사업의 원청업자인 동방주택(대표 이영복)이 아파트 건설사업을 제3자에게 내부 양도하는 과정에서 조성된 수백억원의 양도 대금중 일부를 빼내 이인제후보의 경선자금과 신당 창당 자금으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이 사장은 도시계획 정비안이 만들어지기 전인 93년부터 백양산. 아미산 일대수십만평의 대지를 집중 매수했으며 신한국당 특정 계파의 일부 정치인들이 이사장과 결탁, 용도변경과 아파트 건설 사전 결정을 받아냈다고 밝히고 그 배후에는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신당에 가 있는 부산출신 모의원이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이 도화선이 되어 모의원으로 지목된 김운환의원의 비서는 추미애 의원의 보좌관실을 찾아가 뺨을 때린는 격돌사건까지 빚었다.
돈에 관한 한 어떤 정파도 의혹을 하나둘씩 숨기고 있지만 상대의 약점을 노출시킴으로서 자신을 숨기는 이 기묘한 싸움이 사실은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92년 YS의 대선자금, DJ의 비자금, 이회창의 경선자금은 결국 이인제의 정치자금으로 연결되었지만 현재만 부각되고 과거는 사라지고 있었다.
이 즈음 보기에 따라서는 진풍경이랄 수 있는 사진 한 장이 신한국당에 의해 각 언론에 플레이되었다. 신한국당의 당직자들이 봉투 하나씩을 모금함에 넣는 사진이었다. 당 재정이 바닥이 나 거대 여당의 금고가 비게 되자 모금운동을 벌인 것이다. 명칭은 '정치혁신 실천을 위한 특별 당비 납부운동 출범식'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은 '제살 뜯기 운동'이었다. 당내에서는 이회창 후보의 자금동원 능력이 치명적 약점이 되고 있다는 비판론이 일어나는가 하면 결국 그것이 언론 작전에서도 중대한 실패를 가져 온 요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돈 안뿌리고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문법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이 사진은 이회창 캠프의 '진실'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권자들은 쇼를 하고 있다고 믿었다. 유권자의 관념에서도 정치와 돈은 한 묶음 이라는 문법이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이회창의 딜레마는 물론 아들의 병역문제라는 덫으로 인한 인기 하락에서 비롯되었지만 깨끗한 정치를 표방한 그의 '성전'선언이 정치쟁점화되지 못한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상당한 책임은 그것을 쟁점화시키지 못한 언론에 있었다. 여론을 이끈다는 유수한 신문조차 그의 '성전'선언이 공표되었을 때 '그 정도의 돈으로 선거를 치룰 수 있을 라구...'식으로 비아냥 조였다. 기회있을 때마다 '깨끗한 정치 투명한 자금' 하고 외쳐대다가 그 길로 가겠다는 대통령 후보가 나오자 아마츄어같은 소리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또다시 수상한 돈 구린돈 이야기를 비판의 표적으로 삼고 있었으며 정치개혁 입법작업에서 선거자금 허용한도를 현실화란 이름을 빌어 엄청나게 부풀리는 데 여야는 합의했다.
금성탕지 호호탕탕하게 청와대에 입성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 DJT연합세력에게도 아킬레스 건이 자라고 있었다. 우선 김대중-김종필-박태준의 3두 마차가 70대 이상의 노인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었다. 공식적으로 표면 부상은 하지 않았지만 '777의 치매그룹'이라는 야유가 반대세력을 진원지로 하여 시중에 유포되기 시작했고 집권 이후 복합세력이 그렇게 원만하게 권력을 나누어 국정을 효율적으로 집행할 것이냐에 짙은 의혹이 깔려가기 시작했다.
DJ는 심각한 난청이며 그래서 TV토론에서는 확성기를 책상 밑에 숨겨 놓고 진행되었다든가 걸음이 비틀거려 토론장 입.퇴장 장면은 찍히지 않도록 방송국 카메라 맨들에게 미리 손을 썼다든가 하는 소리가 풍문이 아니라 목격자의 증언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다.
특히 그가 동아일보 사이버 토론회에서 내각제가 되더라도 5년 대통령 임기를 마치게 되기를 희망한다는 발언을 하자 새로운 파문이 일어났다. 언론은 파문의 핵심을 그의 약속 불이행, 자민련의 의심 같은 쪽에서 찾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현행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 5년 임기를 보장하지 못할 수도 있는 대통령을 유권자들로 하여금 뽑으라고 하는 대통령 선거가 과연 유효한가하는 헌법상의 문제였다.
워낙 정치 쪽이 널을 뛰고 있는데 질려서인지 경제문제는 11월 들어 표면상 약간 진정세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었다. 물론 환율은 1천원대를 향해 '일보후퇴 일보전진 식' 곡선을 긋고 주가는 5백선을 회복한 후 지그재그식 진행 곡선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부도율은 '장영자 사건' 이후 최고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산 수출은 크게 회복되었고 기아등 대기업문제가 조금씩 줄기를 잡는 모습을 드러냈다.
김선홍회장이 물러난 자리에 전 노동부 장관 진념이 들어서 기아사태는 동요를 보였던 그룹 내부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진념회장은 기아가 정상경영 수준을 회복할 때까지 무보수로 봉사하겠다고 밝히고 제 3자에게 매각을 않는다는 조건으로 회장직을 맡았다고 말해 기아직원들을 고무시켰다. 7개 계열사가 부도를 냈던 해태그룹도 기사회생의 기미가 보였다. 29개 종금사가 1천5백억원을 협조융자하기로 합의함으로서 화의 및 법정관리 신청을 철회했다. 종금사의 칼질이 계속되면 궁극적으로 그 칼날이 종금사 자체의 부도와 도산이라는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분석에 따른 조치였다.
사실상 종금사들은 그같은 위기 속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23개 종금사의 부실채권은 총 1조8천4백43억원. 이 가운데 대한종금같은 곳은 3천3백72억원을 날려버리는 등 업계 자체가 부실화되어, 영업정지 합병 등의 압력을 정부로부터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해태의 경우는 구조조정의 방안이 대체로 견실하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었다. 그러나 수백억원을 지원하자 말자 곧바로 부도가 난 뉴코아 그룹의 예나 도산으로 몰려가던 해태가 돌연 금융지원을 받게된 배경에 대해서는 구구한 억측들이 떠돌았다. 무엇인가 정치과도기에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들이 움직이고 있지 않느냐하는 탐색이었다. 나중 그런 의혹은 진실로 밝혀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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