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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의 내각제를 전격수용한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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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의 내각제를 전격수용한 DJ

<손광식의 '1997 비망록'> (43) 소가 대를 먹기

***43. 소가 대를 먹기**

10월27일 낮 서울 여의도 63빌딩의 한 음식점에서 신한국당의 이회창총재와 민주당의 조순총재는 오찬회동을 가졌다. 상대적 열세에 몰려있는 두 대통령후보는 '3김청산' '반 DJP연대'를 표면에 걸고 탈출구를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총재측의 맹형규의원은 회동이 끝난 후 발표문을 읽었다.

"이회창 총재와 조순 총재는 지역주의와 정경유착 등 부패정치의 근원인 '3김정치'를 마감하고 사심없이 뜻을 같이하는 모든 세력과 함께 새로운 정치의 틀을 이루자는 데 합의했다."

신한국당의 이회창 캠프는 이것을 이-조 연합함대의 새로운 출범으로 만들어 11월의 대공세라는 새로운 판세를 만들어 내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조순 캠프는 "그저 원론적인 얘기를 정리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뜻은 같되 단일후보를 만드느냐의 문제에서는 각기 다른 '산술'을 하고 있었다. 특히 조총재측은 신한국당의 비주류가 추진하려는 후보바꿔치기에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어 이 반격구도에 적극적일 수가 없었다.

대선 흐름을 뒤바꿀 수도 있는 '낡은 정치' 대 '새 정치'의 구도가 이렇게 각광을 받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언론이 이 새로운 대선구도에 힘을 실어주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었다. 누가 누구를 만나고 정치세력이 어떻게 갈라지고 누가 어떤 돌출 발언을 한 것은 열심히 좇으면서도 '부패정치 청산'선언을 이슈화하려 하지 않았다.

한편 이날 밤 DJ는 JP의 청구동 자택을 방문했다. 이날 회동은 DJP연합에 따른 후보 단일화와 내각제 개헌에 대한 구체안을 합의하고 발표문안 및 일정에 대한 최종 합의로 'DJP 시대'라는 대세를 굳히기 위한 이벤트였다. 극비회동이라 했지만 이미 TV 밤 뉴스를 통해 이 사실이 전파되었다. DJP연대에 순기능적 역할을 할 이 회동 뉴스보도에 야당 연합이 제동을 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은 10월31일 후보단일화 및 내각제 협상 소위와 대단추(대통령후보단일화 추진위)-대단협 전체회의를 열고 합의문을 추인하는 한편, 11월3일 양당 합동 국회의원-당무위원 연석회의에서 서명식을 갖기로 결정했다.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안 개요도 마련, 국민회의측에 전달했다. 이 시안은 국회는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로 구성하고 상원은 하원의원 정족수의 4분의1, 임기는 상원 5년 하원 4년으로 되어 있었다. 선출방법은 현행 소선구제로 하되 정당명부식 투표를 통한 비례대표제를 가미하기로 했다.

국가운영방향 결정권과 긴급명령 계엄 선포권등 국가긴급권은 수상이 장악하고, 임기 5년의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 조약체결 외교사절 신임권과 선전포고권을 갖고 수상의 제청 및 국회의 동의를 거쳐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을 임명하는 형식적 권한을 갖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또 하원은 정국안정을 위해 수상이 취임한 뒤 1년이 지나야 불신임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고 후임 수상이 선출돼야 내각 불신임안이 처리되는 '건설적 불신임제'를 채택하도록 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구들만 보면 DJ의 집권이라기보다 JP의 권력 보장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국민회의의 정대철 부총재는 얼핏 보면 DJ와 JP의 권력 갈라먹기식으로 되어 있는 이 안이 보도된 신문을 내던지며 "이런 합의를 해주는 정당은 당도 아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런 불만은 DJP연합의 대세 속에 매몰되었다. 한 때 여당의 영구집권 음모의 상징물 같았던, 그래서 야당에 의해 극렬한 반대를 받았던 내각책임제가 이제는 야당의 전유물이 되고 여당은 이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의 전도현상을 유권자들은 목격하게 되었다.

DJP가 여당의 분열을 틈타 정치의 중심무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들어설 기세가 되자 여당의 긴장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이회창후보를 중심으로 한 당의 대동단합은 이미 물 거너간 상태에서 비주류측은 '후보사퇴'의 연판장을 돌리기 시작했다. 비주류측은 이미 청와대도 '이회창 불가론'을 현실로 인정하고 개별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가에 유포했다. 주류측도 YS는 내심 이인제지사를 밀고 있었다고 비난하고 이제 루비콘 강을 건넜으니 낡은 정치의 타파를 위해서는 새로운 개혁세력을 집결하여 신당 창당까지도 불사한다는 소리를 공공연히 하고 나섰다.

이런 와중에서 10월27일 5.18민중항쟁 구속자동지회의 이무헌회장은 광주 YMC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 대화합을 위한 평화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5월단체로서는 처음으로 "광주항쟁의 피해자인 우리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사면과 관계없이 가해자인 두 전직 대통령을 조건 없이 용서한다"고 했다. 이보다 앞서 감옥에 있는 YS의 아들 김현철의 변호사는 그의 병보석을 신청했다.

주가는 떨어지고 환율은 오르는 '주저환고' 현상은 계속되었다. 10월27일의 종합주가지수는 540.47로 전날에 비해 18포인트나 빠져 90년 지수개편 이후 최저치로 추락했고 환율은 9백42원까지 치솟아 '환율 1000대'를 예상하는 분석까지 나왔다. 환차손은 기업의 심각한 적자요인으로 실체화하기 시작했다. 한국상장사협의회는 원화환율이 9백30원이 될 경우, 5백22개 상장사의 환차손은 총 2조8천20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급기야 김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확대 경제장관 회의를 열고 외환시장 적극 개입을 결정하는 한편 기아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업체들이 갖고 있는 기아의 부도어음 3천억원을 대출로 전환키로 하는 등 긴급대처방안을 결정했다.

법정관리 결정 이후에도 기아사태는 혼미, 별다른 진전이 없자 검찰은 김선홍회장에 대한 내사에 들어갔다. 예의 강압방식이 동원된 것이다. 김회장이 정부와 채권단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물러나지 않는 것은 개인적 비리가 얽혀있었기 때문이라고 검찰은 공공연히 그에 대한 의혹을 유포하고 검찰조사 방침을 흘렸다. 경제의 비상사태는 '시장원칙'을 철수시키고 관의 개입을 정당화 시키는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시장원칙'이라는 흐름을 타자는 전략적 차원인지 또다른 시나리오에 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현대는 고로방식의 제철소 건설을 다시 들고 나왔다. 경남 하동의 갈사만 해안 2백50만평을 매립한 뒤 총 6백만톤의 제철소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정몽구 현대회장은 김혁규 경남지사로부터 도민 2백여만명이 서명한 '현대제철소 유치를 위한 범도민 서명부'를 전달받고 경남도측과 공장건설을 위한 협조합의서에 서명했다.

YS집권 이후 정주영에 대한 사업활동 봉쇄로 인해 얘기가 나올 때마다 묵살되었던 현대의 제철소가 YS의 정치적 낙조와 더불어 '부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스토리가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보의 정태수는 한보철강의 파산극 뒤에는 현대가 있는 듯한 발언을 해 온 바 있었다. 삼성은 자동차로 현대를 치고 나오는데, 현대는 철강에서라도 활로를 뚫어야 하지 않는냐는 현실 문제도 얽혀있긴 했다. 그리고 철강산업은 한보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전 금융기관의 거대한 자금 파이프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난 92년 YS의 정적으로 싸운 후 5년동안 '금족령'에 묶여 무장해제를 당했던 정주영의 '부활'이 걸려 있다는 측면에서도 이 프로젝트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공업발전심의위는 10개월 전 현대의 제2제철 건설에 '불가' 판정을 내린바 있는데 통산부는 그 결정을 바꿀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현대의 계획을 비토했다. 물론 현대도 이에 대해 정부가 허가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중앙정부와 관련된 사항은 모두 경남도가 지원 협력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어떻든 정국의 대혼란기에 공장부지부터 불쑥 내민 방법은 기습적인 데가 있었다.

'검은 화요일' 10월28일. 금융대란이 일어났다. 서울 증권시장에서 종합주가지수는 500선이 붕괴되고 외환시장에서 달러환율은 9백50원을 돌파했다. 홍콩에서 촉발된 주가폭락 현상이 미국과 유럽, 중남미, 동남아 등 전세계 증권시장을 강타한 것이다. 이날 서울 증시는 뉴욕증시의 대폭락세에 영향을 받아 개장초부터 매물이 쏟아져 나와 지수 5백선이 5년2개월만에 무너졌다. 폐장지수는 전날보다 35.19포인트 떨어진 495.28. 외환시장에서는 원화가치가 급속하게 떨어져 달러환율은 전날보다 무려 21원이 오른 9백57원까지 초고속으로 상승했다. 뉴욕증권시장은 두차례에 걸쳐 거래중단이 일어나는 등 비상사태로 들어갔다.

주식으로부터 빠져나간 돈이 달러로 몰리는 현상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일제히 일어난 공통된 현상이었다. 어떤 전문가도 이런 상황의 전개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예측을 내리지 못했다. 경기가 회복되고 경제성장이 기대 이상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경우는 조정국면이라는 낙관적 견해들이 있었으나 홍콩 한국등 동남아에 대한 관측들은 지극히 불투명했다. 특히 금융대란의 발원지인 홍콩은 인플레의 진행 등으로 환율이 과대 평가되어 왔다는 분석들이 지배되고 있어 붕괴현상이 어느 선, 어느 시기에 끝날 것인지 예측 불허였다.

연계선상에서 금융대란을 맞고 있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MIT대학의 루디거 돈부시 교수는 박영철 금융연구원장과의 긴급전화에서 "한국도 환율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가 증시나 외환시장에 개입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외국인 투자자 신뢰성을 회복해 국내 투자자 신뢰성을 동시에 회복하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가 이미 공개한 개방 약속을 철저히 지키고 금융과 실물경제의 구조조정을 확실히 한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금융대란에는 미국도 말려들어가 있었지만 어찌 보면 '워싱턴의 반격'이 깔려있는 느낌이었다. 홍콩은 이제 중국땅이 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사사건건 미국과 충돌하여 제1의 잠재적 적처럼 되고 있으며 일본이나 한국은 개방체제에 대해 실질적 호응을 기피하는 등 '동양적 사고'에 기초한 시장경제체제로 미국에 맞서고 있었다.

한 세력이 정치의 중심무대를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지면 그만큼 헛점이 노출되고 비판과 공격을 더 불러들이게 된다. DJP연합은 박태준의원까지 끌어들임으로서 DJT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후보 단일화와 내각제의 내용을 흘림으로서 정치의 지배면적을 넓혀갔다. 그에 비례하여 반대세력 신한국당과 여론의 공격을 강도높게 받기 시작했다.

"DJP 권력 나눠먹기식 밀실합의"
"집권땐 국정표류 우려"
"2년짜리 대통령 정국장악 험난. 개헌과정 경제-사회 혼란"
"약속문건 곧 휴지조각 될 것"
"비열한 정치적 흥정에 분노"

신문에서 쏟아진 비판 비난의 문구들이었다. 물론 이런 비판의 소리들은 반대세력 정파들의 주장들을 따 온 것이지만 유권자의 의혹과 일치한다는 면에서 사회적 여론이라 할 수도 있었다.

엄청난 새로운 공격자료를 반대세력에 제공하는 DJP연합의 '정치구상'이 까발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정적세력인 신한국당은 분당 진통으로 효과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다. 당 고문 이만섭의원이 이인제지사의 신당 총재로 가기 위해 YS와 이회창을 비난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해 버리자 분당은 실체화했다. 유권자의 눈에는 어느 쪽에서 일어나는 일도 권력지분 확보를 위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DJP식 '권력가불'에 대한 비판의 무게는 많이 훼손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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