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난장이 된 정치무대**
대통령선거의 '막간'이라고 평가했던 안양.만안 국회의원 보선에서 두 야당이 밀었던 김일주 자민련후보가 당선됐다. 야당은 이 보선결과가 바로 민심이라고 했고 특히 자민련은 유권자의 신뢰가 드러난 것이라고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대선까지는 1백일이나 남았고 그 시간동안 일어날 사건 사태 현상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 북새통을 포착한 정부는 제일은행을 사실상 국책은행으로 재전환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정부가 8천억원의 현물출자를 함으로서 제일은행 주식지분의 49%를 장악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기아사태에 채권은행 주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계산이 숨어있는 듯 했다. 불가피한 선택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시중은행 민영화 문패를 거꾸로 다는 국면전환이며, 이른바 금융개혁에도 일대 혼선이 야기되는 이벤트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한보사태를 빚어낸 '관치금융'의 틀로 되돌아가는 꼴에 다름 아니었다.
경제에 흘러드는 '대선 현상'이란 것이 있다.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정책상의 반응이다. 항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예산. 당초 3%증액의 98년 초긴축 예산안을 들고 나왔던 정부의 기본 방침은 여당의 압력으로 증가율이 당초 방침보다 두배나 높은 6.5%로 잠정 결정되었다. 당.정협의회는 여의도 신한국당 당사에서 협의회를 갖고 98년 예산을 97년의 71조4천억원보다 6.5% 늘어난 76조원 안팎으로 편성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같은 날 건설교통부는 광주 북구등 45개 시 군 구 1천3백83평방km에 대해 '부동산 투기가 줄었다'는 판단자료에 의해 9월7일부터 토지거래허가 대상지역에서 제외시켰다. 이를 두고 일부 여론은 연말대선을 의식한 선심대책이라고 비판했다.
경제운행은 그럭저럭 위험수준을 피하면서 유지되는 듯 했으나 외환보유고의 격감이 재연됨으로서 외환문제의 장기화 조짐을 드러냈다. 그동안 외환보유고는 4월부터 꾸준한 증가세를 이루어 온바 있었는데 8월 들어 급감한 것이다. 8월말 외환보유고는 3백11억4천만달러로 7월말의 3백36억7천만달러보다 25억3천만달러가 감소했다. 경상수지 적자의 확대와 해외자금 차입난 등으로 외화자금이 공급된 외에 환율안정을 위해 외환시장에 보유외환을 크게 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는 엄청난 단기외채의 상환이 줄을 잇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노 사면'으로 빚어졌던 파문은 YS의 일갈과 이회창후보에 대한 당의 통합적 지지강조로 일단 무마되었지만 이번에는 JP의 내각제 발언이 파장을 일으켰다. JP는 9월5일 기자간담회에서 "김영삼대통령이 내각제 개헌을 결심해 국민투표에 부치면 이에 협조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대선연기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내각제는 정가에서 이미 그의 전매특허처럼 되어있는 마당에 새삼스럽게 이 문제가 파문을 일으키게 된 것은 YS에게 직접 딜을 했다는 점과 대선연기 가능론을 편 데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회창후보의 진로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는 신한국당에게는 '자극제'가 아닐 수 없었으며 야권연합으로 후보단일화를 밀고 있는 국민회의에게는 '교란제'가 아닐 수 없었다. 정가에서는 무엇인가 '공작'이 진행되고 있다는 해석이 유포되었다.
그러나 이 제의도 YS에 의해 즉각 거부되었다. 정가에 긴장감이 돌자 JP는 기자들에게 화를 냈다. 내각제는 자신이 꾸준히 설파해 온 것인데 새삼스럽게 문제를 야기하는 쪽으로 몰았다는 것이다. 언론이 비판적인 반응을 보인데 대한 대응인 듯 싶었다.
왜 JP는 새삼스럽게 이 문제를 던졌을까. 그는 문제가 되라 하고 던진 것이 분명했다. YS를 직접 겨냥한 것이나 대선연기론은 이제까지의 원론 설파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대선후보들의 예비경쟁에서 제일 말석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그가 겨냥하는 것은 '소가 대를 먹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역의 발상일 것이다. 내각제는 그를 새로운 정치사에서 지역세력의 맹주로부터 정치주도자로 변화시키는 묘약이 된다. 3김중 한 김은 이미 대통령을 하고 있고 다른 한 김은 다음 대통령 자리에 가장 근접해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 한 김인 자신은 그져 지역의 우두머리로 사라지는 것을 참고 보아넘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혁명을 했던 인물이지만 직접 정권을 잡기에는 너무도 센티멘탈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일 것이다. 빠지면서 권력을 잡아내는 방식은 어쩌면 체화된 것일지 모른다. 박정희와 더불어 5.16을 일으켰지만 결코 그는 1인자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5.16세력과 더불어 사라지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는 정치현역이며 유권자에게는 몰라도 정치가문들이 노는 마당에서는 당당한 세력의 우두머리였다.
그가 터득한 정치철학은 살아남는 것이며 그냥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그늘을 지니는 위치이다. 한발 더 깊숙히 짚어낸다면 그의 내각제 발상에는 보스체제를 통해 3김이 살아남게 되는 현실적 과제가 숨어있었다. 그리고 그 3김중 헤게머니를 장악하게 되는 것은 자신일 수도 있다는 복잡한 정치산술을 담고 있었다.
정치는 '끊임없이 문제를 던지고 그것을 스스로 풀어가는 행위'라고 본다면 대선을 앞둔 플레이들은 이 말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JP는 다시 내각제 발언으로 얻어 맞은 것처럼 되었지만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 될수록 그는 자기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는 전리품을 얻게 된다. 5~6%의 유권자 지지율, 그리고 구정치세력으로 이루어진 세력의 우두머리로 밀려있으면서 JP가 '거품'을 일으킨다는 것은 묘한 현상이었다. 정치에 하는 재미, 보는 재미가 있다면 아마 이런 데 있는지 모르겠다.
9월 초순에서 중순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죽음'이라는 주제가 흘렀다.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 빈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직후 곧 이어 '세계의 성녀' 테레사 수녀가 타계했다. 두 사람의 죽음은 여러 의미에서 대비가 되었고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화두를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던져 주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한국사회에 쇼크를 준 죽음은 유괴된 소녀 박나리양이었다. 이 어린 소녀가 납치된 이후 전 메스컴은 그의 행방을 쫓는 켐페인을 벌렸다. 아마도 신문들은 우울하고 갈등이 중첩된 시기에 이 소녀의 생환 켐페인이라도 성공하면 사회적 분위기가 밝게 흐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제작 산술들을 세운 듯 싶었다.
그러나 범인을 잡고 보니 나리양은 이미 살해되었음이 밝혀져 분노와 허탈감만을 남겨 놓았다. 더욱이 범인 전현주는 20대의 임산부로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 공무원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서 엄청난 충격파를 몰아왔다. 며칠 후 신문의 한 귀퉁이에는 전 내무부 고위관료이며 함남지사직에 있는 전모씨가 사표를 제출했다는 1단 기사가 게재되었다. 전현주의 아버지였다.
이 와중에 한국형 전투기 한 대가 '사망'했다. 9월18일 오후 2시5분쯤 충남 서산시 음암면 도당1리 야산에 훈련중이던 서산기지 소속 KF-16 전투기가 엔진고장으로 추락했다. 8월6일에 이어 두 번째로 발생한 사고였다. 공군은 사고 직후 50여대의 KF-16에 대해 비행중단 조치를 취했다. 이 즈음에서 정부는 그린벨트 완화조치도 취했다. 이 조치가 알려지자 '선거 선심론'이 일어났고 항간에서는 '그린벨트는 이미 죽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주당 후보로 추대된 조순에 뒤이어 이인제 경기지사가 신한국당을 탈당, 출마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제 대선 레이스는 5자구도로 확정되었다. 경선이라는 민주적 절차까지 무시하고 탈당까지 하면서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인제는 정치계와 언론에 의해 비판을 받았지만 지지율에서는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에 뒤이어 2위를 고수했다. 그의 정치행태는 엄청난 비판을 받아 마땅했지만 그의 출마가 선거전략상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국민회의는 별다른 정치공세를 펴지 않았다.
악재가 몰아치는 가운데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는 몇 가지 정치력의 복원 공세를 취했으나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병역 문제'를 야기시켰던 아들 정연씨를 다니던 직장 KDI에 사표를 내게 하고 군복무기간 만큼 사회봉사를 하도록 소록도 나환자촌으로 보냈다.
당헌 개혁작업에서 대통령 중심제와 역사 바로세우기를 삭제, 권력분산을 통한 합종연형을 꾀했다. 이런 저런 계획들과 시나리오가 먹혀들지 않자 2원집정제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지지도는 김대중-이인제-이회창으로 되어있는 순차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지도의 상대적 열위는 당의 헤게머니를 장악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무위로 돌려버린 것은 고사하고 후보의 지위조차도 위협했다. 신한국당의 민주계를 중심으로 공공연히 '후보사퇴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회창으로는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9월22일 서울지방법원에서 '김현철 게이트'의 최종결심 공팡이 열렸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김현철에게 징역7년과 벌금 15억원, 추징금 32억7천4백20만원을 구형했다. 검찰은 김기섭 전 안기부운영차장에게는 징역3년, 추징금 1억5천만원을 구형했다. 김현철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와 조세포탈죄가 적용되었다. 검찰은 이날 논고문에서 이 사건의 전개과정과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이번 사건은 김현철 피고인이 한보사건에 깊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이와 관련된 각종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라는 국민적 여망에 의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결과 드러난 것이다. 피고인으로서는 표적 수사나 여론재판이 아니냐는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고인은 불만에 앞서 자신이 왜 여론의 의혹과 질타를 받게 됐는지, 그리고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됐는지를 새겨봐야 할 것이다. 특별한 신분을 이용해 기업인들로부터 장기간에 걸쳐 거액을 수수한 피고인의 행위는 어떠한 변명도 용납될 수 없으며 일반 국민과 소외계층의 불만과 불이익을 가중시켜 국민적 화합과 단결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고 정의롭고 깨끗한 사회건설이라는 국민적 염원을 근본적으로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국가원수 아들을 구속, 기소까지 하게 된 이번 사건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사건이 아닐수 없으며 일반국민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심어 줬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 국가원수의 아들일지라도 법을 위반하면 처벌받는다는 법치주의가 이나라에 살아있음을 보여줬고 민주주의가 한 단계 발전하는 성과를 얻게 됐다고 자부한다..."
한편 김현철 피고인측 여상규변호사는 3백23쪽에 달하는 최후변론서를 재판부에 제출하고 1백쪽의 변론요지를 3시간에 걸쳐 낭독, 이 사건은 여론재판이며 검찰의 표적수사의 희생물이라고 변론했다.
"이번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는 한보 특혜대출 비리사건 수사과정에서 김현철씨가 한보의 몸통이라는 근거없는 소문에서 시작되었다. 검찰의 1차 수사결과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수사는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유언비어와 언론의 매도가 계속되자 검찰은 사상 유례없는 수사진 교체라는 극단적 방법을 써가며 현철씨의 처벌을 구체적 목표로 설정했다. 결론적으로 현철씨에 대한 검찰의 공소는 법리로 보나 실체적 진실로 보나 범죄가 되지 않거나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 전부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뒤이어 9월24일 서울고법 형사4부에서는 황인행 부장판사 주심으로 한보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이날 공판에서 정태수 피고인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횡령죄 등을 적용, 원심대로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국민회의 권노갑 피고인도 원심대로 징역 5년에 추징금 2억5천만원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신한국당의 홍인길 피고인에 대해서는 1심보다 형량이 낮은 징역 6년이 선고되고 황병태․정재철․김우석․정보근 피고인 등에 대해서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5년씩을 선고, 석방했다. 신광식 전 제일은행장, 우찬목 조흥은행장은 징역 3년에 추징금 4억원을 각각 선고했으나 이철수 전 제일은행장에게는 1심보다 무거운 징역 6년에 추징금 9억8천만원을 선고했다.
고령임을 감안할 때 정태수 피고인에 대한 형량은 무기징역과 같은 것이었으며 집행유예를 받은 국회의원 피고인들은 중병을 이유로, 정보근피고인은 주범인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따라갔다는 이유로 정상을 참작했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언론들은 이 정치 사회 경제적 대사건의 공판을 비중있게 다루지는 않았다. 실체적 진실과 법의 심판이라는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대선이라는 정치행사로 압도된 흐름에 그냥 재래식 관성대로 단순보도나 법정 스케치의 일부만을 흘렸을 따름이었다.
한 칼럼니스트는 이런 신문의 보도태도를 비판했다.
"한보사건을 마무리한 우리나라 유수한 신문들의 자세를 보면 어떤 가치 판단에 의한 소신에 따라 지면을 꾸몄다기보다 타성에 의존하지 않았느냐 하는 느낌을 어쩔 수 없이 받게 된다. 만약 한보사건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올바른 가치판단이 전제된다면 비록 항소심이라고 할지라도 재판과정이나 결과를 그렇게 소홀히 다뤄야 할 까닭이 없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진실 추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더욱 달라진다. 한보사건은 실체적 진실이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미궁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진실 추구를 소홀히 함으로써 미궁을 미궁인채로 방치해 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의지와 기개가 절실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사실 미궁은 어떤 의미에서든 특종기사의 보고라는 인식이 아쉽다. 그런 뜻에서 한보사건의 마무리가 미궁 속에서 끝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자의 자존심과도 관련된 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한보사건은 거기에 관련된 사람의 숫자나 규모로 미뤄 진실을 덮어 영원히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하기엔 이미 어떤 한계를 벗어났다고 보아 틀림없을성 싶다. 설령 그런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더라도 신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그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는 신문의 책무야말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줄 믿는다."(중앙일보 이규행의 움부즈맨)<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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