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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하는 한국경제, 핫머니들의 표적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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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붕괴하는 한국경제, 핫머니들의 표적 되다

<손광식의 '1997 비망록'> (35) ‘한국은 다음번 희생자’

***35.'한국은 다음번 희생자'**

복잡하고 혼란한 정치흐름 속에서 경제 역시 현상진단을 어리둥절케 하는 흐름이었다.

외환시장이 흔들리는데 성장률은 회복되고 있었다. 외환시장의 교란은 종금사의 외환부도 위기로부터 왔다. 3-5억달러가 구멍이 난 것이다. 급기야 한은이 개입하여 위기를 껐지만 그렇지 않아도 태국을 위시한 동남아금융시장의 위기가 한국에도 상륙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터였다. 환율은 9백원대를 육박하고 금리는 올라갔다. '자율해결'만 앞장 세우고 있던 부총리 강경식은 정부개입의 단추를 눌렀다. 하나는 언론을 상대로 한 홍보이고 다른 하나는 외환보유고 늘리기작전이다.

"한국은 다르다. 멕시코나 태국에 비해 국제수지 외환사정이 상대적으로 양호하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경상적자는 멕시코는 7%, 태국은 8.2%였던데 비해 한국은 4.9%수준이다. 또 원리금 상환률도 멕시코는 28%, 태국은 10.2%인데 비해 우리는 6.7%다. 앞으로 산업은행등 국책은행을 앞세워 외환을 끌어들여 외환보유고를 3백60억달러수준까지 높일 것이므로 달러시세는 안정될 것이고 외환위기는 없다."

그러나 그는 단기외채와 그 비중이 위험수위를 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단기외채 비중은 위험선 30%를 넘어 60%에 이르고 있었다. 어떻든 이런 류의 '황색경보'는 경제에 자주 울린다는 것이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런 경보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은 한보와 기아사태였다. 정부는 구멍난 은행과 종금사의 외환을 메꾸어 주기 위해 한보사태 이후 약 42억달러를 풀어주었다.

정부나 여당쪽이 경제심리전을 쓰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았지만 한은은 외환위기설이 떠돌던 8월20일 2분기 성장률을 발표했다. 우리경제는 예상보다 호조를 보여 1분기의 5.5%보다 높은 6.3%의 성장률을 나타냈다고 발표했다. 중화학쪽을 중심으로 수출이 크게 늘어나 성장률이 높아졌다고 했다. 이것만 보면 '경제는 회복기류를 타고 있다'고 할만 했다. 불안과 희망의 기류가 교차하는 혼란전선이었다.

이날(8월20일) 오전 10시50분 불시에 민방공 경계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이 경보는 '국방안보용'보다는 '경제안보 싸이렌' 소리 같았다.

외환사정이 악화되면 으레 등장하는 것이 과소비 지출과 왜곡된 소비행태다. 달러가 줄어드는 원인은 따지고 보면 우리의 생산 및 수출구조에 있지만 개인소비 성향은 보다 감각적으로 국제수지 악화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외환비상이 걸리면 해외 여행객의 소비지출은 사회적 규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국제화' 세계화'가 선언된 이후 전통적인 억제책들은 이미 빛을 잃었고 고작 김포세관에서 보따리 검사를 까다롭게 하는 비관세 장벽의 수단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런 방법도 결국은 형식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외국제품들은 그 값이 문제지 국내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국제화 시대'이다.

이제는 상품이 아니라 레져나 도박 같은 소비행위로 달러의 지출행태가 바뀌었다. 도덕과 윤리상의 문제라면 모르지만 경제의 행태로는 막을 수 없을만큼 큰 흐름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라스베가스를 중심으로 한 해외원정 도박판이 들통난 것은 따라서 당연히 일어날 것이 일어난 사건이었다.

서울지검 외사부 유성수검사는 미국 미라지호텔의 카지노 책임자의 한 사람인 로라 최를 체포했다. 한보의 정태수총회장의 둘째아들 정원근의 해외도박 사건을 수사하던 중 수사선상에 떠오른 이 40대의 여인은 미라지 카지노의 한국 마켓팅 담당자로 현지 외상노름꾼의 노름빚을 받으러 한국에 왔다가 외화불법 유출혐의로 잡혔다. 로라 최는 40여명의 고객명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리스트가 동티를 낸 것이다.

코오롱의 이웅렬회장을 비롯 정상용 전 의원등 사회적 저명인사의 이름이 드러났다. 이들은 수만에서 수십만달러를 라스베가스 도박장에서 잃고 한국으로 빚독촉을 온 로라 최에게 그 도박빚을 갚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가운데 대전 동양백화점 부회장 오종섭 .파일전자 전무 유장혁.스위스안경 대표 박종섭 등은 구속수사를 받던 중 억대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국민회의의 광주출신 전 국회의원 정상용도 수십만달러를 잃은 것으로 전해졌는데, 본인은 "지난해 선거에서 낙선(서울 서초을구) 실의에 빠졌을 때 평소 절친했던 예당음향 사장 변두섭사장의 제의로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위로여행을 가 난생 처음으로 카지노를 하다가 1천3백달러를 잃은 게 전부"라고 해명했다.

기아사태와 대선흐름 그리고 해외 원정도박 사건의 맥을 끊고 나온 것은 북한의 이집트주재 장승길대사가 망명한 사건이었다. 장승길대사는 8월22일 카이로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부인과 함께 실종되었다. 그의 신병은 현지 미국대사관에서 보호받고 있는 것으로 곧바로 밝혀졌다. 미국은 이같은 사실을 한국측에 통보했다. 소식통들은 프랑스 파리주재 북한 총대표부에 근무하고 있는 장대사의 형 장승호 경제담당 참사관도 장대사 부부와 함께 망명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장대사의 망명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함께 살던 막내 아들 철민(19세)군이 1년 전 행방을 감춘 데다 북한체제에 대한 낙담, 그리고 다음달 중 임기를 마치고 귀임해야 할 처지에 있는 점등 복합적인 사유 때문인 것으로 추측됐다.

연이은 보도들은 이미 장대사의 망명일족은 미국에 체류중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하고 최종 망명지에 대한 정보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미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장대사의 부인 최해옥은 만수대 예술단에서 가극 '꽃파는 처녀'에서 주역 꽃분이를 맡을 정도로 유명한 '예술일꾼'으로 북한선전 잡지에도 자주 등장하는 배우출신. 그는 자신을 발탁하여 키워주고 원하는 대로 '외교일꾼' 신랑감까지 골라 준 김정일에 대해 여러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찬양 감사 충성의 편지를 쓴 인물로 밝혀졌다.

후속 보도들은 미국에 망명한 장대사 일족은 두 형제의 부부와 아들 한명등 모두 6명이라고 밝히고 이들의 망명에는 워싱턴의 CIA가 개입되어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장대사부부가 카이로 미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자 CIA가 그들에게 가명으로 된 여행증명서를 발급, 이짚트를 빠져 나오도록 했다고 보도했다. 뉴욕 타임스는 장대사가 최근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비서보다도 최신 정세에 접근해 있어 북한 정보에서 금광을 캐낸 것이나 다름없다고 평가했다.

특히 장대사는 북한의 미사일을 중동 및 아프리카지역을 상대로 거래를 해 온 인물로 알려져 단순한 외교관 망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70년대부터 탄도 미사일 연구에 매달려 온 북한은 81년 이집트와 미사일개발 협력협정을 맺고 24기의 소련제 '스커드 B형' 미사일과 발사대를 도입, 미사일 복제생산에 착수해 왔었다. 그후 북한은 미사일 사거리를 연장하기 위한 기술개발에 몰두, 86년에는 개량형 스커드 B(사거리 3백20~3백40km) 91년에는 스커드 C(사거리 5백km)를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북한은 핵문제가 불거진 지난 93년 5월 노동 1호(사거리 1천-1천3백km) 미사일의 단축발사시험을 강행한 바 있었다.

북한의 중요한 미사일 수출 대상국은 이란을 비롯한 시리아․이라크․이집트 등이며 수출액은 매년 5억달러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북한의 연간 수출액의 30% 수준이었다. .

장대사의 망명사건으로 북한과 미국의 미사일협상 그리고 4자예비회담도 영향을 받았다. 북한은 제네바에서 개최될 예정으로 있는 미사일협상 테이블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이 협상을 거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서울과 워싱턴이 장대사의 망명문제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외환시장에서 기여코 동티가 났다.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사상 처음' 9백원을 돌파한 것이다. 8월25일 국내 외환시장에서 대미 달러환율은 8백99원 60전으로 시작했으나 곧바로 9백원선을 깼고 9백4원90전까지 치솟았다. 이날 환율이 급등한 것은 원유수입 결제자금 등 달러수요가 몰린 데다가 기업체들이 시장전망을 불안하게 보아 매집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환율의 급등현상은 다음날까지도 계속되어 한때 9백10원을 육박했었다.

이것이 일시적 현상인지 아니면 이른바 '동남아 외환 도미노'의 파장인지는 즉각 드러나지 않았지만 AFP통신은 '한국은 환투기의 다음번 희생자가 될 위험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일본 야마이치 연구소의 다카시 이소아이 연구원은 "한국은 경제구조가 취약한 상황에서 금융위기가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 때문에 환투기꾼이 한국을 다음번 목표로 설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사쿠라 연구소의 기오유키 미주사코 연구원은 "당장은 원화가치 하락이 동남아국가들의 경우처럼 통화위기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한국은 최근 대그룹들이 잇따라 도산하는 등 경제위기를 껶고 있어 투기꾼의 목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지금까지 한국은행의 조치가 주로 원화가치를 끌어올리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의 금융위기를 부각시켰다"고 말했다. 호주의 매쿼리은행 국제문제담당 선임연구원 리처드 깁스는 "한국은 정치 사회적 불안 속에서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로 외화획득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며 원화는 그동안에도 "취약한 통화로 지적되어 왔다"고 말했다.

일본 노무라증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한국의 환율불안을 틈타 한 미국계 펀드가 6천만달러 정도를 서울 외환시장에 반입했으며 홍콩 싱가포르등 역외시장에서 원화선물인 NDF(만기가 돼도 실물인수 없이 차익을 챙기는 선물)를 매집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의 하루 외환거래 규모는 25억달러, 역외시장에서의 NDF거래액은 하루 2억5천만달러 정도였다. 따라서 6천만달러로는 외환시장을 움직이기에는 무리이지만 한국기업들의 명의를 빌려 (파킹)헤지펀드들이 계속 몰려들 경우 외환시장의 안정에 위협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도쿄의 외환 전문가들은 "최근 원화의 평가절하는 해외차입이 어려워진 한국 금융기관들이 서울시장에서 달러자금을 집중조성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라며 "해외차입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헤지펀드의 공격이 본격화되면 환율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싱가포르 시장에서 1년물 원화 NDF시세는 미화 달러당 1천원을 넘어서고 있어 양국간 금리차이를 감안하면 달러당 9백20~9백30원의 환율에서 거래되고 있는 셈이었다. 이에 따라 헤지펀드들이 NDF매집을 계속할 경우 차익 실현을 위해 서울 외환시장에 개입할 유혹은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헤지펀드의 환투기와 환율상승을 강력히 부인했다. 그동안 한국의 원화는 경제여건에 맞춰 적당히 절하되어 왔으며 국제금융 쪽의 규제로 핫머니의 유입이 쉽지 않은 데다가 외환위기를 겪고있는 동남아국가들과는 경제적인 상호의존관계가 없기 때문에 환투기에 의해 환율이 급등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환율급등 정세에 대해 언론은 상당히 신중한 자세를 취했으며 태국 외환시장을 흔들었던 소로스와 같은 헤지펀드의 공격목표를 경계하되 달러화의 등락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안정심리를 유도했다. 그러나 환율문제에도 시장일임론과 정부개입론이 맞섰다. 8월28일자 두 신문의 사설.

중앙일보. "정부와 중앙은행이 무리하게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시장의 수급에 맡겨야 한다. 이는 외환시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구조 조정과 금융시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조선일보. "정부와 외환당국은 경제의 기초적 기반안정을 꾸준히 추진하면서 원화가치를 안정시키는 확고한 의지를 시장내외에 확실히 과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외환시장에도 적극 개입, 환율과 수급안정에 대한 강력한 대응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런 와중에서 부도유예중이던 대농그룹이 해체되었다. 기아문제는 계속 혼미상태. 8월27일 서울지법 민사 합의50부는 한보철강에 대한 법정관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재산실사 결과 자산이 4조9천7백29억원에 부채는 6조6천2백76억원으로 부채비중은 높지만 채권금융기관들이 한보철강 인수 기획단을 결성해 제3자 인수를 추진하는 등 노력하고 있어 회생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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