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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등급 하락 속에 벌어진 '기아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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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신용등급 하락 속에 벌어진 '기아 쟁탈전'

<손광식의 '1997 비망록'> (31) 국제금융계의 경보

***31. 국제금융계의 경보**

7월24일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는 "기아쇼크 등 한국의 불안정한 경제상태, 북한의 붕괴가능성 등을 고려해서 한국의 국책은행들을 주의대상으로 올려 놓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무디스는 산업, 주택, 기업, 수출입은행 등 정부지분이 있는 4개 국책은행의 신용등급을 A1 '스테이블'에서 A1'네거티브'로 변경했다. 뒤이어 한전과 한국통신등 정부투자기관의 신용등급도 '네거티브'로 끌어내렸다.

'네거티브'는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될 가능성을 뜻하는 것으로 한국경제 전체가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보다 하루 앞서 미국의 신용평가회사인 S&P사도 한일, 외환, 제일, 장기신용, 신한은행 등 5개 은행의 신용등급을 '네거티브'로 분류하며 감시대상 리스트에 올려 놓았다.

파장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미국의 중앙은행격인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8월초 외국은행 감독관인 윌리엄 라이백 부국장을 한국에 보내 한국은행들의 신용상태를 재평가하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주택은행의 뉴욕사무소 지점승격에 따른 여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한국금융기관의 지점개설에 정부보증을 요구토록하는 새로운 장치의 설치를 요구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의 진행은 심각한 국면이 아닐 수 없었다. 수개월 후 닥칠 저 미증유의 'IMF사태'가 태풍의 핵을 예비하는 흐름이었다.

한편 포항과 예산에서 벌어진 국회의원 보선 및 재선거에서는 무소속의 박태준과 신한국당의 오장섭이 각각 당선되었다. 포항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이기택이 패배했고 예산에서는 김대중-김종필의 연합세력이 밀었던 자민련의 조종석이 고배를 마셨다. 조의 패배로 충청의 맹주 JP는 정치적 타격을 입었으며, 신한국당의 오장섭후보의 승리는 선거직전 기세를 올려줬던 이회창의 위세를 높였다. 한보-김현철-YS-신한국당으로 연계되어 곤두박질 치던 여당의 주가가 회복되고 있다는 아전인수식 분석이 집권당쪽에서 나오기도 했다.

기아사태와 두 지역에서의 선거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김현철 게이트와 관련, 구속 기소되어 1심재판에 계류중이던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이 2천만원의 보석금을 내고 감옥으로부터 풀려났다. 재판부는 김이 활동성 폐결핵을 앓고 있어 다른 수감자들에게 전염될 위험성이 있고 얼굴 근육경련이 수술을 해야만 할 정도로 시급한 증세여서 보석신청을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구속자의 인권을 보살핀 법원의 배려였다. 이런 법의 자세가 일반 수형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기아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 듯 했다. 기아그룹 노사가 노사평화를 위해 '3년간 무분규, 인력 합리화, 단체협상안 갱신' 등에 합의한 것이다. 기아측은 이 사실을 언론에 공표했다. 7월30일의 채권은행단 회의에 앞서 노사의 자구노력을 과시함으로서 지원압력을 유도하자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노사간의 이 합의는 노조총의를 묻는 과정에서 완전히 거부되었다.

기아 노조는 성명서를 내고 "채권은행단은 기아사태가 강성 노조 때문에 비롯된 것인 양 금융지원의 전제조건으로 대량감원 및 노조의 인사경영권을 보장하는 단체협약의 전면적인 갱신 등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이같은 요구는 기아 정상화를 위한 노조의 자구노력을 가로막는 것은 물론 특정재벌에 기아를 넘기기 위한 수순밟기"라고 주장했다. 또 "채권은행단이 계속 이같이 요구할 경우 전체 노동운동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 민주노총 등과 연대해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제적 해법과 사회적 해법의 충돌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기아사태로 이어진 경제적 긴장의 작용으로 한보사태에 한가지 해법이 등장했다. 포항제철과 동국제강이 한보철강을 인수하겠다는 방안을 전격적으로 제출한 것이다. 7월29일 포철과 동국제강은 한보철강 당진제철소의 봉강. 열연설비는 동국제강이, 코렉스 및 열연. 냉연설비는 포철이 2조원에 각각 인수한다는 의향서를 채권단에 제출했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정부와 채권은행단과의 사전 조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현대그룹이 입찰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확인에 따라 급진전되었다.

그러나 인수방식은 채권은행단이 제시하고 있는 '주식인수'가 아닌 '자산인수'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 수용여부에 문제가 있었다. 주식인수의 경우는 한보철강의 은행빚까지 떠 안게 되지만 자산인수의 경우는 땅과 건물 기계 구조물만을 돈을 주고 사게 되어 채권은행단의 대출금 회수는 엄청난 차질을 빚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한보철강은 자산보다 부채가 1조6천3백25억원이나 많은 데다가 5조원짜리 자산을 2조원에 매각하는 경우 4조6천억원이상이 날라가 버릴 수밖에 없다.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한보의 부실을 은행이 떠안아 은행 자체의 부도가 불가피하게 됐다.

공교롭게도 같은날 서울고법 417호 대법정에서 한보사건의 항소심 첫 공판이 열렸다. 이날 재판정에는 피고들이 업혀들어 오거나 휠체어로 등장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이미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나간 황병태. 김우석피고와 병보석과 형집행정지를 신청중인 정재철피고인은 휠체어를 타고, 정태수피고인은 법정경위의 등에 업혀 들어와 일순 법정은 중환자실을 방불케 했다. 피고들은 돈을 받은 사실들은 인정하면서도 대가성 여부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이를 부인한 가운데 검찰측 신문은 끝을 냈다. 정치, 사회적 대혼란을 일으켰던 한보사태는 '기아사태'라는 경제태풍에 압도되어 밀려가는 형국이었다. 서울고법 형사4부 황인행 재판장이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마져 무더위와 무관심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이날 밤 TV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통령후보를 방송국 스튜디오로 불러 토론회를 가졌고 신문들은 계속 이후보의 아들이 의도적으로 체중을 감량, 징병을 기피했다는 '병역문제'와 권력게임을 중계하기에 바빴다.

공판이 열린지 이틀 후 김우석. 정재철 두 피고인도 구속집행 정지 처분이 내려 감옥을 벗어났다. 김피고인은 우울증, 정피고인은 당뇨와 고혈압 때문이라고 재판부는 이들을 풀어준 이유를 밝혔다. 공판날 재판정의 '중환자실 연출'이 무엇을 예비한 것인지 알 만 했다.

한보인수 문제가 가시화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이번에는 기아인수 문제를 놓고 물밑 접촉이 있었다. 정세영 현대명예회장과 김우중 대우회장은 제주도에서 극비 회동, 공동인수에 합의를 보았다. 이 두그룹의 공동인수는 삼성의 진입을 막기위한 공동전략이라고 재계는 보았다. 그러나 뒤이은 LG그룹의 인수 참여 타진으로 재계의 '빅4'가 노리는 과녁은 또다른 곳에 있음이 드러났다. 바로 재계의 대권싸움이었다.

12월에 있을 정치대권과 병행하여 몸체불리기의 진짜 공룡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한판이다. 예컨대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는 경우 총자산규모가 51조원(96년말 기준)에서 65조원 이상으로 늘어나 현대를 누르고 명실공히 제1위의 재벌이 된다. 현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삼성과 근소한 차이로(총자산 53조원) 유지되고 있는 1위의 위치가 현격하게 벌어져 타의 추종을 당분간 불허하게 된다. 4위의 대우는 LG를 따돌리고 3위로 부상할수 있다는 계산이며 반대로 LG가 인수에 성공하면 총자산이 38조+14조=52조원이 되어 현대 삼성과 더불어 재계대권의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이런 배경아래서 열린 회의인지라 7월30일의 기아 채권금융단 대표자회의는 강경했다. 김선홍회장이 제출한 자구책이 구체성이 없다는 이유로 추가 지원을 거부했다. 특히 김선홍회장의 퇴진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정적인 기류까지 실어 불만을 터뜨렸다. 거대한 부채를 안고 있는 공룡에 대해 꼼짝달싹을 못했던 은행장들의 '반격'이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금융의 집단세력화 현상으로 판독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한보사태 이후 은행으로부터 철수한 정치권력의 공간에 은행장들로 상징되는 금융연합 함대가 새 깃발을 꽂은 것이다. 현대-대우-기아로 연결되는 재계 연합함대는 은행함대가 기아를 반격하자 기동력을 발휘, 문제의 기아특수강을 공동경영하겠다고 전격발표했다. 7월31일 정세영 현대명예회장, 김우중 대우회장 그리고 김선홍 기아회장은 시내 모처에서 긴급회동을 갖고 기아위기의 최대 현안으로 되어있는 기아특수강을 동등한 지분을 갖는 컨소시엄 형태로 공동 경영키로 합의한데 따른 것이다.

기아특수강은 기계. 자동차 부품을 주로 생산해온 기업으로 93년 이후 4년 연속 적자를 기록해 왔으며 96년에는 기아그룹 전체 적자 1천2백90억원의 68%인 8백79억원이 이 회사의 적자였다. 총자산은 1조3천6백억원, 자본금 1천3백98억원, 매출 3천2백억원이며 차입금등 총부채액은 1조3천1백억원이었다. 기아자동차등 기아계열사가 최대주주로(지분율 26.2%) 국내특수강 생산능력의 40%인 연산 72만톤의 생산능력을 갖고 있었다.

현대․대우․기아의 연합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삼성 봉쇄 작전이었다. 기아측은 결국 기아사태는 삼성측의 시나리오에 의해 빚어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삼성측은 1단계로 '보고서'파동을 일으켜 기아의 잠재적 위기를 전파하고, 2단계로 부도방지 협약 대상으로 몰고 가고, 3단계로 김선홍회장을 퇴진시키며, 4단계로 부도처리를 한 후 삼성이 인수한다는 것이다.

한편 삼성측은 3자 연합의 이면에는 현대가 궁극적으로는 기아를 삼키기 위한 시나리오가 있다고 공격했다. 우선 기아특수강에 발을 들여 놓고 다음 단계로 기아의 본체를 흡수한다는 작전이다. 이런 상황전개로 본다면 은행단과 기아는 삼성-현대의 대리전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아 채권단 뒤에는 삼성, 기아 뒤에는 현대-대우의 연합군이 배수진이 되고 있어 기아사태의 해결은 간단치가 않았다. 8월1일 열린 2차 기아그룹 관련 채권금융기관 연합회의는 또다시 결렬됐다. 채권단은 '걸림돌' 김선홍회장의 퇴진을 집요하게 요구했고 현대-대우의 원군을 얻은 김회장은 더이상 자구책을 내놓을 게 없으며 '정상화가 실패하면' 그때 회장자리를 내놓겠다고 버티었다.

이미 현대측은 기아와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경기도 김포군 장지리에 있는 기아그룹 계열 (주)기산의 아파트 예정부지 7만2천평을 8백억원대에 사기로 기아측과 합의했다. 이런 움직임들이 나타나자 기아관련 주식은 이날 증시에서 전종목이 상한가를 이루는 강세로 돌아섰다. 한보와는 달리 어떻든 새로 강력한 주인을 맞을 것이라는 예측에 따른 반응이었다.

공개적으로는 표명하지 않았지만 정부의 입장은 채권단-삼성쪽이었다. 기아-현대-대우의 기아특수강 공동경영에 회의적 반응을 보여온 정부는 기아자동차의 3자인수는 통상마찰을 빚을 것이라는 구본영 OECD대사의 보고서를 확보하고 있었다. 구대사의 보고서는 EU(유럽연합)는 합병회사의 전세계 매출액이 50억ECU(4조5천억원) 이상이고 EU내 매출액이 2억5천ECU(2천2백억원) 이상이 될 경우 독점규제에 관한 EU자문위 이사회 규칙에 어긋나는 합병으로 규정하여(기아-현대-대우 합병의 경우 저촉 가능성이 높다) 제재를 가한다는 일반론을 전달하고 있었지만, 이 카드 뒤에는 삼성의 견제가 있었다는 것이 재계의 분석이었다.

역시 자동차 싸움은 공룡싸움같은 스케일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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