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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사태를 정치논리로 풀라 한 동아일보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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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사태를 정치논리로 풀라 한 동아일보 사설

<손광식의 '1997 비망록'> (30) ‘국민정서’라는 해법

***30. ‘국민정서’라는 해법**

‘기아쇼크’가 경제적 충격파를 몰아온 직후 이번에는 휴전선에서 군사적 쇼크가 일어났다. 7월16일 오전 중동부전선 비무장지대(DMZ)내 군사분계선을 북한군 14명이 기관총과 소총을 동원하면서 침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북의 도발에 대해 아군측은 즉각 응사, 쌍방은 포까지 동원하는 23분간의 심각한 교전상황을 연출했다. 그러나 이 군사적 쇼크는 별다른 파문을 일으키지 않은 채 넘어갔다. ‘황장엽 망명’으로 빚어진 일련의 심리적 패배나 김정일에 대한 비난에 대한 응징을 상징화하려는 대응이었는지 여부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 북측은 4자회담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외교적 반응과 상투적 대남 비방공세를 띄우기도 했지만 도발행위와의 연계성이 불투명하여 어떤 북의 의도도 설명되지 못했다.

신한국당의 대선레이스나 기아의 부도유예라는 정치, 경제적인 큰 흐름은 그 페이스대로 그대로 진행되었다. 어쩌면 크고 작은 쇼크에 대한 사회적 면역성이 높아졌다고도 할 수 있으며 국가전체로서도 군사독재 시절과는 다른 세계로 들어간 화학적 변화를 확인시키는 대목이었다.

'기아사태’는 그 수습과정에서 한보와는 다른 측면을 보여주었다. 한보가 악덕의 표상처럼 떠올려졌던 데 비해 기아에 대한 사회적 재판은 온정적이었다. ‘정상참작’의 기류가 강하게 흘렀다. 언론은 조기정상화를 위한 정부의 지원과 개입을 촉구하고 나섰고 김선홍회장은 동정과 성원을 받았다. 기아그룹의 임직원들은 경영혁신단을 구성하고 ‘국민기업 기아는 반성과 함께 재기를 다짐합니다’라는 5단 전면광고를 도하 각지에 게재했다. 정부는 관련은행들인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에 1조-2조원의 특융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부도유예조치 이후 기아자동차는 더 잘 팔리고 시민격려가 쇄도하는가 하면 기아살리기를 위해 시민모임인 ‘범국민운동연합’(대표 김지길목사)까지 발족했다. 시장 경쟁력이나 경영전략보다는 ‘국민정서’를 재기의 에너지로 삼아보는 색다른 전략이었다. 한보에 사형선고를 내린 국민법정은 기아에는 정상참작으로 재생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온당하다는 평결을 내리고 있었다.

하긴 기아의 경우는 주식분산이 광범위 하여 국민기업으로 널리 인식되어 온 터이며 김선홍회장은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으로 이 그룹을 이끌어 왔고 노조는 경영위기에서 ‘구사운동’을 펴가는 데 유리한 방향에 서 있었다. 일반적으로 ‘구사운동’을 경영진의 앞잡이처럼 보는, 또 그런 성격이 없지않는 풍토에서 이를 압도할 만큼 기아노조는 강했다. 그러나 이런 정서적 에너지가 시장과 경영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제적 접근을 압도하고 재기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에는 누구도 확신이 없었다.

한보사건과 김현철 게이트는 멀리 뒷전으로 밀려있는 가운데 법무부는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의 신병을 경희대병원으로 옮겼다. 지병인 안면근육 경련과 우울증이 악화되어 수감생활을 할 수 없어 치료를 받도록 했다고 법무부는 설명했다. 주치의인 경희대 신경외과 이봉암과장은 김씨가 뇌수술을 받지 않을 경우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있고 심한 우울증으로 강한 자살충돌까지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입원을 앞두고 이른바 ‘김기섭 리스트’란 말이 정계에 떠돌았다. 김현철이나 자기가 실세였을 때 온갖 청탁과 출세를 위해 아부하던 인물들이 이제는 등을 돌리고 지탄마저 하고 있어 그 명단을 확 불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런 보도가 흘러나가고 곧이어 그의 신병이 병원으로 풀린 것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 더욱이 법무부의 조치는 김현철의 제2차 공판을 바로 앞두고 이루어졌다.

7월21일 세간의 관심은 신한국당의 전당대회가 열리는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 몰려있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신한국당의 후보를 결정하는 이날 전당대회는 2차투표까지 몰고가는 상당한 열기 속에 밤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이회창후보가 2차 투표에서 이인제 후보를 6대4의 비율로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다. 1차투표에서는 이회창 4,955표(41.12%), 이인제 1,774표(14.72%), 이한동 1,766표(14.66%), 김덕룡 1,673표(13.89%), 이수성 1,645표(13.65%), 최병열 236표(1.96%)를 각각 얻어 이회창과 이인제가 결선투표에 나섰고 남은 후보들은 전날 약속한대로 2위가 된 이인제후보를 밀었으나 이탈표가 일어나 이회창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2차 투표결과는 이회창 6,922표(59.96%), 이인제 4,622표(40.04%). 당선이 선포된 후 연설대에 오른 이회창은 격앙된 목소리로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을 했다.

“우리가 벗어야 할 짐은 많습니다. 그 하나는 낡은 정치입니다. 금권정치 밀실정치를 청산하고 맑고 투명한 ‘저비용 고효율’의 생산적인 정치를 반드시 실현해야 합니다. 법을 무시하는 초법주의 행태와 부패구조, 사치 낭비와 과소비풍조도 빨리 청산하고 온 국민이 강건한 정신으로 다시 무장해야 합니다. 온 인류가 부러워하고 전세계가 존경하는 부강한 나라, 신나는 사회, 살맛 나는 세상을 건설하는 데 앞장 서 뛰겠습니다.”

한보사태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선거전략에서 어디를 겨냥할 것인지 그 한 방향이 암시되어 있었다. 바로 금권정치 밀실정치를 해 온 자신들이 속한 집권체제인 것이다.

재집권을 기도하는 여당의 빅 이벤트는 불가분 한보의 태풍자락을 탈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언론은 그 의미를 짚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이런 대목만이 찾아 볼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었다.

"이번 신한국당 경선만 보더라도 이런 식으로 대선을 다시 치렀다가는 나라가 온전치 못할 것이라는 점은 이미 확인됐다. 한보사태의 간접 연루자격이면서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는 여당이 그 와중에서 경선을 치르면서까지 과거에 비해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돈선거시비, 인신공격, 흑색선전, 지역주의, 줄세우기등 과거의 악습들이 모두 되살아나 활개를 쳤다."

같은 날 오전 10시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 김현철 사건의 2차 공판이 열리고 있었다. 김현철은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법정에 모습을 나타냈다.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도 피고석에 모습을 보였다. 이날 공판의 핵심은 김현철이 받은 돈의 대가성 여부와 조세포탈 의도 유무에 있었다. 피의자는 1차공판 때와 마찬가지로 검찰의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5월17일 오전에 검찰이 작성한 조서는 15일과 16일 이틀간 새벽 3시까지 이뤄진 밤샘조사 끝에 갑자기 긴급체포서를 가져와 서명하라고 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서명 날인,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고 주장했다. 또 검찰조서 곳곳에 검찰의 편의에 따라 작성된 부분이 있어 원래 진술과 뉘앙스가 다른 곳이 많다고 혐의에 대해 반론을 폈다.

특히 변호인단은 이 재판이 ‘마녀사냥식’으로 이루어졌고 ‘여론몰이식 재판’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공박했다. 1차 공판과 별다른 진전이 없는 데다가 신한국당의 이벤트에 밀려 이날 재판은 관심의 표적권에 들지 못했다. 김현철의 부인 김정현이 공판정에서 기자들의 표적이 되어 간이 인터뷰를 한 것이 신문에 화제성으로 다루어진 것이 고작이었다.

한편 기아의 기업재생을 위한 ‘국민정서를 등에 업은 실험’은 계속 은행과 정부에 대한 압력을 키워 나갔다. 이수휴 은행감독원장은 은행장 회의를 소집하고 기아지원을 강력히 종용했으나 은행장들은 모두 고개를 외로 꼬았다. 이제는 죽어도 지원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란 판단들이었다. 그러면서 기아의 방만했던 경영과 김선홍회장의 독주 그리고 무분별한 금융차입을 성토했다. 도대체 연간 1천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는 기아특수강 같은 곳에 임원이 17명이나 되는 그런 경영으로는 도저히 재생불능이라는 게 은행들의 판정이었다.

그러나 정부쪽의 회유와 압력으로 이날 은행장회의는 ‘성의표시’를 하기로 결정했다. 1천6백억원 가량의 긴급자금을 지원키로 했다. 단 김선홍회장 등 현 경영진의 경영권 포기각서 제출, 담보제공, 인원감축 및 부동산 매각의 이행 시한 제시등 조건을 달았다. ‘이제는 더 이상 물려들어가지 않겠다’는 반응이었다. 은행측 태도와는 달리 여론의 일각은 ‘국민정서식 해결’을 계속 촉구했다.

"지금도 대기업 부도설이 꼬리를 물어 재계는 하루도 부도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금융기관들은 한 푼이라도 덜 물리려고 전전긍긍, 금융시스템이 전례없이 불안하다. 시장경제원리나 구조조정 모두 옳은 말이나 원리원칙에만 매달리다 기업이 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골치 아픈 사안에 끼어들지 않고 원론적인 얘기만 하는 경제관료들의 태도가 정권말기의 몸사리기나 누수현상에서 비롯되었다면 정말 큰 일이다." (동아일보 7월23일자 사설)

경제를 시장논리로 풀라는 주장에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기아쇼크 이후 쌍용등 부도유예 기업이 줄줄이 대기중이란 루머아닌 루머가 퍼지면서 증권시장은 곤두박질을 쳤다. 7월22일 신한국당과 이회창후보가 여의도 63빌딩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을 즈음 바로 길건너 증권가의 시세표시판은 주가하락을 나타내는 빨간 불 투성이었고 종합주가 지수는 725.98로 단 하룻만에 14.95포인트가 떨어졌다. 5월27일 이후 약 두달만에 720대선으로 재추락한 것이다.

이른바 ‘국민기업’이라는 차원에서 정치 사회적인 지원을 통해 기아를 살려야 한다는 재생 캠페인에 대해서 반대의견이 대두되었다. 조선일보 7월24일자 사설.

"기아는 뭘 꾸물거리나..........임직원들의 직위안보나 여론의 동정심 같은 데 연연해서는, 기아의 임직원들은 결국은 여론의 동정이 아니라 거꾸로 규탄을 받게 될지 모른다. 오늘의 기아위기는 외부의 음해 시나리오에 영향을 받은 점도 있으나 근본적으로 임직원과 노동조합의 이기주의, 방만한 경영에 더 책임이 있다. 그런만큼 기아의 모두는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기업을 되살릴 책임이 있다. 특히 기아노조는 뒤늦게 정신을 차려 구사자금을 갹출하고 임금과 상여금을 반납하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쏟고 있는데 차제에 보다 발전적인 결단을 내려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면 어떨까 싶다."

기아사태 이후의 여론은 강력한 정부개입이냐 아니면 자율회생이냐의 양 갈래로 나뉘었지만 그 주장들의 밑바닥에는 관치금융의 망령이 아직도 배회하고 있는 구각의 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극단적인 주장 가운데에는 기업사채를 대통령 긴급명령에 의해 동결했던 ‘8. 3조치’를 또 한 번 동원해야 한다는 것까지 나왔다. 적어도 박정희시대의 향수가 강하게 깔려왔다는 점에서 이런 현상은 결코 그냥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개발독재니 관치금융이니 하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모순의 출발도 따지고 보면 ‘위기상황’으로부터였으며 그것이 정치권력에 의해 명분화되고 현실화되었던 터이다. 한보에서 기아에 이르는 경제위기의 표출은 물론 당시와는 다른 성격이지만 위기감이라는 동질의 차원에서 본다면 자칫 정부의 개입주장은 유혹적인 데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한 외국언론은 ‘지금 한국민이 심리적으로 필요로하는 것은 독재에 가까운 리더십으로 국가(경제를 포함)를 끌고 가는 것’이라고 분석할 정도였다. 강경식은 기아문제를 비롯한 기업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알아서 할 문제’라고 ‘자율성’을 강조했지만 무책임한 정부의 대응이라는 비판을 받는 그런 분위기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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