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국가위험도는 곤두박질**
부총리 강경식은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또한편의 금융개혁 시리즈를 발표했다. 당초 금개위가 소유한도를 10%까지 높이자고 했던 은행주식 소유한도를 백지화시키는 대신 5대 재벌그룹의 주주권 행사를 인정하며 은행 증권 보험 등을 지배하는 금융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키로 한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 가운데 흥미를 끄는 것은 은행장 추천권을 갖는 비상임이사회의 구성 변경. 이제까지는 재벌들에게는 비상임이사회 참여기회를 봉쇄해 왔는데 이를 허용하고 대주주대표 50%, 소액주주대표 30%, 이사회 추천 20%로 되어있는 비상임이사회 구성비율을 주주대표 몫을 70%로 높인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은행장도 이제는 청와대가 아니라 민간주주들의 영향력에 의해 결정되도록 틀을 짠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핵심은 이런 형식과 틀이 문제가 아니라 관행이 문제이다. 강경식은 금융지주회사 설립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언급했지만 은행장 선임에 관권개입을 봉쇄하는 특별법 제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아무리 비상임위원회가 정부 입김을 약화시키고 재벌기업들의 영향력을 강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청와대와 재경원으로 표현되는 '정부'는 재벌에게도 은행이사회에도 아직은 권한행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보면 이 개혁안들은 모양은 그럴사하지만 죽어도 은행은 권력으로부터 놓지 못하겠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권력집단의 '음모'에는 '재벌의 은행지배는 불가'라는 여론이 명분을 제공하고 있었다. 언론기관중에서는 유일하게 중앙일보만이 '은행은 이제 주인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중앙일보는 다음날 지면에 이 문제에 대한 찬반 양론의 논쟁을 부쳤다. 강철규교수(서울시립대학)는 은행소유지분 확대에 반대했고 강병호교수(한양대학)는 찬성했다. 삼성재벌과 중앙일보의 연관성을 떠 올리면 이 논쟁 자체도 입지에 따른 의도적인 것이라는 비판도 있을 법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된 주장의 논거들은 거의 과거의 틀과 관행을 토대로 한 것이며 진부한 논리 전개를 하고 있었다. 본질은 한국의 정치와 경제(시장)가 앞으로 어떤 틀과 어떤 관행으로 변할 것이며 그 변화된 환경 속에서 '은행 주인 찾아주기'가 합당한가 아닌가를 규명하는 데 있는데도 그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말싸움'이 진행되었다.
장외 세력 싸움은 한국은행의 위상변화를 담고있는 금융개혁안을 놓고도 계속되었다. 6월27일 한은동우회는 역대 총재를 모셔놓고 정부안에 대한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민병도 전 한은총재는 성명문을 직접 읽으면서 "정부안이 통과되면 한은의 존립이 위태롭다"고 말하고 "정부의 이번 개편안은 지금까지 논의된 한은법 개정안중 최악"이라고 규정했다. 한편 김인호청와대 경제수석은 재경원과 한은 출입 기자단과 만나 정부안은 청와대 재경원 금융개혁위와 한은 등 4자간에 별다른 이견없이 합의에 도달한 최선의 방안이므로 더 이상 변경할 필요가 없다고 버텼다. 금융개혁안을 둘러싼 공방은 신한국당의 대선주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만큼이나 복잡했고 갈등이 증폭되는 형국이었다.
6월27일 15개 한보철강 채권금융기관은 제일은행 본점에서 운영위원회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 채권단은 7월25일부터 산업 제일 조흥 외환 서울 등 5대 채권은행의 한보철강에 대한 당좌거래를 재개키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한보철강 부도 이후 교환하지 못하고 있던 한보철강의 진성어음 4천9백50억원이 결재될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되었다.
한편 안건회계법인은 한보철강에 대한 실사보고서를 채권은행단에 제출, 한보사건으로 '구멍난' 경제적 손실을 실측해냈다. 이에 따르면 한보철강 자산은 장부보다 1조1천9백억원이 적은 5조1천억원, 부채는 4천8백억원 더 많은 6조6천5백억원이었다. 한보철강의 순자산은 결국 장부보다 1조6천7백억원이 모자라고 투입자본을 까먹은 자본잠식액은 1조1천3백억원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태수씨는 6조원의 돈을 떼어먹는 것이 아니라 1조6천억원의 금융기관 돈을 구멍낸 것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계상된 한보사태의 비용은 6조원이지만 경제적 계산은 1조6천억원이었던 것이다. 사회적 충격으로부터 빚어진 감성의 기류가 다시 이성의 기류로 회복되기까지는 5개월의 시간이 필요했음을 이 숫자들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실사가 의미하는 '엉터리 장부'속에 숨어있는 비밀은 탐색되지도, 문제화되지도 않았다. 그것이 가능했던 왜곡되고 부패한 틀을 밝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개월의 정치 사회적 재판극에 경제적 탐사는 매몰되어버린 것이다. 매일경제신문의 김철수증권부장은 칼럼을 통해 이 실사가 던지는 문제점을 이렇게 분석, 적시했다.
"한보철강의 예에서 보듯 기업의 실체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엉터리 기업회계제도를 이대로 그냥 두다가는 우리나라가 자본의 세계화 대열에서 미아가 될지 모를 일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1개 상장기업 장부가 1조6천억원이나 잘못되어 있어도 누구 하나 근본적인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는 기업회계에 대한 무감각이다. 엄연히 기업회계를 관장하는 정부조직이 있고 또 기업회계의 적정 여부를 관리하는 감독기관이 있다. 기업회계의 검증자격을 부여받은 공인회계사도 수천명에 달한다.
한 상장기업의 장부조작이 1조6천억원에 달했다면 이런 엉터리가 가능한 회계제도의 현실에 대해 청문회를 열자는 주장도 나올 법 한데 아직 누구도 문제를 정면으로 들고 나오는 사람이 없다. 한보철강의 자산실사를 회계법인에 의뢰했던 피해당사자인 채권은행단조차 엉터리 회계의 문제점을 제기하기보다는 "철강사업을 하려면 초기에 1조원정도 빚을 질 수 밖에 없다"며 골치덩이 회사를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입으로는 경제논리를 강조하는 경제인들이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는 것으로 한보사태의 모든 것을 덮어 버리자'는 정치논리에 너무나 익숙해 있는 것은 아닌지. 기업회계는 해당기업 자체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회계를 기준으로 그 기업의 이익에 대해 세금이 매겨지고 회계장부를 근거로 금융기관은 돈을 빌려준다. 그리고 그 기업이 발표한 회계를 토대로 수많은 투자자는 해당기업의 가치를 산정해 주식을 산다. 기업회계는 이처럼 실물경제의 근간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까닭에 객관성을 높이고 신뢰를 갖도록 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고 또 시급하다.
반면 실상은 어떠한가. 정부는 올 들어 기업회계의 분식을 막기 위해 공인회계사를 기업 스스로가 선택하지 못하게 하고 감독기관에서 지정하는 외부감사인 지정제도의 확대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기업들의 거센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백지화되고 말았다. 기업 입장에서는 스스로 공인회계사를 선정하는 것이 고무줄 장부를 만드는데 훨씬 편할 수 밖에 없다. 공인회계사를 외부에서 지정토록 하는 제도에 대해 결사반대를 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면서도 쉽게 이를 반아들인 정책당국의 무기력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한보철강의 분식회계를 눈감아준 미필적 고의나 다름이 없다."
일시적 현상인지 장기적 현상인지 속단하기는 힘들지만 경제의 흐름은 꽤 정상화되고 있었다. 증권투자용 해외자본이 늘어나자 달러물량이 풍부해지고 이에 따라 한은이 외환시장에서 달러매입에 개입하는등 흐름이 반전되었다. 계속 치솟아 오르던 달러시세도 9백원선에서 8백80내지 8백90원선으로 후퇴했고 시중금리도 내려갔다. 국제수지도 많이 호전됐다. 5월중 무역수지 적자는 3억6천만달러로 그 폭이 크게 감소했고 경상수지 적자도 전달보다 6억7천만달러가 줄어든 10억4천만달러였다. 다만 무역외수지는 별다른 개선이 보이지 않았다.
통산산업부도 기민하게 자료를 발표했다. 6월중 수출은 1백23억4천6백만달러로 월간 실적으로는 최고치를 나타냈고 30개월만에 소폭(9천8백만달러)이지만 흑자를 보였다고 했다. 한국은행은 이런 추세대로라면 올해 경상수지적자는 1백80억달러 수준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계속 높아지던 어음부도율도 5월중 0.23%로 11개월만에 떨어졌다. 이런 흐름을 토대로 경기는 9월을 최저점으로 하여 다시 상승국면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관측을 내 놓았다. 이런 예측은 한보사태의 뒷마무리까지를 포함하여 '평정을 위한' 시너지 효과로 작용되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시차에 따른 평가 때문에 낙관적 전망은 아직 등장하지 안았다.
파리발 외신은 한국의 국가위험도가 높아졌다고 전했다. 프랑스 금융기관을 총괄하는 예금공탁금고가 31개 개도국을 대상으로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국가위험도는 96년말 59점으로 위험도가 낮은 순위로 6위였던 것이 30점으로 낮아져 11위로 밀려 내려갔다. 말레지아 대만 홍콩 중국은 물론 인도 태국보다도 밀려나고 있었다. 또다른 위기가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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