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찬반만 무성한 '금융 빅뱅'**
6월의 둘째주부터 한보는 퇴장했다. 그 들끓던 한보사태의 공간에는 보습학원으로부터 빚어진 부정 비리가 교육방송 간부와 교육계로 번져나간 학원비리 사건, 대선주자들의 방송출연 경쟁, 돈봉투바람, 그리고 한총련 사건 등으로 분할 점거되었다. 그리고 현충일을 시작으로 한 징검다리 휴일이라는 시간적 요소는 이런 사회적 관심사의 이동을 자연스럽게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 연휴를 맞아 고속도로는 레져인구로 뒤덮였고 JP와 신한국당 경선주자의 한 사람인 이수성고문은 용인에 있는 은화삼 CC에서 골프회동을 가졌다.
새로 제일은행을 책임맡은 류시열 제일은행장은 은행선전 CF에 나와 한참 눈을 감고 참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은행은 앞으로 고객만 바라보고 일하겠습니다." 한보사태로 가장 만신창이가 된 사고은행의 새 행장의 말은 '광고'같이만 들리지 않았다.
한총련은 한보사태가 떠난 뉴스의 공백을 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석 구타사망사건에 대한 조사가 경찰에 의해 진행되면서 한총련은 전사회적 공격 대상으로 몰렸다. 공권력은 수사권을 발동, 이 학생단체의 '수상한 내막'을 폭로하는 일방 이석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전국에 수배했다. 특히 이들이 한 무고한 시민을 어떻게 타살했는가에 대한 조사결과는 사회적 분노를 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찰 프락치임을 인정하라면서 9시간을 구타했다는 언론 보도에 모두들 분개했다.
김지하 시인이 말한대로 안기부나 보안사의 지하실에서 이루어진 고문과 무엇이 다르냐는 비판은 이미 대중화 되어버렸다. 두 사람의 희생자 이외에 전남대 구내에서 발견된 이종권씨의 변사체도 한총련지부인 남총련에 의한 '프락치 조사를 위한 폭행'에 희생되었다는 경찰조사가 밝혀짐으로써 한총련은 거의 '사회적 공적' 수준으로 내몰렸다.
언론은 계속해서 한총련 규탄- 해체쪽으로 몰아갔다. 한총련의 일부 학생들은 명동 성당으로 들어가 김영삼정권의 퇴진과 대선자금 공개를 외치며 스스로 쇠사슬을 가드레일에 묶는 '옥쇠 항거'를 했지만 오히려 이들 세력에 대한 사회적 지탄으로 YS하야, 대선자금 공개는 '학실히 물건너 가고 있음'을 굳혀주었다. 공권력은 이들을 이적단체로 규정했지만 한보를 희석시키고 국민적 압력을 결과적으로 약화시켜 실제로도 사회적 차원에서 이적행위를 한 꼴이 되었다.
미묘한 것은 이런 공안시국의 흐름속에서도 진짜 남북관계는 긴장완화의 기류를 타고 있었다는 점이다.
6월12일 북한의 신의주 만포를 통해 한국적십자사의 대북 지원양곡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북한적십자사에 이미 약속했던 곡물 5만톤중 1차분인 옥수수 1만1천2백톤에 대한 인도였다. 북적대표들은 이날 중국의 단둥으로부터 화물열차와 함께 입북한 한적측 실무대표에게 "남쪽 동포에 감사를 표한다"고 했다. 북풍은 이제까지의 경우 긴장이 고조될 때 정권에 유리했다. 그러나 한보의 늪을 권부가 빠져 나오는데 불어준 북풍은 긴장이 아닌 공존의 순풍이었다. 이것은 또하나의 미묘한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김현철의 재판이 6월23일로 예정되어 있다가 7월7일로 돌연 연기되었다. 김현철의 변호인측에서 검찰이 수사기록을 피고측 변호사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연기신청을 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리고 박태중이 경영하던 (주)심우가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에 의해 부도처리가 됐다. 공판연기에 담합이 있었다던가 정치적 고려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언론은 어떤 탐색도 없었다. 연기된 기간 동안에 숙성될 사건이나 새로운 사태가 예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판 전인 7월1일은 홍콩반환이라는 세계적 이벤트가 일어나는 날로 예비되어 있었다.
6월의 셋째주가 시작되면서 한보는 완전히 사라졌다. 칼럼니스트 강위석은 <청년들이여, 책을 읽자>라는 글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또 하나의 시간적 일치가 있다. 한총련이 김영삼대통령 조기 퇴진운동을 벌이자 지금까지 한보-현철-대선자금으로 이어지던 언론의 열화같은 보도가 일시에 목소리를 확 낮췄다. 서로 온 힘을 다해 경쟁하고 있는 우리나라 언론 매체들이지만 한총련의 것과 비슷한 주장을 하고 싶지 않다는 공감이 일시에 일어났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정말 그런 기류가 흘러서인가. 6월16일 열린 '정태수 리스트'에 올라있는 정치인 8명에 대한 첫 공판은 보도의 초점이 되지 못했다. 조선일보가 1면 사이드 4단으로 문정수 부산시장의 수뢰사실을 전했을 정도이다. 문시장뿐 아니라 이날 피고석에 선 김상현. 노승우의원과 정태영. 최두환. 하근수. 김옥두. 박희부 전 의원들은 돈을 받은 사실조차 부인하거나 대가성 없는 정치자금을 받았을 뿐이라고 기소 사실을 부인했다. 이미 파장이 나고있는 사건에서 추가 희생자가 되기는 싫다는 것인지, 아니면 변호사들이 그렇게 하기로 입을 맞춘 결과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한편 윤여준 대변인은 같은 날 청와대 기자들에게 김영삼대통령의 외유계획을 발표했다. 6월23일부터 28일까지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환경특별총회에 참석하고 멕시코를 국빈방문한다고 윤대변인은 밝혔다.
이 발표를 하면서 청와대는 찜찜했다. 한가하게 외유나 한다는 야당의 비난은 무시한다 해도 국민 대부분의 시선이 따가운 게 걸려서라고 언론은 풀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6공 말 노태우대통령이 출국할 때 YS의 민주계는 "쓸데 없이 돈을 쓴다"고 흠집을 낸 바 있었다.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면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으로 믿었는데, 별 수 없이 5년 전 상황의 재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보사태와 김현철 게이트로 YS의 인기가 추락된 상태이니 '자격지심'은 더할 수 밖에 없을 터였다.
'한보의 늪'에서 그나마 건져낼 가능성이 있는 것이 있었다면 금융개혁이었다. 강경식 부총리는 이경식 한은총재 박성용 금융개혁위원장과 기자회견을 갖고 중앙은행제도와 금융감독체계 개편안에 대해 완전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한은법을 폐지하고 중앙은행법을 제정하는 등 관계법안을 마련, 7월 중순 국회에 제출할 것이라고 했다.
합의된 개편안은 한은총재가 겸임하는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에게 재할인.지준.공개시장 조작 등 통화신용정책의 전권을 넘겨주되 물가를 안정시키지 못할 경우 책임을 묻는 틀로 짜여져 있었다. 금통위의장은 정부와 협의해 매년 물가안정 목표를 발표하고 이를 특별한 이유없이 지키지 못할 경우 임기 전이라도 해임당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한은과 재경원이 나눠갖고 있는 금융감독기능을 신설되는 총리 직속 금융감독위원회로 일원화하고 금감위 산하에는 기존의 은행. 증권. 보험 등 3개 감독원을 금융감독원으로 통합한 기구를 두도록 했다.
그러나 이 금융개혁안은 곧바로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우선 야당측은 국민여론 수렴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음 정부로 이월하여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반대했고, 한은은 감독원의 분리로 '밥그릇이 깨진다'고 항의하고 나섰으며, 증권. 보험감독원은 기구통합에 따른 감원 등 이해관계가 걸려 머리띠를 두르고 저지투쟁에 나서겠다고 압력을 가했다.
일반국민들이 의아해 한 점은 그래 이렇게 개혁을 하면 어떻게 제2의 한보사건을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또다른 한편에서는 미증유의 경제적 파동을 거치면서 이런 정책 하나 못 만들어 내고 집단이기주의나 발동시킨다면 국가나 국민 수준이 한심하다는 탄식이 나왔다.
하긴 '금융 빅뱅'이란 것이 한보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낙후된 금융구조'와 한보비리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4개월여의 국가와 전 사회적 진통의 결과치고는 무언가 메시지도, 제도발전에 대한 기대도 매몰되어 가는 형국이었다. 치도곤도 보통의 치도곤으로는 다스리기 힘든 권력의 한국적 생리구조가 한보사태를 야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매질은 끝나고 '용들의 잔치'로 그 권력을 부활시키는 모순 속에 빠져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권력도 처음부터 부패하고 악하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 대의명분이 있고 철학도 있고 선의의 지배이데올로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스스로 부패할 수밖에 없는 생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를 오래 해온 서구국가에서 계속 부패 스캔들이 들통나는 이 시대적 현상은 지금에 와서 새삼스러운 것이 된 게 아니다. 동서고금 이래로 권력의 역사라는 것은 그런 얼개로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정치체제, 법제, 사회인식에 의해 부패가 크냐 작으냐의 낙차가 있을 뿐이다.
한보사태를 만들어 낸 권력과 '용들'이 뛰고 있는 권력은 전혀 다른 것일까. 한보에서 드러난 권력의 얼굴을 철저하게 판독하고 해부하며 새로운 법과 제도와 관행의 큰 기둥을 세우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이을 다음 권력의 쟁패전으로 건너뛰어 가지고는 '장영자의 큰손'도 '정태수의 리스트'도 다시 스물스물 살아날 것이다.
금융개혁안은 노동법 파동과 유사한 과정으로 들어갔다. 언론과 세론이 원칙을 지지하고 나섰지만 노조가 강력히 반발했다. 한국은행,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등 3개 금융감독기관의 노조들은 6월17일 정부의 금융개혁안 철회를 걸고 공동투쟁에 나섰다. 3개 기관 노조협의회는 한국은행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안이 강행될 경우 최후수단으로 3개 감독기관의 총파업과 총사퇴운동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민주노총의 권영길위원장이 참석, 연맹 차원의 반대투쟁계획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한편 한은 노조는 이경식총재에게 행내 공식의견 수렴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부안에 합의한 데 대한 공개질의서를 전달하고 전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총재퇴진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인호청와대 경제수석은 "김영삼대통령은 금융개혁을 추진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은 노조가 중심이 되어 금융개혁안을 철회시키기 위한 총파업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자 청와대측은 강경대응을 천명했다. 6월18일 오전 청와대. 강인섭 정무, 김인호 경제, 문종수 민정수석등은 대책회의를 갖고 "지금의 반발은 대안제시가 아닌 현재의 금융구조속에 갖고 있던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이라고 규정짓고 "반발의 도가 넘으면 관련법에 따라 불법행위자를 사법처리 하기로" 결정했다. 부총리 강경식도 이날 열린 지역경제원 초청 정책토론회에서 정부의 금융개혁안을 관철시키겠다고 강경 입장을 표명했다. 한편 시중. 지방. 국책은행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구성된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은 정부안을 지지하고 나서 금융계의 금융개혁안을 둘러싼 기류는 불연속선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국가와 사회발전에 무엇이 생산적 이슈인가는 당시의 시대상황 여건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한보이후 언론을 통해 나타난 큰 흐름은 대선 예비경쟁, 금융개혁, 그리고 북한문제였다. 대선경쟁은 이른바 '용들의 토크쇼'가 끝나자 이회창대표의 대표직 사퇴문제로 집약된 여당의 혼전이 주 이슈가 되었고 금융개혁은 지지와 반대로 뒤얽힌 혼미상황이, 북한문제는 만주와 북한을 연결하는 국경지대의 대북식량 수송과 북한의 체제 내부의 비참한 실상과 갈등이 뒤섞인 낙관과 비관이 범벅이 된 혼란이 주 이슈였다.
이런 이슈들을 받아들이는 쪽에서 볼 때 과연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가치관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혼란은 미래라는 시간과 관련되지만 과거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보사태에 있어 일관되었던 진실규명과 개혁이라는 국민적 요구까지 혼란속에 편입되어버리는 미묘한 상황을 만들어 냈다. 자연히 본질은 희석되고 시간은 흘러갔다. 적어도 4개월여에 걸친 '대란'속에 국가와 사회를 몰아 넣었던 한보사태에 초점을 모은다면 금융개혁은 핵심적이고 생산적인 국가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혼미의 법칙'에 빨려들어가 침전되는 상항이었다. 이른바 '국정표류'라는 이름으로 한보사태의 종결을 주장해 온 그럴싸한 명분들도 이런 전개과정을 미리 예측한 것은 아닐까.
질서의 이름으로, 안정의 이름으로 사회를 이끌려는 충정은 상식이다. 그러나 대사건의 마무리에 곧잘 등장하는 이 주장속에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현상유지의 '몰개혁'이 깔려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5조원이라는 사회비용을 날려버린 한보사태는 국민적 반대급부를 보장받지 못한채 끝나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6월 하순에 들어와 한보사태는 간간히 에피소드만 들려올 정도로 멀리 강건너로 자취를 감췄다. YS는 유엔환경특별총회 참석과 멕시코 방문을 위해 8박9일의 예정으로 6월22일 출국했다. TV화면에서도 신문지면에서도 그의 임기중 마지막이 될 이 외교활동은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매스컴은 대선경쟁과 비디오로 찍어 온 북한의 참상과 관련된 보도들로 뉴스의 흐름을 이끌었다.
"한보와 김현철씨 비리사건, 대선자금문제가 아직도 국정을 옭아매고 있다. 여야 정치권의 갈등은 더해가고 여당의 대선후보 경선은 날이 갈수록 혼탁해지는 양상이다. 이런 때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꼭 외유를해야 하느냐는 야당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고 언론은 계속 한보사태의 자락을 물고 늘어지기도 했지만 상투적인 비판에다 메아리마져도 없는 비판이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감옥에 갇혀있는 한보관련자 및 김현철의 근황보도가 신문 매니아들의 '반찬'으로 관심을 끌고 있었다. "다혈질의 현철씨는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고 있고 김우석 전 내무장관은 우울증에, 정재철 신한국당 의원은 당뇨병으로, 황병태의원은 부정맥증으로 각기 시달리며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고 언론은 전했다. 그러나 이 보도가 전해지기 전에 이미 황병태의원은 심장병 치료의 명분으로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빠져 나갔다.
이미 대중의 관심마저 떠나버린 한보사태이니 제도 개혁 하나가 신문의 귀퉁이에 실려있는 것은 이쯤에서는 희안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공직자 윤리위에 조사권을 줄 것을 검토한다는 기사였다.
"정부 공직자윤리위원회(위원장 조요한)는 윤리위를 독립기구로 만들어 등록재산 조사권을 갖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이같은 방침은 최근 한보사태에 대한 검찰수사 과정에서 김현철씨의 거액 자금수수와 김우석 전 내무장관의 수뢰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이들이 매년 제출한 재산등록서류에 어떠한 문제점도 포착되지 않았다는 분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윤리위는 또 등록재산을 심사하는 총무처의 복무감사를 담당하는 조직과 행정기관별 자체 감사기구도 담당직원들의 잦은 인사이동으로 심사에 전문성을 기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개선방안을 마련키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사는 그 사안이 의미하는 바 무게값도 안나가는지 한 조간신문에 2단으로 취급된 게 고작이었다. 기사전체가 차지하는 면적은 정치발전협의회가 이회창대표를 본격 공격한다는 보도의 제목이 차지하는 면적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어떻든 한보는 기업도 죽었지만 사태 자체도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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