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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쪽'을 '무쪽' 자르듯 해 버렸다?

<손광식의 '1997 비망록'> (24) YS의 두 가지 베팅

***24. YS의 두 가지 베팅**

5월의 마지막 주로 들어서자 한보사태와 김현철 게이트는 표면적으로는 관심의 표적권으로부터 밀리는 듯 싶었다. 국민재판정으로부터 여.야의 정치전투장으로 이동하는 흐름이었다. 일대 시국의 조정국면으로 변하는 것일까. 언론들도 관심사항의 분화현상을 지면에 드러냈다.

야당의 92년 대선자금 공개 및 대국민사과 공세를 보도하기도 했지만 북경에서 열리고 있는 남북적십자사 대표들의 대북 식량지원이라든가 15대 국회의원들의 자질평가 같은 것이 1면톱으로 올라갔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동아일보는 전지면의 기조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대선자금 공개불가’를 맹열히 비판했다. 주일이 시작되는 5월26일 동아일보는 이 문제를 계속 1면 톱으로 올렸다.

"대선자금 말바꾸기 국민은 혼란스럽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대통령은 대표에게 미루고 대표는 중국행’이라고 책임회피를 질타하고 대통령은 “결백하다”했다가 “밝힐 자료 없다”고 밀고 나가고 이회창 대표는 “법대로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가 “국민이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바꿈으로서 정직성을 의심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회면에서는 김현철은 실명제 직후 1백억원을 차명으로 전환해 김기섭등에 맡겨 비자금으로 활용해 온 사실이 검찰조사에 의해 드러났다고 톱으로 다루어 압박해 들어갔다. 또 같은 날 통사설을 싣고 ‘대통령은 민심을 바로 보라’고 다그쳤다.

급기야 청와대 쪽은 “김대통령이 대선자금을 해명키로 했다”는 진화용 멘트를 고위관계자의 이름으로 흘렸다. 내용인즉 5월29일 신한국당 경선주자들을 불러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인즉 여론이 악화되자 청와대 보좌진들이 ‘재고’를 김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을 사태가 급박하니까 언론에 ‘튀겨서’ 흘린 것일 뿐 당사자인 김대통령은 가타부타 반응이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동아일보는 ‘압박여론’의 수단을 통해 YS에 대한 강공을 계속했다. 동아일보와 시사주간지 NEWS+ 의 공동여론 조사를 통해 ‘대선자금 공개거부’를 수용 못한다는 여론 반응이 83.3%나 나왔고 그의 임기후에 재론될 것이라는 관측이 65.1%나 나왔다고 보도했다.

대선자금 문제에 YS와 함께 휘말려 들어간 이회창신한국당 대표는 이날 중국방문중 강택민 주석을 만나 이미지 업을 기도했으나 불과 24시간도 안되어 ‘대선자금 고백해야’쪽으로 다시 방향을 선회함으로써 완전 제로 섬 게임이 되어버렸다. 이른바 ‘반 이회창’쪽에서는 제로 섬이 아니라 엄청난 손실이 될 것이라고 했다.

권력투쟁은 그 복잡한 양상과 구조에도 불구하고 항시 그 결말은 단순화되는 성향이 있다. 대선자금까지 물고 이어져 온 한보사태는 YS의 ‘대선자금 고백’으로 단순화되고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미느냐 밀리느냐의 게임에서 YS는 양김에 굴복했다.

DJ와 JP는 5월27일 국회에서 오찬회동을 갖고 두 야당의 연합을 과시하면서 YS를 압박했다. 소박하게 얘기하면 “고백을 할 것이냐, 대통령자리를 내 놓겠느냐”는 협박이었다. 이날 하오에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합동의원총회를 열어 YS뿐 아니라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까지 물고들어갔다. YS와의 주례회동에서 ‘대선자금 공개 불가’라는 방침을 합의한 장본인이 바로 이대표이며 당초 이 문제에 ‘김대통령의 고백’이 자신의 소신이라고 말했던 사람도 이대표 자신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대쪽’을 '무쪽' 자르듯 해 버렸다고 비난했다.

야당, 특히 자민련은 4건의 성명과 논평을 통해 이회창대표는 “김대통령의 ‘카더라’ 대변인이며 ‘대쪽’이 아니라 ‘갈대다” “김심과 당심은 얻을지 몰라도 민심은 못얻을 것” 이라고 했다. 국민회의도 “이대표가 강직을 위장해 국민의 눈을 속인다면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펌프질을 했다.

급기야 이회창대표는 북경 조어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면서 대표직 사퇴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비쳤었다. 대선자금 공개라는 막다른 골목까지 몰려왔지만 결국 한보사태가 빚어낸 정치투쟁의 방법론은 ’남 짓밟고 나 일어서기‘였다.

YS가 노태우를 밟고 대권을 장악했던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물론 낡은 전술이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YS는 자신이 개발한 병기에 의해 자신이 피격을 받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3김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쟁투에서 어느 누구도 구사하는 범용성의 무기가 되어버렸다. 신한국당의 박찬종과 이한동은 즉각 이회창을 물고 늘어졌다. 대통령후보 경쟁의 공정성을 위해 대표직을 내 놓으라고 압박카드를 내밀었다.

YS는 두가지 베팅을 했다. 하나는 양김의 회동을 앞두고 기습적으로 ‘대선자금 고백’을 대통령 담화 형식으로 30일에 발표하겠다고 완전히 방향을 바꾼 것이며, 애시당초부터 자신은 이런 자세였음을 청와대 보좌진으로 하여금 뒷 이야기로 흘려 ‘대선자금 공개불가’는 이회창대표가 진의전달을 잘못한 것처럼 만들어 갔다. 청와대 보좌진들은 국민정서를 받아들이려 했다는 자신들의 입지를 전파하기 위해 그간의 사정을 기자들에게 ‘저지선’ 없이 불어댔다.

정치권의 일대 난전 속에서 한보사태의 본질은 이제 꼬리의 행방이 점점 묘연해져 가고있는 형국이었다. 물론 두 김은 한보로부터 받은 돈을 포함하여 정치자금 관계를 공개하라고 요구했지만 한보사태의 진실은 이미 물타기가 되어버린 게 분명해지고 있었다.

북경으로부터 돌아온 이회창은 5월28일 청와대에서 YS와 주례회동을 가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제까지의 모든 현안 갈등들을 ‘없던 걸로 하기로’ 했다. 대선자금 공개불가도, 그로부터 빚어진 정치적 책임도, 그리고 이대표의 대표직 사퇴 검토도 없던 일로 하기로 한 것이다. 여당의 당직개편 등을 성급히 보도하던 언론들도 싹 방향을 바꾸어 ‘갈등은 일단 봉합되었으며’ 이회창체제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야당의 두 김은는 30일의 김대통령 담화내용을 보고 새로운 대응을 하겠다고 느긋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발표내용이 수준 미달일 경우는 ’압박 강도‘를 한 볼륨 더 높이겠다고 협박했다. 야당은 마치 정치자금 문제의 원죄는 오직 YS와 여당의 문제이지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속은 몰라도 겉으로 비친 것은 그랬다.

한보사태가 전개될 때 ’호랑이 마음‘이란 칼럼을 통해 집단심리의 바닥을 짚어냈던 소설가 이문열은 동아일보에 같은 맥락의 칼럼을 띄웠다. 제목은 <제 칼에 찔린 ’문민‘>이었지만 칼날은 야당도 겨냥했다.

"요즘의 정국을 보면 ’상군‘의 낭패가 떠오른다. 상군은 형명학으로 진나라를 부강하게 한 공손앙을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엄한 법 시행으로 상하의 미움을 사다가 마침내 쫓기는 몸이 됐다. 함곡관 아래에 이르러 한 객사에서 쉬고자 했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한 그곳 사람이 말했다. “상군의 법에 여행권 없는 자를 유숙시키면 처벌을 받습니다.” 이에 상군은 쓸쓸히 탄식했다. “아, 법의 폐해가 마침내 내게도 이르렀구나”

또 일설에는 그가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 성문을 빠져 나가려 했으나 수문장이 말하기를 “해가 뜨기 전에 성문을 열면 상군의 법에 따라 죽게 됩니다”하고 열어주지 않아 끝내 사로잡혀 수레에 몸이 찢겼다고 한다.

물론 문민정부의 사정이나 역사바로세우기를 상군의 형명과 같은 차원에서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뽑은 칼에 자신이 상하게 된 점에서는 유사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돌이켜 보면 지난 4년 동안 개혁의 칼날은 너무 많은 사람을 벴다. 청산해야 할 구시대의 유산이라지만 이같이 짧은 기간에 그토록 많은 장군과 장관과 국회의원과 재벌과 공기업의 장들이 상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소급입법까지 해가며 우리가 겪었던 그 어떤 혁명보다도 더 철저한 청산을 해 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마지막 단계, 권력창출의 기반이 된 대선자금으로 칼날이 옮겨졌다. 시대상황과 무관한 악은 드믈고 정치와 연관된 악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당자의 억울함에 동정하거나 개혁의 무자비함을 비판하고 싶은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당시에는 관행이었다 하더라도 용서못할 죄악은 마땅히 처벌돼야 한다. 우리 사회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겪어야 할 아픔이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그 마지막 순간에서의 머뭇거림이다. 대통령은 대선자금의 공개를 약속했다가 취소하더니 다시 30일로 날을 잡았다. 그것도 구체적인 내용공개는 없으리라는 단정적인 관측들과 함께. 지금까지의 경과로 보아 대선자금 공개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추구돼온 개혁의 마무리작업이다. 이로써 과거의 그릇된 정치관행은 근원적으로 척결되고 우리사회는 온전히 거듭나게 된다. 거기에 부정과 불법이 있었다면 달게 처벌받으라. 그것은 개혁의 대의를 위한 정치적 순사다. 죽음으로써 오히려 사는 길이다.

국민에게도 눈과 귀가 있고 짐작이 있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두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보다는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해를 구하라. 그리고 야당에도 강력하게 대선자금의 공개를 요구하라. 공개를 회피하면 자신에게와 똑같은 무자비함으로 수사하라. 그때에는 아무도 그걸 정치보복으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이 보기 싫어하는 것은 대선자금 공개 회피로 당할 대통령과 여당의 낭패뿐만이 아니다. 규모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구조의 대선활동을 했으면서도 큰 호기나 만난 듯 설쳐대는 야당도 보기 싫기는 마찬가지다. 대권에 눈멀어 산적한 국내 현안들은 제처놓고 김칫국부터 마셔대는 그들에게도 섬뜩하게 반성하고 참회할 기회를 주라."

YS는 이회창대표와의 주례회동에 이어 신한국당의 이른바 ‘아홉마리 용들’을 청와대로 불러 점심으로 곰탕을 먹이면서 당의 결속을 강조했다. 대선자금의 공개 및 대국민사과에는 언급이 없었고 회동중 이회창대표의 대표직 사퇴문제가 거론되었다. 김대통령은 “오늘은 기운들 좀 내라고 칼국수 대신 곰탕을 마련했다”고 분위기를 눙쳤으나 아홉 마리 용들은 뼈있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언쟁들을 했다. 타깃은 대표직이라는 유리한 입지에서 대선후보 경쟁을 하고 있는 이회창대표였지만 내심들은 YS의 ‘엄정중립’을 요구하는 압박이었다.

김대통령과 아홉 마리 용이 오찬을 마친 뒤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신한국당 전국위원회는 때가 때인지라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당헌 당규 개정안을 전격 수용했다. 이 개정안은 3개 시 도 이상에서 50내지 1백명의 대의원추천을 받으면 누구도 대통령 경선후보가 될수 있도록 완화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후보로 나가겠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가 개방된 셈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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