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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광식의 '1997 비망록'> (21) 구속되는 대통령 아들

***21. 구속되는 대통령 아들**

5월11일 일요일 낮 12시40분 오사카발 일본항공편으로 한 사나이가 입국했다. 전 대호건설 사장 이성호. 김현철 게이트는 이제 마지막 휘날레를 장식할 순간에 도달하는 듯 보였다.

검찰은 이사장을 상대로 김현철이 92년 대선 후 쓰고남은 대선자금 관리를 맡겼는지, 기업인들로부터 이권청탁을 대가로 김현철 대신 돈을 받았거나 현철에게 전달해 줬는지, 가․차명계좌를 개설, 현철씨의 비자금을 관리해 왔는지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벌렸다. 검찰은 이성호에게 혐의가 걸려있는 포항제철 스테인레스강 독점 판매권 인수, 대호빌딩 위장매각, 8개 지역유선방송 집중매입, 경기도 청남골프장 매입, 관급공사 대량수주 경위 및 자금출처조사 등에 대해서도 조사에 들어갔다.

이성호의 귀국에는 당근과 채찍이 동원됐다. 당초 이는 귀국의사를 갖고 있다가 김현철쪽으로부터 사건 마무리 뒤에 들어오라는 말을 듣고 주저했다. 그러자 검찰은 “귀국 안하면 전재산을 몰수할 것이며 아마 동생도 다칠 염려가 있다”고 협박했다. 수사에 협조하면 형사처벌을 가볍게 해 주는 등 검찰 차원의 배려가 있을 것이라고 회유도 했다.

때를 같이 하여 언론에서는 국정표류를 이유로 이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물론 진실은 진실대로 밝히되 국정도 이제는 관심을 갖고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말이야 옳은 소리였다. 그러나 국가와 국민 총역량을 집결하여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생산적 국정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이 요란하게 보도하고 국민여론을 환기시키며 의회가 청문회를 여는 그런 집중력 없이는 이 문제의 귀결점은 뻔했다. 지난 세월 속에서 드러났던 수많은 비리와 부조리가 정치적으로 슬그머니 덮혀 끝이 난 그 원죄가 한보사태를 결과했다는 사실이 망각되는 함정이 ‘마무리’라는 주장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국정표류에 대한 우려에 대학총장들도 성명서를 내 놓았다. 5월12일 오전. 서울 힐튼 호텔에서 대학총장 3백여명으로 구성된 한국대학총장협회는 ‘나라를 걱정하는 대학총장들의 모임’을 갖고 시국에 대한 호소문을 채택했다.

"분노와 허탈의 도화선이 된 한보사건과 각종 비리는 한점 의혹 없이 밝혀야 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법처리돼야 한다. 대통령이 먼저 난국수습을 위한 결단을 내리고 여야 정치인은 정파를 초월하고 정쟁을 지양해 국리민복과 경제살리기에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대통령의 정상적인 임기와 국정수행은 확고히 보장되어야 하며 어떤 이유로도 그것을 흔들어서는 안된다. 현재와 같은 국가적 위기에 대한 책임은 모두 우리에게 있지만 1차적으로 정부와 국회에 있다."

이 성명의 주목적은 한보사태의 진상을 조속히 규명하라는 것인지 대통령의 하야를 반대한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에 힘을 준 호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호소문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현실파괴에 대한 우려라는 보수성은 결국은 집권세력 쪽을 편드는 결과가 되어 온 것이 한국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총장님들이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변혁은 불가분 혼란을 거쳐야 하지만 그것이 수반하는 위험은 피하려는 것이 또한 대학총장이라는 보수화된 집단의 반응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이성호사장에 대한 검찰조사로 한 단계 위로 올라설 것 같았던 김현철 게이트는 북한주민의 집단탈출 사건으로 뒤로 밀렸다. 북한주민 두 가족 14명이 목선을 타고 서해상을 거쳐 남쪽으로 탈출한 것이다. 귀순한 북한주민은 이 배의 선장인 안선국(49)의 가족 6명과 기관장 김원형(57)의 가족 8명이었다. 안의 가족이 먼저 5월9일 오전 선박을 이용해 신의주를 출발, 압록강을 타고 내려와 11일 오후 평북 철산군 통천리부두에서 김의 가족과 합류했다. 이들이 타고 온 배는 32톤 어선으로 중국선박으로 위장하기 위해 ‘요동어’라는 중국식 선박명을 배에 새겨놓았으며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중국 어선군에 섞여 남하하다가 남한 해군경비정에 발견되어 구조된 것이다.

이 사건의 대서특필로 자연히 김현철의 비자금속보는 잠시 뉴스중심권에서 밀려났다. 성급하게도 이른바 북한판 ‘보트피플’현상에 대한 진단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역시 일회성으로 끝나는 파도였다. 한보 사태의 복원력은 보통이상으로 끈질겼다.

석가탄신일(5월 14일). 대검 중수부는 휴일인 이날도 특근을 했다. 심재륜부장은 기자들에게 ‘중요하지만 의미있는 발표’를 하겠다고 예고했다. 심중수부장은 수뇌진들과의 회의가 끝난후 기자들에게 5월15일 하오 2시 김현철을 소환한다는 사실을 공식으로 발표했다. 그동안 검찰은 김현철이 최소 1백20억원에서 최대 2백억원 가량의 비자금을 관리해온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는 이권개입과 관련된 이른바 ‘검은 돈’은 많이 잡아내지 못했다. 확보한 증거라야 두양그룹 김덕영회장이 95년 4월 신한종금 경영권 분쟁과 관련 3억원의 돈을 제공한 것 정도였다. 이밖에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이 93년 11월부터 2년간 매달 5천만원씩 총 12억원 가량을 제공한 것에도 의심을 두고 있었다. 검찰은 비자금규모로 김기섭 전 안기부차장이 한솔그룹 조동만부사장에게 맡긴 70억원,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을 통해 관리해 온 50억원, 박태중 (주)심우 대표가 운영해 온 1백32억원중 70억원 가량등을 밝혀냈지만 그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92년 대선자금이라는 뇌관을 잘못 건드릴지도 모를 위험성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었다.

YS는 이날 낮 TV 뉴스를 통해 아들의 검찰소환 소식을 점심을 먹으면서 들었다. 권영해 안기부장과의 워커힐 빌리지 대책회의가 노출된 이후 김현철은 성경의 <욥기>를 읽으면서 자신의 일을 정리하고 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이날 오후 2시30분쯤 서울 성북구 돈암동 한진 아파트 209동을 받치고 있던 20미터 높이의 축대가 무너져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고 있던 주부 한 사람이 죽고 6명이 다치는 ‘붕괴사고’가 발생했다. 구조적인 붕괴와 구조물의 붕괴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대검찰청에서 1백여일이 넘게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은 심부장의 김현철 소환을 전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김기수 총장의 조기소환 예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마무리에 반대해 온 중수부는 보다 증거를 보강한 후 다음주 쯤 가서 김현철의 소환 구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던 터였다. 그 배경은 이랬다.

"현철씨의 전격소환은 지난 13일 최상엽법무부 장관과 법무부 실.국장 및 대검 부장등 고위간부 17명간의 ‘마포회동’에서 오간 난상토론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회동에서는 '수사 장기화로 정부 내에서까지 검찰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검찰위기론과 대책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법무 검찰 간부들은 지금까지의 수사 결과를 토대로 현철씨를 사법처리하되 수사의지를 굽히지 않고 비리 수사를 계속하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서 내우외환을 동시에 뚫고 나가자는 공감대가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검찰수사팀은 그동안 정치권의 현철씨 국회 한보특위 증언(4월25일) 직후 소환, 4월중 수사매듭 요구, 김기수 검찰총장의 현철씨 5월초 소환후 수사종결 방침 선언 등에도 불구하고 정도(正道)의 수사를 외치며 현철씨 소환을 늦춰왔다.

정치권은 물론 검찰 수뇌부와의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수사팀이 소환을 미룬 이유는 모두 세가지로 분석된다.
첫번째는 수사기법상 현철씨 조기 소환이 불가능하다는 원칙론. 현철씨 비리의혹의 핵심에 있는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과 김종욱 전 대호건설 기조실장 등이 해외에 체류하고 자금추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철씨 소환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권영해안기부장 등의 ‘3인 안가회동’과 잇따른 메모지 파동에서 드러났듯이 외부의 수사개입 및 압력행사 분위기 속에서 현철씨 소환을 서두를 경우 또다른 의혹만 양산할 수 있다는 명분론이다.

마지막으로 ‘정태수 리스트’정치인 33명에 대한 기소 범위 및 전. 현직 경제수석. 은행장에 대한 사법처리 여부를 놓고 검찰수뇌부와 수사진간에 이견이 존재한다는 실무적 이유도 있었다.

현철씨 소환조사는 사실상 이번 사건수사의 종착역일 수 밖에 없어 소환전 정. 관. 금융계 인사들에 대한 형사처벌 범위를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포회동’에서 법무. 검찰 간부들은 이성호씨 등이 잇따라 귀국했고 쓰고 남은 대선자금 일부까지 수사망에 포착돼 첫번째 난관이 극복됐고 외부의 수사개입 및 압력행사도 국민과 언론의 감시로 사라졌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사진은 현철씨 비자금 중 이권개입 대가와 대선자금 잉여분을 명백히 구분, 사상 처음 검찰이 현직 대통령의 대선자금 일부를 조사한 전례를 남기되 이권개입 대가만 형사처벌 한다는 ‘중재안’에 동의, 현철씨를 전격 소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태와 사건의 전개론’을 생산적인 면에서 찾는다면 한보사태는 금융개혁이다. 그러나 워낙 사건이 권력의 핵심부와 지배권력에 직결된 정치적 요소 때문에 이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더욱이 ‘빅뱅’을 추진했던 이석채 경제수석이 물러난 후로는 거의 국사의 표면으로 떠 오르지 못했다. 결국 신한국당과 정부는 금융개혁 과제의 추진을 다음 정권으로 넘기자고 합의했다.

이에 대해 언론은 상반된 두 견해를 나타냈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등은 ‘연기는 안 될 말’이라고 반대 사설을 썼다. 조선일보는 개혁은 해야 하겠지만 ‘연기하는 게 좋다’고 지지 사설을 썼다. 아무리 정권 말기라고 하여도 개혁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연기 반대의 이유였고, 독불장군식으로 발상된 개혁론인데다가 실천력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 연기하는 것이 좋다쪽의 주장이었다. 같은 보수 언론 사이의 이상론과 현실론의 갈림으로 보였지만 나중 IMF 사태를 맞은 후의 시점에서 보면 두 입장은 위치가 뒤바뀐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5월15일 김현철은 검찰에 소환되었다. 검찰은 철야조사를 통해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을 더 밝혀냈다.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은 93년 11월에 현철씨가 맡긴 50억원과는 별도로 95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22억7천5백만원을 받아 관리하다가 돈세탁을 한 뒤 5차례에 걸쳐 5억원 씩 총 25억원을 만들어 김현철에게 다시 되돌려 주었다고 진술했다.

이미 예고된 것이긴 하지만 김현철의 검찰 소환-구속으로 한보사태가 빚은 위기는 마무리되는 기류가 흐르는 듯 했다. 사실상 한보사태는 그 핵심이 권력의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로 인식되어온 흐름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국정표류라든가 하는 문제의식을 표출시켜 ‘이제는 그만 하자’는 압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 사태가 집권여당과 YS의 아킬레스건인 92년 대선자금을 끌어 냄으로서 집권당의 위기-대선 패배-를 느껴 온 신한국당으로 볼 때는 ‘전쟁 끝’이라는 선포가 필요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위기 속에서도 여당의 대선승리가 예고되는 조사가 나와 더욱 신한국당에게는 상황종료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중앙일보와 문화방송이 11명의 대선 예비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단순지지율은 DJ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왔지만 이회창. 박찬종 등 여당 예비후보는 둘 중 누가 나와도 우세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후미그룹에 있던 대선출마 예비자 이인제 경기도 지사가 돌연 이 조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그는 TV로 중계된 대선 예비 후보자 토론회 날 시청자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환생을 착각할 정도로 닮은 모습의 영상을 보여준 바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박정희 대통령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특이한 반동이 한 흐름으로 깔리는 시기이기는 했었다.

이제 YS가 시국에 대한 소견과 국민사과만 하면 한보정국은 여당이 다시 헤게머니를 쥐는 원상의 상태로 복귀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전열 가다듬기의 한 가닥인지는 몰라도 신한국당의 민주계 모임인 정치발전협의회(간사장 서석재의원)는 돌연 김덕룡의원을 이 모임에서 빼 버리기로 했다. 명분은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김현철의 국정개입에 YS에게 제일 먼저 쓴 소리를 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김덕룡이 김현철이 검찰에 불려간 날 ‘응징’을 받은 것이다. 어떻든 그는 ‘용의 비늘’을 건드렸고 그 용의 귓밑 비늘은 무참히도 이날 검찰에 의해 떨어져 나간 것이 사실이다. 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죽어있는 것 같아도 재앙을 안겨줄 힘이 있다. 특히 정치적으로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식구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힘이 있는 것이다.

한 때 YS의 문민정부가 물리적인 힘을 키워 낸 것은 이른바 ‘구팽’으로 야유를 받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 한 집안식구들을 목을 치는 ‘긴장국면’이 그 배경이었다. 그것은 단순비교로는 낙차가 있지만 총칼 들고 탱크 몰고 나와 긴장을 깔아 놓고 한 권력의 시대를 연출해 갔던 군사정부의 물리적 분위기 조성과 본질면에서는 같은 것이며 그것이 바로 권력의 문법이다.

현철게이트에 가장 공격적 지면과 이니셔티브를 장악해 왔던 동아일보는 이날 1면 톱을 ‘경제 좋아지나...’로 다뤘다. 엔고지속 속에 수출이 회복 기미를 보이고 외환보유고도 3백억달러를 돌파하고 있으며 주가도 한보악재 마무리를 기대한 반응인지 되올라가기 시작했다고 희망적 경제기류를 진단해 내 놓았다. 7백선을 회복한 주가는 5월 넷째 주가 되자 일거에 14.95포인트가 올라 19일 7백21.20을 기록하고 있었다. 경제적 불안이 위기를 낳고 그 위기감은 항시 집권 세력에게 투표를 해 온 성향을 의식한 제작의도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5월의 셋째 주말인 17일 저녁 김현철은 알선수재 및 증여세 포탈 혐의로 검찰에 의해 구속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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