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사라진 ‘DJ 민중경제론’**
바야흐로 봄은 화창해지고 있었다. 개나리는 만발하고 수양버들은 연록색의 봄옷을 입고 봄바람을 타고 하늘거렸다. 시간은 냉혹했다. 자연의 법칙은 누구라서 막을 수가 없다. 만물은 소생하고 자연은 활기를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는 겨울로 가는 마차였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전쟁의 대혼란이다.”
심리적 좌절 분노 갈등은 바로 ‘난세’ 같다는 얘기다. 저 군사독재의 시절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다’라고 누가 말했던가. 실로 봄은 왔으되 봄이 아닌 황폐한 땅이 준비되고 있음을 누가 알고 있었을까. 3월이 가고 4월이 문을 두드린다. 진정 잔인한 4월이 열리는가.
잔인한 4월을 예비하는 흐름은 벌써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한보사건은 정보근회장이 구속되는 것을 계기로 정씨 4형제에 대한 자금횡령이 검찰에 의해 밝혀짐으로서 신판 ‘멸문지화’로 확대되었다. 표적권을 김현철에게서 장본인격인 정씨일문으로 바꾸려는 의도 같았다. 공판을 앞둔 ‘압박작전’이라는 평이었지만 그 배경은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이런 세평은 감옥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감옥의 당사자에겐 이와는 다른 카드로 읽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검찰은 조사문건이 한보측의 변호사를 통해 새고 있으며 이것이 자꾸만 사회적 파장을 확대시키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오히려 정씨쪽을 입열지 말라고 압박하는 카드일 수도 있었다.
한편 정치권은 저마다 동상이몽으로 들어갔으며 물줄기는 다시 여러 갈래로 흩어진 데다가 이해관계도 각정파에 따라 복잡한 산술을 만들어 냄으로서 가히 정치적 카오스 상태에 들어갔다. 허주 김윤환은 예의 킹메이커 역할을 작동시키기 시작한 것인지 미묘한 말을 던져 파문을 일으켰으며, DJ는 특별기자회견을 갖고 초당적 경제난 극복대책을 들고 나왔다. 이런 한편에서는 ‘매카시선풍‘을 의도한 것이 아니냐는 반응을 불러 일으킨 ’황장엽 리스트‘문제가 신한국당 정형근의원에 의해 제기되었다.
김윤환은 3월 27일 이틀간 예정으로 열린 신한국당 연찬회에서 ‘김영삼대통령 신한국당 탈당- 거국내각 구성’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민주계를 중심으로 한 격렬한 반발이 나왔다. 특히 이한동 고문은 “당총재를 중심으로 결속해 난국을 헤쳐나가야 할 시점에서 김대통령의 탈당, 하야 운운한 것은 심각한 해당행위다”라고 공격했다. 코너에 몰린 김윤환은 기자회견을 갖고 해명했다.
“내 주장의 핵심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헌정중단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의원들이 김현철씨 처리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기에 탈당, 거국내각 같은 선택을 하더라도 헌정중단을 막아야한다고 한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필요하게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김현철씨 문제는 우선 그가 국회청문회에서 어떤 얘기를 하는지 들어 보아야 한다. 그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으면 넘어가는 것이고 반대로 범법행위가 드러나면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여야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 대통령의 하야는 사실상 공동체의 파멸이다. 이번 영수회담에서 여야지도자들은 하야같은 헌정위기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대타협을 이뤄내야 한다.”
그러나 당내외에서는 김윤환의 발언의도는 ‘이회창 대세론’을 굳히고 명실상부하게 신한국당의 당권을 다시 장악해 보려는 권력산술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사실상 그는 YS가 3당합당 후 대권후보자로 결정되기까지 킹메이커의 역할을 한 바 있으며, 그의 당시 카드도 ‘대세론’이었다.
신문기자 출신의 이 정객의 시국풀이는 이상보다는 상당히 현실적인 데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찌기 언론계로부터 정치계로 방향을 바꾸었는지 모르지만 5공, 6공의 핵심요직을 거치는 동안 권력의 핵심지대를 지배하는 문법을 아주 잘 터득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가 내세운 표면에는 국가와 국민이란 명분론이 있지만 그는 현실 세계의 정치인이며 지금은 헤게머니를 PK에게 빼앗기고 있는 TK의 리더중 한사람이었다. 적어도 권력의 중심이 이동되는 시기에 자신에게 요구되는 바가 무엇이며 새로운 권력 등장이후 그 권력의 주식지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한보사태-김현철게이트는 12월의 권력쟁탈전(대선)과 연결고리를 맺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분 3김의 행동과 역할은 정국기류 변화의 중요한 변수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이한 것은 사태 자체가 지극히 복잡한 데다가 각 정파의 이해가 분명하게 구획되기 힘든 구조 때문에 누구도 이니셔티브를 잡기 어려운 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3김은 공멸할 수도 있다는 현실상황이 강하게 깔려가고 있기 때문에 3김의 피차공격은 자율적인 절제를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YS가 궁지에 몰려있으나 아직은 DJ도 JP도 그 대안으로 선택될 수 있는 대세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사 두 야당세력이 이니셔티브를 잡는다 해도 새로운 권력주식회사의 총회장으로 DJ나 JP가 된다는 것은 본인들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또다른 대세의 흐름, 3김시대청산에는 정략적 차원이 아닌 시대적 의미가 깔려있었으며 YS의 실패는 YS만의 실패가 아니라 3김의 실패라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었다.
DJ가 4월초의 영수회담을 앞두고 ‘초당적 경제난국타개’를 내놓은 것이나 JP가 곧이어 내각제 개헌문제를 영수회담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깃발을 흔든 것은 각기 정치주주권 행사를 확보하는 일방 3김 공멸을 방지하기 위한 베팅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YS에 대한 DJ의 협력신호로도 보여지는 ‘경제난국타개 여야협력’을 놓고 ‘들판’의 이야깃꾼들은 다른 분석들도 했다.
YS와 DJ는 YS집권 이후 피차 아킬레스 건은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것이 한보사태로 깨졌다는 것이다. 바로 아들들의 문제이다. 아들문제만은 서로 피하기로 굳은 약속을 했는데 한보사태가 터지고 현철씨 문제가 등장했다. 그리고 검찰은 DJ의 핵심측근인 권노갑의원을 구속했다. 권노갑의 구속은 바로 DJ의 아들 김홍일의원에 대한 압력이며, 김홍일도 정태수의 정치자금 연루자 리스트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신호라는 것이다.
정적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무기를 제공했음에도 한보사태 발생이후 DJ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김현철 개인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는 인상을 보여왔으며, 그가 겨냥한 것은 92년 대선자금이었다. 6백억원의 정치자금을 YS가 정태수로부터 지원받은 것이 바로 한보특혜의 뿌리이며 5조원을 은행으로부터 풀어놓게 한 연결고리라는 주장이었다. 그는 곧바로 YS를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는 한편 하나의 우산을 펼쳤다. ‘경제타개 협력’이다. 그 우산 속에 YS를 넣어 놓고 'DJ의 그늘‘을 만들어 보자는 계산이었다. 물론 그는 보수화된 사회체질이 자신의 강경 일변도 이미지에 거부반응을 일으켜 왔던 것도 이 해법을 통해 불식시켜 보자는 계산도 융합시켰다. 도량 있는 야당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이상보다는 현실을 수용하는 보수적 입장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DJ는 공식회견이 있기 전날 각 언론사의 경제부장들을 저녁식사에 초대, 자신의 경제관을 이렇게 피력했다.
"오늘의 사태는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무시하고 지배했던 데 그 원인이 있다. 금융실명제는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이어야 한다. 과거나 캐고 사정의 수단으로 이용해선 안된다. 경제라는 것은 충격을 줘서는 안되며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탈리아는 지하경제가 경제규모의 3분의1이나 된다고 하는데도 G7국가 안에서도 계속 상승세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경제정책은 미래지향적이고 점진적이어야 한다.
재벌이 밉다고 갑자기 규제하면 나라경제가 감당을 못한다. 재벌은 독과점과 공정거래 차원에서만 다스리고 다른 것은 다 풀어주어야 한다. 경쟁력을 회복시키는 한 방안으로 땅 값을 내리는 방법이 있다. 토지공급을 늘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린벨트를 과감히 풀어야 한다. 산이 국토의 70%인 나라에서 녹지확보 때문에 그린벨트를 계속 묶어 놓는 것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돼야 한다."
그의 ’민중경제론‘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우울한 경제지표들은 이날도 계속되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월중의 전국어음부도율은 0.24%로 장영자 어음사건이 있었던 82년 5월 이후 최악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97년 들어 2개월 동안의 경상적자 누계는 55억달러로 집계되었다. 실업자수는 97년 들어 두달동안 18만3천명이 늘어 사상 최고치인 66만2천명에 달했고 실업율도 최근 3년이래 최고인 3.2%를 기록했다.
서울의 봄바람이 황사를 일으키고 있을 때 필리핀에서 태풍의 핵이 또하나 자라나고 있었다. 황장엽이었다. 그것을 예고한 사람은 전안기부 차장 출신 정형근 의원이었다. 3월 27일 천안 신한국당 연수원에서 열린 의원 및 지구당위원장 연찬회 비공개회의에서 당 정세분석위원장이기도 한 정형근은 “황장엽북한노동당비서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황장엽리스트’가 나올 수 있다. 이 리스트는 그 내용에 따라 엄청난 잠재적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고했다.
주로 북측이 파악하고 있는 친북세력의 명단을 의미하는 ‘황장엽리스트’가 등장하는 경우 국면은 완전히 전환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분석 전망했다. 그는 “야권은 황비서가 국내에 들어오면 국내흐름이 안보정국으로 바뀌어 야당에게는 심대한 타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조마조마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공안정국의 재연이다.
조선일보는 한보사건을 밀어내고 3월29일자 1면 톱에 이 내용을 올렸다. 정부는 즉각 ‘황장엽리스트’의 존재여부에 대해 부인하고 나섰지만 분명 태풍의 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더욱이 정국의 이니셔티브를 상실하고 있는 집권세력으로 볼 때는 이같은 ’자연발생적 호재‘는 달리 없다. 그러나 과연 호재로만 작용할 것인가.
시대상황이 달라지고 국민의 분별안목은 수많은 과거의 경험을 통하여 이른바 공안정국과 지배권력의 정치공작을 판별할만큼 높아져 있다. 동아일보는 ’태풍경보’로 긴장감을 높이는 조선일보의 보도방식을 피하면서 해설면을 통해 ‘황장엽리스트의 판독법’을 독자에게 제공했다. <김대통령 권력누수차단 가상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로 읽어낸 ’황장엽리스트 분석‘은 이러했다.
황장엽 북한노동당비서가 갖고 있다는 국내 친북세력에 관한 정보, 이른바 ‘황장엽리스트‘의 파괴력은 섣불리 가늠하기가 힘들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보사태 및 김현철씨문제 등을 일거에 덮어버리고 정국상황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도 있다. 청와대측은 현재 ’황장엽리스트‘의 존재여부에 대해 단호하게 “없다”고 부인한다. “황씨가 북경에 머무는 동안 구체적인 사실에 관해 심문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그런 리스트가 존재할 수 없다. ’황장엽리스트‘는 추측의 산물일 뿐”이라는 게 청와대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실제 청와대측이 황씨의 입국을 정략적 카드로 활용하려는 구체적인 흔적도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 상황일 뿐이다. 현재 ’황장엽 리스트‘가 있건 없건 황씨가 국내로 들어올 경우 그의 ’입‘에 쏠리는 관심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안기부 1차장출신인 신한국당의 정형근 정세분석위원장이 지구당위원장 연찬회에서 ’황장엽리스트의 정국전환 카드로서의 폭발력’에 관해 언급한 것도 바로 이같은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색깔론’에 시달려 온 국민회의 김대중총재측이 이른바 ‘황풍’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황씨의 입국시기(4월중순경) 자체가 한보청문회의 막바지 국면과 겹친다는 점도 정국상황에 미치는 영향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정부당국은 물론 ‘황씨의 입국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비판을 의식, 여러 방안을 검토중이다. 황씨의 입국 이후 얼마간은 기자회견 등을 하지 않고 전문가나 각계 원로 등과의 대담형식으로 북한정보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낸다는 방침이다. 청와대 내에서도 ”차라리 현철씨의 증언이후 서울로 오도록 해 의혹을 사전 차단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황씨의 ‘서울 언행’은 정부당국의 의도가 어떻든 정략적 카드의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다. 김영삼대통령이 ‘황장엽 카드’로 공안정국을 조성, 잃은 파워를 회복하고 남은 임기동안 정국을 주도할 것이란 시나리오가 나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황장엽 카드’는 ‘양날의 칼’이라는 지적이 있다. 물론 ’기관의 통제‘가 작용하겠지만 반드시 여당에 유리하고 야당에 불리한 카드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미 보도된대로 ’권력 깊숙한 곳에 친북세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여권이 뒤집힐 수도 있다. 정부의 한 기관 관계자는 ”황씨가 서울에서 무슨 얘기를 할 지 모르나 그 성격은 야당뿐 아니라 여당도 다칠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즉 YS가 이 카드를 쓴다면 자신도 다칠 수 있다. 그러나 YS는 손을 베는 정도의 상처를 입겠지만 상대는 목이 날아간다. 그런 점에서 YS에게 ’황장엽 카드‘는 힘을 되찾고 정국을 주도하는데 매우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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