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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기업과 정치인이 은행을 어떻게 털어먹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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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기업과 정치인이 은행을 어떻게 털어먹었나

<손광식의 '1997 비망록'> (8) 홍인길과 정태수

***8. 홍인길과 정태수**

한보사태와 김현철 게이트는 각기 방향을 달리 잡고 있는 흐름이었다. 한보 재판에서도 김현철의 관계를 유추해 낼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제공되지 않았다. 검찰 심문을 통해 드러난 이 사건의 '전개'는 이러했다.

90년 어느날 김명윤씨(신한국당 고문)는 상도동의 '집사' 홍인길에게 재계의 한 인물을 소개한다. 정태수 당시 한보회장이다. 당시 변호사였던 김명윤씨는 같은 아파트에 살며 한보그룹 경영에 대해 법률문제를 자문해줘 정 회장과는 가까운 사이였다. 정 회장은 홍 의원이 장차 정계에 진출할 것이라는 데 관심을 가졌고, 홍 의원은 장차 국회의원이 되면 재력있는 기업가와 연줄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자연 두 사람은 피차가 관심인물이 된다.

정 회장은 휴가때나 추석, 구정 등 '날'이 되면 수백만원 정도의 용돈을 자연스럽게 홍씨에게 전해 주곤 했다. 두 사람이 권력과 금력을 바터하는 묵시적 계약관계에 들어간 것은 93년 12월. 홍씨는 당시 청와대 총무수석으로 신분이 바뀌어 있었다.

홍씨는 정씨에게 지금은 YS를 직접 보필하고 있으나 장차 15대 총선에 출마하여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의 포부를 정 회장에게 말한다. 그는 국회의원이 아직 되지는 않았지만 당선만 되면 대우가 12가지나 달라진다는 얘기까지 하면서 선배정치인으로 YS의 오른팔격이었던 김동영 의원(작고)에게 그 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

정 회장은 예의 확 터진 목소리로 자신의 사업만 도와주면 출마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정 회장은 이 묵계에 따라 그에게 첫 번째 지원을 제시한다. 94년 12월 서울 프라자 호텔로 홍씨를 불러 점심을 같이 하면서 외환은행에 신청한 외환시설자금이 성사되도록 부탁한다.

정 회장은 당시 전 외환은행장이었던 김재기씨를 통해 이 은행에 외화대출을 부탁했으나 융자거절을 당한 바 있었다. 홍씨는 청와대로 돌아와 장명선 외환은행장에게 한보철강 건을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청탁을 한다. 외환은행은 12월 24일 미화 2억7천만달러(한화 2천2백70억원)를 한보철강에 대출했다.

두 사람은 '건'이 성사되자 곧(95년1월) 프라자호텔에서 다시 만난다. 정 회장은 이때 자신의 기사인 임상래씨를 시켜 과일상자에 넣은 현금 2억원을 홍씨의 자동차 트렁크에 싣도록 한다. 대출 청탁이 성사된 데 따른 대가성 뇌물이다.

그러나 한보철강의 금융지원 사정은 원활치가 못했다. 특히 시설자금을 지원해 온 산업은행이 빡빡해진 것이다. 정태수 회장은 우선 산업은행 김시형 총재에 대한 압력 강도를 높이기 위해 신한국당의 중진급을 동원키로 하고 그 전부터 교분이 있는 정재철 의원과 김시형 총재를 예방, 지원을 요청한다.

2억원을 준 후 5개월이 지난 6월 정회장은 홍씨와 프라자 호텔에서 다시 만난다. 정 회장은 홍씨에게 김시형 산은총재에게 압력을 넣어 달라고 부탁한다. 청와대로 돌아온 홍씨는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이던 한이헌씨에게 "허허벌판에 말뚝 꼽았을 때는 돈 주고 공장 다 지어가니 돈 안주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고 정 회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풀어 놓고 김 총재에게 시설자금 융자 압력을 넣어달라고 한다. 이후 산업은행의 한보에 대한 융자창구는 다시 열려 시설자금 2천7백억원이 풀려 나간다.

그러나 5개월 후 다시 자금사정은 악화된다. 정태수 회장이 노태우전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것이다. 그러자 정 회장의 셋째 아들이자 한보그룹 회장인 정보근씨는 청와대로 홍인길씨를 찾아갔다. 정보근 회장으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은 홍씨는 다시 한이헌 수석에게 한보의 자금지원을 요청하면서 정보근 회장을 만나 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당시 제일은행장인 이철수씨에게 전화를 걸어 야단을 쳤다. 이철수 행장은 다시 융자를 재개해 2천억원 정도를 지원한다.

96년 2월 홍씨는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두 은행에 대한 대출청탁이 이루어진 대가로 2억원이 든 과일상자를 받았으며 한달 뒤에 다시 2억원이 든 과일상자를 받았다. 물론 이철수 행장에게도 융자가 될 때마다 '과일상자'를 선물한다. 이 행장이 받은 돈은 합계 7억원.

자금사정은 그래도 풀리지 않았으며 특히 산업은행이 껄끄러웠다. 김시형 총재는 비금융인이기 때문에 '비선회로'에 대해 덜 민감했을 뿐더러 전임 이형구 총재가 대출 비리로 구속되었던 전례가 있었던지라 거액대출에는 소심하다 싶으리만치 민감했다.

그래서 정 회장은 이번에는 조승만 증권거래소 고문을 동원한다. 조 고문은 상도동 시절부터 YS와 친분관계가 두터운 인물. 그런데다 그는 김 총재의 고교(서울고) 선배인 홍인기 증권거래소 이사장을 대동하고 김 총재를 만나 한보건을 부탁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산은 창구는 잘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해 7월 역시 같은 방법으로 홍 의원(4. 11총선에서 당선)에게 정 회장은 2억원을 주고 대출지원을 해 줄 것을 요청한다.

두 사람은 96년 12월께 하얏트 호텔에서 다시 만났는데 이번에는 조흥은행에 압력을 넣기로 한다. 홍 의원은 개각으로 새 경제수석비서관이 된 이석채씨에게 우찬목 조흥은행장에게 대출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 조흥은행은 12월3일 한보철강에 대해 어음대출 5백억원, 지급보증 5백억원 등 1천억원을 지원한다.

그러나 한보의 자금사정은 워낙 구멍이 큰 상태였으므로 홍 의원은 정지태 상업은행장에게도 대출협조 압력을 넣는다. 상업은행은 장영자 사건 이후 자구노력 중에 있어 여의치 못하다는 이유로 이 압력을 회피한다. 그러나 조흥은행 '건'이 성사되었으므로 홍 의원은 예의 방법으로 또 2억원을 받았고 다시 이석채 경제수석에게 은행공동지원을 요청한다. 이석채 수석은 제일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조흥은행등 4개 은행 공동 협의여신 형태로 1천2백억원을 지원케 한다. 정 회장은 신광식ㆍ우찬목 두행장에게도 식사대접과 '과일상자'를 두 차례에 걸쳐 각각 4억원을 건넨다.

한편 상업은행 건에 대해서는 황병태 원을 동원했다. 워낙 거물급이 동원되고 있는지라 상업은행은 5백억원짜리 지급보증으로 '성의표시'를 한다. 정 장은 이 지원에 대한 대가로 지급보증을 받은지 한달 후인 12월 서울 인터콘티넨탈 일식당 미야마에서 2억원이 든 과일상자를 황 원에게 전한다.

황 원과 산은의 김 재가 같은 예천 출신임을 알고 있었던 정 장은 기왕 거래가 이루어졌으므로 이번에는 산업은행에서 시설자금 3천억원만 지원토록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산업은행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부지런히 황 원에게도 연락을 했으나 오리무중.

한편 정계에 대한 로비는 이러했다.

93년 3월 정태수 장은 예의 하얏트 호텔에서 DJ의 오른팔 격인 권노갑 원을 만난다. 당시 한보철강은 당진제철소 부지조성용 1단계 공사를 진행중인 때였다. 권 의원을 소개한 사람은 신한국당의 중진 정재철 의원. 이날 권의원을 정 회장이 만난 것은 92년도 국정감사에서 야당으로부터 한보그룹에 대한 추궁이 집중되어 사업추진에 많은 걸림돌이 발생하여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정 회장은 저녁 회식이 끝난 후 5천만원이 든 가방을 권 의원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권 의원은 들고 나갔던 가방을 다시 돌아와 정 회장에게 주고 가버린다. 권 의원의 얼굴을 잘 아는 호텔보이에게 문제의 가방이 목격된 것이다. 권 의원은 호텔을 떠난 지 얼마 안되어 다시 전화를 걸고 두 사람은 장충동 국립중앙극장 안에서 만나 가방을 주고받는다. 이때부터 정 회장은 권 의원을 야당에 대한 로비창구로 활용한다.

첫 거래가 있은 지 9개월 후인 그 해 12월 롯데월드 호텔에서 정 회장은 권 의원을 다시 만난다. 이번에도 5천만원이 들어있는 가방을 권 의원에게 전달한다. 정재철 의원과의 '거래'는 95년 10월. 역시 하얏트 호텔에서 정 의원을 만나 1억원을 준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민회의의 박태영 의원이 제일은행에 대해 한보자료를 요구하는 등 국회쪽 기류가 심상치 않아 손을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6개월전 정 의원이 김시형 산은총재를 하얏트로 불러내어 한보지원을 요청해 준 일도 있고 해서 돈을 준 것이다. 그 뒤 국회에서 한보문제는 별 탈이 없이 넘어간다.

다시 1년 뒤 국정감사 시기가 돌아오자 국민회의쪽에서 4명의 의원이 한보문제를 걸고 나온다. 정 회장은 한보의 이용남 사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소위 '4인방'이라고 하는 관련 의원들이 완강한 반응이어서 실패한다. 다시 정재철 의원을 동원한다. 정재철 의원에게 '4인방'의 이름을 적어주고 아무래도 이 문제는 권노갑 의원이 풀 수밖에 없으니 그에게 전해달라고 1억원이 든 골프용가방을 건네준다. 정 의원은 그것을 다시 권노갑 의원에게 전한다.

최초로 객관화된 한보사건의 진상이었지만 그것을 사건의 전모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스로 '깃털'이라 불렀던 홍인길이 거의 '몸통'구실을 한 것으로 드러난 검찰 조사는 그동안 요구되어 온 한보사태의 부조리와 권력부패의 구조를 어떤 대목에서도 보여주지 못했다.

가령 A그룹이든 B그룹이든 혹은 C그룹이든 예의 하얏트호텔에서, 프라자 호텔에서 혹은 제3의 장소에서 '권력자'나 은행장을 대상으로 한 로비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 은행 커넥션의 숨은 그림이라고 볼 때 태풍처럼 일어났던 한보사건은 이미 그 특수한 성격을 멀리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은행대출을 돈 안주고 하는 재벌은 없다. 하지만 법의 집행은 제약을 받는다. 공판 자체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권력의 하부구조인 검찰의 현실적 선택이라든가 혹은 구조적인 부패의 틀은 결국 국회에서 해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므로 정치권으로 공을 넘긴다는 게 사법처리의 방향이었다.

검찰은 홍인길을 대상으로 이른바 '깃털론'을 추궁했지만 그것은 "내 자신의 위치를 낮추어 말하곤 했던 입버릇일 뿐"이라는 피고의 답을 들었을 뿐이다. 아니 그것으로 해석하기로 조율한 것이 보다 정확한 진실일 것이다. 한이헌ㆍ이석채 등 은행압력을 행사했던 권력의 제도권 라인의 행위도, 위법사유도, 언급되지 않았다.

검찰의 기소 가운데는 이미 정치와 권력이라는 요소가 작용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치적인 '선'이 법전 위에 그어진 것이다. 공판 다음날 여론을 의식했음인지 고건 총리는 국무회의 석상에서 최상엽 법무부장관에게 국민들의 의혹을 불식시킬 수 있도록 엄정하고 철저한 수사노력을 기울이고 이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검찰의 수사팀 전면교체 및 보강을 위한 검찰의 내부정리가 뒤따를 것이라는 탐색보도들이 있었으나 결과는 두고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국회는 이날로 임시국회가 폐기됨에 따라 다급히 한보사태 국정조사 계획서를 의결했다. 김현철의 증인채택과 TV생중계도 합의된 계획서였다.

이런 와중에서 황장엽 북한노동당 비서는 북경을 떠나 필리핀으로 신병이 옮겨졌다. 조선일보는 급박한 북한의 식량난 등을 언급한 김정일의 비밀연설문의 원본을 1면 통단으로 보도했다. 96년 12월7일 평양에서 행한 이 연설문은 월간조선 4월호에 게재한 것을 전재한 것인데 주요내용은 이러했다.

"식량문제로 하여 무정부상태가 조성되고 있는데도 당 일꾼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당 일꾼들이 지금처럼 일하면 해방 직후에 일어났던 신의주학생사건과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담보(보장)할 수 없다.

지금 어디에나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로 차 넘치고 있으며 인민군대에도 식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 군량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 미 제국주의자들이 당장 쳐들어 올 것이다. 군량미를 보장하기 위한 결정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길가에 쭉 늘어서고 역전과 열차에 혼잡을 이루고 있다. 어디에 가나 가슴 아픈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당 일꾼들은 머리도 내밀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 도와주는 일꾼 없이 단신으로 일하고 있다. 내가 경제실무까지 맡아보면 혁명에 돌이킬 수 없는 후과(결과)를 미칠 수 있다. 오늘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는 군대를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자주 인민군대를 현지지도하고 있다. 수령님 3년상도 치르기 전에 간부들을 뗐다 붙였다하기도 곤란하지만 오늘처럼 엄혹한 시련의 시기에 팔짱만 끼고 앉아 있는 일꾼들은 앞으로 계산하여야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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