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5억5천만달러 대북 밀송금설'을 주장하는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들의 보도태도를 보면, '정치논리'의 맹목(盲目)과 한계를 또다시 곳곳에서 목격하게 된다.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5억5천만달러라는 거금이 은행 창구에서 기업을 거쳐 달러화로 환전돼 해외로 빠져나가야 성립되는 것이 이른바 대북 송금설이다. 따라서 대북 송금설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선 감정과 이해관계가 개입된 정치논리적 접근 대신 경제적 관점에서의 냉철한 접근이 필요하다.
아울러 거창한 경제적 접근방식은 차치하더라도 초등학교 수준의 최소한의 합리성이라도 갖고서 이번 의혹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현재 한나라당이 제기한 의혹의 허점 가운데에는 초등학생이 물어도 답하기 힘든 엉성함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맹목성이 초래한 결과다.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정치논리의 맹목성을 알아본다.
***맹점 1. 석달후 갚아야 할 초단기부채인 당좌대월로 북한에 돈을 보냈다?**
현대상선은 2000년 6월7일 산업은행으로부터 당좌대월 4천억원, 6월29일 산업운영자금 9백억원을 긴급지원받았다. 한나라당은 이 돈이 해외의 북한계좌로 보내져 북한으로 밀송금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4천억원이 '당좌대월' 형태로 지원됐다는 사실이다.
당좌대월이란 현금을 빌려주는 대출방식이 아니다. 4천억원 한도내에서 수표를 발행할 권한을 현대상선에 부여한 것이다. 현대상선이 발행한 어음의 만기가 도래할 때 산은이 이를 갚아주는 장치다.
따라서 현대상선이 4천억원을 현금으로 찾아 북한으로 송금하기 위해선 곧바로 현대상선 이름으로 수표를 발행해 산은에게 돈을 받아 이를 송금해야 했다. 한나라당 주장처럼 6월15일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북한에 돈을 보내기 위해서였다면 6월7일이라는 정상회담 일주일 전의 급박한 시기에, 뭣하려 이처럼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는 당좌대월 방식을 택했단 말인가. 곧바로 시설자금이나 운용자금 명목의 현금을 지원하면 됐을 일을 말이다.
김충식 현대상선 당시 사장은 산은에서 4천억원의 당좌대월이 지원된 지 보름여 뒤인 2000년 7월3일자 대한매일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4천4백억원의 당좌대월을 확보하고 있어 만기가 도래할 2천여억원대의 기업어음(CP) 등의 상환요구가 들어와도 충분히 견딜 수 있다"며 세간의 현대상선 유동성 위기설을 부인했다. 김 사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현대상선이 산은의 4천억원 당좌대월을 당시까지 현금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더욱이 당좌대월은 곧바로 갚아야 하는 초단기 대출이다. 산은은 당시 당좌대월 지원을 하면서 현대상선에게 석달후 상환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경제적 상식에서 생각해보면, 정부가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현대상선에 4천억원의 당좌대월을 대북 밀송금용으로 지원하면서 석달후 현대상선에게 이를 대신 갚으라는 주문을 할 수 있을까. 정말 대북 송금용이었다면 몇년후 갚아도 되는 장기성 시설자금이나 운영자금을 지원하는 게 상식이 아닐까.
당좌대월이 대북 밀송금용으로 도용됐는지 여부는 당시 현대상선의 대차대조표만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언제 얼마나 기업어음(CP) 상환요구가 돌아왔고, 현대상선이 과연 당좌대월을 이용해 이를 갚았는지 여부만 확인해보면 금방 진위가 드러날 일이기 때문이다.
***맹점 2: 조선일보의 아이러니컬한 "대북송금설은 허구" 보도**
조선일보 27일자는 "현대상선 산은대출금 4억달러, 현대아산에 유입 확인"이라는 제목의 톱기사를 통해 한나라당 주장이 사실이라는 뉘앙스를 주는 미묘한 보도를 했다. 조선일보는 그 근거로 현대상선이 현대아산 증자과정에 참여한 대목을 들었다.
"현대상선은 당시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도 2000년 5월26일 현대아산에 증자 참여를 통해 5백60억원을 지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현대상선은 형제간의 '왕자의 난' 이후 금융기관들이 4천여억원의 자금을 일시 회수하는 바람에 부도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다.
금융권의 관계자는 '부도 위기에 몰린 회사가 다른 계열사에 5백60억원의 현금을 지원했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라며 '산업은행에서 대출약속을 미리 받고 자금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결국 현대상선은 산업은행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5백60억원을 현대아산에 지원했고, 이후 부족한 운영자금을 산은에서 지원받아 메웠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이 보도의 '팩트'는 맞다. 현대상선은 분명 2000년 5월26일 현대아산의 1천4백억원 증자에 5백60억원을 냈다.
그러나 현대상선만 낸 게 아니라 다른 현대 계열사들도 그룹지시에 따라 강제로 출자를 해야 했다. 98년 11월 금강산관광 시작 이래 계속된 적자로 현대아산의 자본금 4천억원이 모두 소진돼 부도 직전의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당시 시장의 거센 자금회수로 동반 몰락위기에 몰리면서도 현대아산에 생돈을 강제 출자해야 했던 현대 계열사들이 한결같이 터뜨린 불만은 "왜 우리가 모든 짐을 떠맡아야 하느냐"라는 대정부 불만이었다.
당시 현대아산의 돈줄 역할을 맡았던 현대상선의 김충식 사장을 비롯한 대다수 계열사 사장들은 "금강산 관광사업의 최대 수혜자는 김대중 정부다. 그런데 이 사업 때문에 현대가 위기에 봉착했는데도 정부는 적자 보전 차원에서 요청한 선상 카지노 사업도 허가해주지 않고 남북경협자금으로 도와주지도 않고 우리보고 모든 돈을 책임지라고 하니 해도 너무 하는 게 아니냐"고 강력 반발했었다.
조선일보 보도는 제목만 보면 한나라당의 4억달러 송금설이 사실임을 뒷받침해주는 인상이 짙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대목은 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당시 현대상선이 얼마나 심각한 부도위기에 직면해 있었으며 따라서 산은이 현대상선이 지원해준 돈은 대북 송금용이 아니라 부도 방지용으로 사용됐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요컨대 조선일보 보도는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한나라당 주장의 4억달러 송금설이 허구임을 입증해주는 보도라 하겠다.
***일부 언론의 '맹목성', 사태 더욱 혼미하게 만들어**
이밖에도 과연 현대상선과 현대건설이 5억5천만달러라는 거금을 국내에서 '흔적없이' 환전해 해외로 보내 북한에 송금할 수 있었는가 등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납득이 안 가는 대목이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해서 대북 송금설이 완전한 허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느냐 하면 반드시 그것도 아니다.
한나라당이 폭로한 일련의 대북 송금설 근거자료 가운데 정작 주목해야 할 대목은 국회 문화관광위 국감에서 권오을 의원이 제기한 '관광공사 이사회 회의록'이라는 경제전문가들의 대체적 지적이다.
권 의원이 공개한 지난 20001년 7월31일과 10월25일 관광공사 이사회 회의록에는 의장인 조홍규 관광공사 사장이 "현대에서 지금 1조원까지 투자했다고 주장하시는데 기투자분을 어떻게 규정지으려고 하는가"라고 질문한 내용과 "현대에서 1조원 정도 시설투자를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권 의원은 "한국관광공사와 현대아산이 공동참여에 합의한 지난해 6월말 현대아산은 부두시설, 온천장 등 금강산 관광에 투자한 금액을 5천8백32억원이라고 밝혔으나 지난해와 올해 관광공사 이사회 회의록에는 1조원 이상 투자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며 대북 밀송금 의혹을 제기했다.
모그룹의 구조조정본부장은 이와 관련, "한나라당이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정부가 유동성위기에 직면한 현대상선을 통해 당좌대월을 일으켜 4억달러를 지원해준 대가로 남북정상회담을 열었다는 주장은 재계의 상식으론 공감이 안가는 주장"이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권과의 거래시 수반되는 뒷거래 가능성까지도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재계에서는 민주당 전 의원인 조흥규 사장이 재직중인 관광공사 이사회 회의록에 기록돼 있는 1조원이라는 숫자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아마도 현대가 북한에 뒷돈을 주었다면 그 시기는 남북정상회담 때가 아니라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던 98년 11월 전후 시기가 아닐까라고 추정하고 있다"는 재계의 시각을 전했다.
대북 송금설은 이제 정치권의 사활이 걸린 최대현안이 됐다. 명백한 진상규명이 불가피한 사안이다. 하지만 진상규명을 위한 접근방식은 정파의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논리여서는 안된다. 냉철한 경제적 관점의 규명노력이 담보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진상규명의 사회적 책임이 있는 일부언론의 '맹목성'은 사태를 더욱 혼미하게 만드는 해악적 기능을 하고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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