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그 뿌리를 명확히 밝혀, 일제에 항거한 임시정부가 한국의 출발점임을 강조하고 있다. '3.1운동-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이어진 국가의 정체성 성립 과정을 헌법 전문이 뚜렷이 밝혔다.
한때 극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의 뿌리를 이승만 정부에서 찾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음에도 국민 여론이 그 같은 주장에 흔들리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데 헌법 전문의 이 같은 내용이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지적이 역사학계 일부에서 나온다. 전문에서 평가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상하이 임시정부'인지, 같은 해 9월 11일 상하이에서 확대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통합임시정부)'를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엄밀히 말해 1919년 4월 만들어진 상하이 임시정부를 뿌리로 보는 듯하다. 근거가 있다.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올해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추진하려 했다. 4월 11일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일로 알려졌다. 즉, 통합임시정부 수립일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었고, 이들이 일제를 상대로 무장 투쟁을 조직하는 한편 세계 만방에 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전하면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간단한 서사로 과거를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이 서사에서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는 엄밀히 말해 통합임시정부여야 한다.
통합임시정부 수립 전 한국의 임시정부는 약 6개가 있었다. 이처럼 곳곳에 산재했던 임시정부 역량을 한데 모아 상하이에 그 거점을 확고히 한 정부가 통합임시정부다. 따라서 이 논리에 따르면 올해 임시공휴일 지정을 추진했어야 하는 날은 4월 11일이 아니라 9월이어야 한다. 4월 11일은 '여러 임시정부 중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만의 수립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지적이다. <프레시안>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간 여론이 깊이 주목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논할 가치가 크다 여겨지는 반 교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반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반 교수는 최근 저서 <통합임시정부와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신서원 펴냄)에서 통합임시정부의 수립 과정과 이 정부 건립에 영향을 미친 주요 독립운동가 세 명의 행적과 입장을 조명했다. 책에서 반 교수는 통합임시정부 수립 과정을 세세히 짚어야 우리 역사 인식이 재정리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사를 상하이 임시정부만을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당시 선조들의 활발했던 독립운동 움직임을 오히려 축소·왜곡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반 교수는 아울러 역사학계의 주류적 입장인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일 4월 11일설' 역시 반박하고 나섰다.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주장에 반발하는 움직임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앞서 살핀 임시정부의 적통성에 관한 문제 제기이고, 다른 하나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4월 11일로 바꿀 것이 아니라 4월 13일로 두어야한다'는 지적이다. 반 교수는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은 9월의 하루로 정하는 게 최선이나, 굳이 4월로 두자면 4월 11일보다 4월 13일로 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4월 11일은 사실상 임시정부 헌법 제정 기념일이고, 4월 13일이야말로 대내외적으로 정부수립을 공포한 날인 만큼, 4월 13일이 임시정부수립기념일로 더 정확하다'는 게 반 교수의 주장이다. 1989년 이후 한국은 4월 13일을 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해 왔다.
즉, 반 교수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일은 1919년 4월 13일로 봐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정부의 정통성은 1919년 4월 13일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가 아니라, 같은 해 9월 설립된 통합임시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반 교수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임시정부의 역할은 물론 한계도 짚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가 오직 임시정부만을 중심으로 항일 역사를 바라보려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임시정부 바깥의 독립운동, 즉 중국과 러시아 등에서의 무장투쟁과 국내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노동자·농민 투쟁 등 다양한 주체들의 독립 운동 역사를 자칫 왜곡하거나 잊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다.
반 교수는 자신의 첫 논문 <대한국민의회의 성립과 조직, 1987년>을 시작으로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임시정부의 통합정부 수립운동, 1988> 등을 통해 지난 30여 년 간 임시정부의 수립 과정과 러시아 원동(극동), 북간도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을 연구했다. 박인규 프레시안협동조합 이사장이 진행한 반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전체 인터뷰를 두 편으로 나눠 싣는다. 다음은 두 번째 인터뷰 전문.
'임시정부법통론'보다 '3.1운동 정신 따르는' 헌법 필요
프레시안 : 3.1운동과 임시정부의 관계와 관련해 1948년 제헌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돼있는 데 비해 1987년 개정된 6공화국 헌법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했다. 이 부분은 광복군 출신인 고 김준엽 교수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관철된 것으로 알고 있다. 제헌헌법은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강조한 데 비해 87년 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강조한 셈이다. 반 교수는 이 같은 임정법통론은 문제가 있다는 입장인 듯하다.
반병률 : 그렇다. 앞서 살폈듯 제헌헌법은 '3.1운동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이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우리 민족의 여러 독립운동을 포괄할 근거를 가졌지만, 87년 헌법은 오직 임정만을 따를 것으로 국한해버렸다. 다른 운동은 전부 비주류화해 버릴 여지를 남겼다. 상하이 임정 법통론(임정법통론)에는 마치 장자계승 원칙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에 서열을 매기겠다는 전근대적 발상이 반영됐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게, 자칫 잘못하면 이승만 예찬론으로 오해될 수 있지만, 제헌헌법에 '3.1운동을 계승'한다는 구절이 이승만의 주장으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유가 있다. 이승만은 당시 상하이 임정인사들이 자신을 비판하거나 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할 경우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내세우곤 했다. 필요에 따라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행세하기도 했지만,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를 자임했다. 자신을 탄핵했던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시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상하이 임정이 헌법에 부각되지 않게끔 3.1운동을 전면에 세우게 됐다.
프레시안 : 관련해서 한문학자인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가 최근 <창비> 봄호('3.1운동, 한국 근현대사에서 다시 묻다')에 "필자가 보기에 3.1찬양론은 북의 존재를 배제하는 논리로 직진하는 지름길이 되고 있다"며 "말하자면 3.1에 근거한 남한정통론은 북조선을 부인하는 논리로 이용되어온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한 반 교수의 생각은?
반병률 : 공감한다. 이념적 갈등 문제로 인해 우리가 만주, 러시아 등지에서 일어난 항일무장투쟁과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 결과 독립운동을 왜곡해 인식했다.
다만, '3.1운동에 근거한 남한정통론'은 근거가 부족하다. 북한도 3.1운동을 인정한다. 일제 강점기에도 3.1운동 기념행사는 좌우파가 모두 했다. 해방 이후에도 서울은 물론 평양에서도 3.1운동 기념행사를 했다. 다만, 우리와 달리 나름의 혁명적 전통을 강조하는 북한에는 사회주의체제로서 지켜야 할 별도의 기념일들이 있다. 그리하여 북한에서는 3.1운동을 여러 독립운동 관련 기념일 중 하나로 기념하지만, 그 위상이 절대적이지 않다.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을 더 중요하게 본다. 정리하자면, 북한은 3.1운동은 인정하지만 임정은 인정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세력들은 일제 강점기에도 임정에 비판적이었다. 임정이 초기 통합임시정부 시기와 1940년대 좌우합작기를 제외하면 서구편향적이었고 활동도 그다지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하지 않았다. 이들은 상하이 임정이 전체적으로 자력(무장투쟁)보다는 외교(외세)에 의존하려 했고, 제국주의적 세계질서 한계에 대한 인식도 그렇게 투철하지 못하다는 시각을 가졌다.
3.1운동은 '혁명' 아니다
프레시안 :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를 혁명으로 인식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임형택 교수는 일제로부터의 해방, 봉건 전제로부터의 해방, 계급 해방 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봐야한다고 했다. 3.1운동은 혁명인가 아닌가?
반병률 : 학자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갈린다. 일반인이나 시민단체에서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 각자 선호하는 명칭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엄격한 사회과학적 의미에서 3.1운동은 '운동'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3.1운동이 최초의 거족적 운동이었다는 점, 이를 계기로 한반도 주민들이 자신의 주권의식을 갖게 되고 이를 만세시위를 통해 실천한 점, 공화주의적 의식이 확산된 점, 미래 한국을 근대 민족민주국가로 이행하자는 꿈을 공유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3.1운동이 과연 당시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와 맞서는 데도 철저했느냐는 의문이 있다.
프레시안 : 당시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세력 주류는 서구 제국주의의 아류인 일본이 나쁘다는 건 알았으나, 서구 제국주의가 문제의 근원임은 파악하지 못했다?
반병률 : 그렇다. 운동이 혁명이 되려면 반식민지, 반제 의식에 철저해야 한다. 3,1운동이 반일 측면에서는 철저했으나, 제국주의 질서를 꿰뚫어보지는 못했다. 당장 3.1운동의 목표가 (제국주의 열강이 주도한) 파리강화회의에의 호소였다. 열강의 도움을 받아 독립하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파리강화회의에 전혀 기대를 걸지 않는 세력도 있었다.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한인사회당세력 등이다. 이들은 소비에트혁명을 막기 위해 미국과 일본이 함께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병한 상황을 직접 현지에서 지켜봤다. 미국이 병력 7000여 명을 파병했고, 일본은 무려 7만여 명을 보냈다. 이때 미국 파병을 주도한 이가 3.1운동이 일어나게끔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준 '민족자결주의' 제창자 우드로 윌슨이다. 시베리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은 일찌감치 미국이나 일본이나 같은 제국주의 국가로서 '가재는 게 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런 제국주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민족지도자들은 1918년 1월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크게 고무돼 만세 시위의 형태로 조선 인민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다면 서구 열강이 조선의 독립을 허용하리라는 막연하고도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3월에서 5월의 3개월 사이에만 7500명 이상의 무고한 인명이 일제에 의해서 희생당했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고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우리가 3.1운동 과정에서 일제의 잔혹한 대량학살도 조명해야 하지만, 3.1운동을 기획한 이들이 국제 정세를 얼마나 정확하게 읽었느냐도 함께 봐야 한다. 거족적 만세 시위를 통해 조선인들이 각성한 것은 분명 커다란 수확이지만, 그 희생이 너무 컸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5.4운동이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데, 5.4운동은 이에 앞선 1915년 21개조문제가 대두된 이후에 시작된 운동이다. 5.4운동은 3.1운동에 비해 혁명성이 강했다. 우리와 달리 그들은 서구 열강의 침략성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중국은 1917년 미국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승전국이 됐다. 이에 따라 중국은 (비록 베이징 군벌 정부였으나)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런데도 중국은 같은 승전국이자 연합국인 일본이 당초 독일이 갖고 있던 대 중국 이권을 고스란히 넘겨받아야 한다는 일본의 주장이 채택되는 과정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열강의 이러한 배반적 결정 소식을 접한 중국인민이 떨쳐 일어선 것이 5.4운동이다. 중국은 이를 계기로 제국주의의 침략적 속성을 간파하고 이에 저항했다.
프레시안 : 5.4운동이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긴 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서구 열강에 의해 일본에 자국 이권을 빼앗겼음을,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 열강 모두 제국주의 세력이라는 점을 깨달은 중국 민중이 ‘우리를 침탈하는 원흉은 서구 열강’임을 명확히 자각했다는 데서 혁명성이 있다는 건가?
반병률 : 그렇다. 5.4운동은 명확히 반제 운동이다. 이후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반제 운동, 반식민지 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3.1운동이 쑨원이 얘기한 것처럼(1919년 7월 광저우에서 독립운동가 김창숙을 만난 쑨원은 "대저 10년이 못 되어 이 같은 대혁명이 일어난 예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드문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대단한 사건이었음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3.1운동이 중국에 대서특필되면서 중국 민중을 자극한 것도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5.4운동이 전적으로 3.1운동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보는 건 무리다.
운동은 미완성이다. 계속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구체적인 성과가 나왔을 때에 혁명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 소비에트혁명, 미국의 독립전쟁을 중요한 혁명으로 보는 이유다.
3.1운동은 아직 미완...냉전구도 극복해야
프레시안 : 그간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만이 3.1운동을 자극했다고 보는 것도 역시 남북한 이념 갈등으로 인한 편견이라 볼 수 있어 보인다. 소비에트혁명도 노령을 위시한 북쪽 지역의 항일무장투쟁을 자극했으니 말이다. 그 같은 측면에서 3.1운동은 근대적 민족의식의 발현 계기이기도 했으나,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를 가르는 분단의 계기이기도 했다.
관련해서 최근 일본 천주교계는 3.1운동 100주년 담화에서 '일제의 식민 통치가 남북 분단의 원인'이라고 반성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갈렸고, 1927년 신간회를 통해 좌우합작 운동을 벌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 등 외세에 의해 국토가 분단됐고 한국전쟁을 통해 민족 분단이 고착화됐다. 길게 보자면 좌우 분단과 대결은 해방 이전에도, 해방 이후에도 극복되지 못했다. 그 시작점이 일제의 식민 통치라는 얘기다. 1919년 3.1운동 이후 시작된 내부의 분단은 아직 치유되지 못했다.
이 같은 인식에서 미완의 과제인 3.1운동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과거 독립운동사를 어떻게 봐야 할지에 관해 말해 달라.
반병률 : 3.1운동 당시에 제시되었던 민족대단결과 민족자결의 과제는 여태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도 정부가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에게는 민족주의 계열 운동가보다 한 등급 낮은 서훈을 준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장을 받을 사람은 대통령장으로, 대통령장은 독립장으로 낮춘다. 그들이 한국이 분단되리라 생각하고 독립운동했겠나.
한국 학계는 일반적으로 민족 분열 책임을 사회주의 세력 등장으로 본다. 그건 아니지 않나. 운동이 다양화하고 발전한 것으로 봐야한다. 임정이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지휘부라면 모든 계열을 망라했어야 하지만 유감스럽게 그러지 못했다.
우리 임정의 포용력이 부족했던 데는 세대적 한계도 있었다. 나는 구한말부터 활동한 이들을 민족운동 1세대로, 3.1운동 이후 운동에 참여하고 성장한 이들을 민족운동 2세대로 본다. 1세대는 임정 초기 대통령, 국무총리, 총장 등 주요 간부에 오른 사람들이다.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노백린, 김규식, 유동열 등이다.
임정 당시 차장급을 구성했던 2세대는 청년세대로서 일본유학생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소비에트 정부에 우호적인 이, 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일제 강점이 이어진 후 청년기에 외국에서 선진 문물을 학습하고 새로운 바람에 눈을 일찌감치 뜬 이들이었다. 진취적이고 선진적인 사람들이었다. 1세대와 맞지 않았다.
임정 수뇌부 리더십은 이미 3.1운동 당시 역동적으로 쏟아진 여러 목소리를 받아들일 정도로 진취적이지 못했다. 예를 들어 서북지방의 평민 출신으로 젊은 인사들과 가까웠던 안창호는 '그래도 (임정의 대중 영향력을 얻기 위해) 기호지방의 양반 출신이 리더십을 잡아야 하지 않느냐'는 입장이었고, 이승만의 독선을 제재하지도 않았다. 이승만이 1925년 탄핵당한 후 차장급들이었던 신진 세력이 대거 총장급으로 승진했지만, 이미 임정이 동력을 잃은 후였다. 당시 사회 변화 조류의 한가운데 있던 젊은이들이 임정 초반부터 리더십을 가졌다면 더 포용적이고 진취적인 독립운동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프레시안 : 반 교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학자들이 많나?
반병률 : 사석에서는 젊은 학자들이 많이들 이야기한다. 다만 여전히 ‘임시정부파’가 주류다. 우리 독립운동사를 임정 중심, 백범 중심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촛불 혁명으로 부르기엔 부족
프레시안 : 2016~2017년의 촛불을 3.1운동을 완수하기 위한 혁명으로 이해하자는 움직임이 강하다. 예컨대 임형택 교수는 촛불 이후 남북관계가 급속한 화해로 접어든 점에 주목하여 촛불이 100년 분단을 해소하는 출발점이라는 인식을 보이고 있다. 이에는 동의하나?
반병률 : 촛불은 이제 첫발을 뗀 상황이라 아직 평가할 단계가 아니다. 긴 역사적 호흡으로 볼 때 촛불을 너무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나도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촛불을 참여인원의 규모나 제기된 이슈의 차원에서 3.1운동에 비교할 정도의 큰 사건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촛불이 3.1운동 당시 우리 국민이 보인 거국적 대단결, 자각 수준의 큰 힘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가 제시한 내용은 지금 보아도 매우 보편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심오한 가치들이다. 그에 비하면 촛불에서 제시한 안은 여전히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오래된 분단과 냉전 체제로 인해 지금 우리가 아직 3.1운동 수준의 의제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3.1운동과 임정에 대한 국민의 역사인식이 깊어지기 바란다고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당장 '임정'이라고 하면 대부분 국민이 '상하이 임정'만 떠올리는 게 현실이다. 관련해서 국민이 우리 근대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앞으로 통일 운동 등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연구자로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
반병률 : 안타깝지만 임시정부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학술대회가 별로 없는 게 현실이다. 3.1운동과 관련해 여전히 실증적으로 밝히고 따질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우리 사회에는 새로운 사실이나 다른 의견이 제시되면 이를참을성 있게 들어보려고 하지 않고 곧바로 진영논리로 해석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연구자들 역시 분발이 필요하다.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고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고 해석함으로써 역사인식의 폭과 깊이를 넓히려 노력해야 한다. 시민 역시 학자들의 주장과 해석을 내 편, 네 편의 편가르기식으로 보지 말고, 건전한 논쟁이 이어지게끔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3.1운동 당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논란과 관련해서도 더 차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최근 위임통치청원문제와 관련해 당시 이승만을 파리 대표로 선임한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장이었던 안창호나 임정의 파리강화회의 대표였던 김규식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연구가 나왔다. 인내심을 갖고 새로운 각도에서 논쟁하고 그 결과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여하튼 3.1운동 이후 이승만은 위임통치안을 제출한 이유로 절대독립론자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상하이 임정에서 (위임통치안을 지지한) 이승만을 적극 옹호한 이가 백범 김구다. 김구 선생이 이승만을 비판한 이들을 대거 공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구는 이승만과 더불어 해방 이후 5년간 4개국 신탁통치안은 반대한다. 둘의 입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3.1운동이 일어날 당시 국제연맹 위임통치론은 사실상 미국의 위임통치 옹호였다. 현실적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당장 벗어나기 힘드니 다른 제국주의 대리 통치를 받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었다. 이를 지지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1945년 12월의 신탁통치안은 달랐다. 당시 신탁통치안은 한국이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안이 포함된, 말 그대로 독립을 전제로 일정 기한을 정한 신탁통치였다. 4개국 어느 한 나라가 제국주의적 지배를 할 수 없는 안이었다.
프레시안 : 올해 3.1운동 남북기념행사가 성사되지 못했는데, 3.1운동 남북 공동 행사에 관해 제안할 만한 게 있나?
반병률 : 사료 교환, 공동 연구 조사, 답사 등의 방법이 있을 테고, 남북 공동 서훈 추서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당장 이념의 장벽을 남북이 넘어서기 어렵다면, 1948년 8월 15일 이전까지 활동은 좌우를 가리지 말고 동등하게 봐주는 게 어떨까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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