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손꼽히는 명연설 중 하나인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 조상들은 자유가 실현됨과 동시에 모든 인간은 천부적으로 평등하다는 원리가 충실하게 지켜지는 새로운 나라를 이 대륙에서 탄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대적으로 내전 상태에 휩싸인 채, 우리 조상들이 그토록 자유가 실현되길 바라면서, 그토록 소중한 원리가 충실히 지켜지길 원했던 국가가 얼마나 오랫동안 존립할 수 있을지 우려되는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네이버 지식백과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국민의 정부, 국민에 의한 정부, 국민을 위한 정부' <세계를 바꾼 연설과 선언>, 서해문집, 2006. 1. 15.)
전몰장병들의 의로운 죽음을 추모하고 그들이 죽음으로 지킨 대의를 살아남은 자들이 이어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링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결론으로 연설을 마무리 한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전쟁을 거쳐 탄생한 미국은 자유와 평등을 건국정신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존속하는 한 미국의 건국정신은 자기모순의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노예제도의 폐지와 국가의 통일을 둘러싸고 처절한 내전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미국의 건국정신은 한단계 진화하였다.
대한민국의 지난 백년도 건국정신과 가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대장정이었다. 미국이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겪으며 그들의 건국정신을 다져왔듯이 우리의 건국정신도 독립전쟁과 내전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 백년을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시대로 규정한다면 지나치게 외생적 변수를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닐까? 우리 민족의 주체적 대응을 중심에 놓고 역사의 흐름을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지난 백년은 수천 년에 걸친 전제군주제를 단절하고 국민이 주인되는 ‘민주공화국’을 이 땅에 건설하려는 노력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민주공화국의 건설과정과 그 내용이 현대사의 핵심주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입각해서, 지난 백년간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꼽는다면 1919년의 3.1독립운동, 1950년의 6.25전쟁, 1960년의 4.19혁명, 1980년의 광주항쟁, 그리고 1987년의 6월항쟁을 들 수 있다. 그렇다. 우리의 현대사도 전쟁과 내전, 혁명과 항쟁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한발 한발 실현시키는 과정이었다.
3.1독립운동으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우리 민족의 에너지가 폭발함으로써 이 땅에 최초로 공화국을 지향하는 정부, 즉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 출범하였다. 일본제국주의와 독립전쟁을 벌인 우리의 선조는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이 그 날 바로 꽃피운 것은 아니다. 그로부터 무려 39년간, 민주주의를 짓밟는 독재세력과의 지난한 투쟁을 거쳐 마침내 6월항쟁으로 민주공화정은 명실공히 이 땅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 장대한 과정을 관통하는 정신과 가치가 바로 우리의 건국정신이 되는 것이다.
"3.1운동의 거대한 파급력으로 출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초의 헌법인 '임시헌장'의 전문에서 3.1운동을 평화적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시민적 의거 곧 시민혁명으로 들고, 나아가 제1조로 다른 어느 나라 헌법에서도 찾기 어려운 민주공화주의를 천명하고 있으며, 평등과 자유의 가치를 드높이고 공민권을 명확히 선언한다. 주권재민과 사회경제적 자유권 및 권력분립의 이상을 담고 있다." (이상훈, '독립운동과 민주공화주의 이념' <시대와 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2년 겨울 제23권 4호, 210쪽)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과 그 헌법이 3.1독립정신과 그 역사적 산물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헌법의 계승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가장 확실하게 언명하고 있다. 그는 정부출범이 대한민국 수립으로부터 29년 만이라는 사실을 취임사에서 강조했다.
또 제헌헌법은 전문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을 밝힌다고 명확히 하고 있다.
3.1운동의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대한민국 국가수립의 헌법적 국가적 기본정신이 되었다. (서희경·박명림, '민주공화주의와 대한민국 헌법이념의 형성' <정신문화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년 봄호 제30권 제1호, 88쪽 )
1980년 5월 전두환이 이끄는 영남군벌의 잔혹한 시민학살로 일어난 광주항쟁에서 87년 6월항쟁에 이르는 80년대는 우리 민주주의 역사상 또 하나의 결정적인 시기에 속한다.
광주항쟁에서 광주시민은 민주화와 공동선이라는 양대가치를 놀랄만큼 실천하였다. 신진욱은 광주항쟁의 핵심가치를 '애국적 민주공화주의'라고 불렀다. (신진욱, '광주항쟁과 애국적 민주공화주의의 탄생: 저항적 시민사회의 정체성 구성에 대한 구조해석학적 분석' <한국사회학>, 한국사회학회, 2011년 제45집 2호, 84쪽 )
군부파시즘 세력의 잔혹한 탄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일으켰다. 지식인과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 2항)는 명제를 실현시키기 위해 목숨을 건 항쟁에 나섰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겠다는 가장 원초적인 민주적 요구를 전면에 내세웠다.
80년대의 시민항쟁은 정치적 독재로부터의 자유를 절규했고, 경제발전의 뒤안길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조차 거부당하는 노동자 등 기층민중들의 삶의 질곡에서 출발하였다. 6월항쟁을 통하여 독재권력의 고삐가 느슨해지자마자 전국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의 인권투쟁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황 전개였다. 자유의 쟁취는 곧 평등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질렀다.
1980년대 시민혁명이 자유와 평등을 핵심가치로 했다는 것은 임시정부가 3.1운동의 핵심가치를 자유와 평등으로 이해한 것과 견주어 볼 때 우리 현대사의 밑바닥에 흐르는 일관된 사상적 조류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자유와 평등에 더하여, 평화의 문제 또한 우리 민주공화주의의 중대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6.25 동족상잔의 잔혹함은 그 이전의 임진왜란이나 몽고 침입과는 차원이 다른 괴멸적 비극을 우리 사회에 남겼다. 민주공화정의 이상은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 철저히 왜곡되었다.
결론적으로 3.1운동에서 6월항쟁에 이르는 긴 세월 우리의 민주공화주의의 구체적 가치는 자유, 평등, 그리고 평화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이자 헌법정신이다. 이 가치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 우리의 당면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2017년 대선은 이 가치를 진전시키는 계기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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