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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은행장이 할 소리는 해야지"

전윤철 부총리의 금융관, 'IMF 금융신화'의 비결

한국금융의 크게 달라진 모습을 칭찬하는 국제금융계의 소리가 높다. 이와 함께 '관치(官治)'의 부활을 우려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민간은 잘 하고 있는데 아직 관료들이 문제라는 식의 시선이다. 일견 수긍이 가는 시선이다.

그러나 국가경제가 초토화된 지 4년여만에 세계금융개혁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애당초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관치경제의 영향력이 대단하던 사회에서는 말이다. 요컨대 이같은 성과는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는 민간부문의 노력외에 음지에 있는 공적부문의 변화와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다음은 최근에 뒤늦게 취재된 한 일화이다.

***전윤철, "감히 은행장이..."**

지난달 중순의 일이었다.

국내외가 공인하는 금융 민간부문의 최대스타인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감히 재경부의 역린(?)을 건드렸다. 한 학회 모임에 초청받아 행한 연설에서 "정부는 투자한 돈의 12배나 돈을 벌었으면서도 왜 9%의 국민은행 보유주식을 팔지 않고서 경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느냐"는 요지의 강연이었다. 김행장이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자못 도발적(?) 발언이었다.

발언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당연히 재경부가 발칵 뒤집혔다. 감히 일개 은행장이 재경부를 공개비판하고 나서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아니나 다를까, 보도를 접한 전윤철 부총리 겸 재경부장관이 발끈했다. 전 부총리는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한 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자 "팔고말고는 정부마음"이라며 "은행경영에 개입한 일은 절대 없다"는 요지의 분노를 표출했다.

외형상 전윤철 부총리와 김정태 행장간의 대격돌로 비쳤다.

금융계에는 "김정태 행장이 너무 잘 나간다고, 오버한 게 아니냐"는 수근거림이 나돌았다. "이번 일로 김행장이 찍혀도 단단히 찍혔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재경부 고위관계자가 전한 당시의 내부상황은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전 부총리와 김 행장 사이에 끼어 가장 처지가 난처해진 인물은 다름아닌 재경부의 변양호 금융정책국장이었다. 금융정책 결정을 총괄하는 금정국장은 과거에 비해 위세가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금융계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한 자리이다. 때문에 김정태 행장의 문제발언에 대한 부총리의 일차적 질책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은행장들이 할 말은 해야 선진국이지"**

아니나 다를까. 부총리 주재로 재경부 국장급이상 간부회의가 열린 날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국장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전윤철 부총리가 변양호 금정국장보고 남으라고 했다.

이어 변 국장에게 호된 질책이 날아들었다.

"요즘 은행장들 해도 너무 하는 게 아니냐. 조용히 부탁해도 될 일을 공개석상에서 공공연히 정부를 비판하고 말이야. 금정국장, 도대체 평소에 뭐 하는 거야? 단속도 잘 하지 않고."

전윤철 부총리의 별명이 '전 핏대'이다. 워낙 성격이 불 같아서 붙은 닉네임이다. 당연히 폭풍같은 질책이 이어졌다. 변 국장이 이에 "요즘 금정국장이 함부로 나서면 안됩니다"라고 해명했다. 이 말을 들은 전 부총리가 "금정국장이 저런 소리나 하니, 은행장들이 함부로 이런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라고 곧바로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것은 변 국장의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었다. 한창 열을 올리던 전 부총리는 어느 정도 열기가 가라앉자 이런 푸념을 마지막으로 질책을 끝냈다.

"하긴, 은행장들이 할 말은 해야 금융선진국이라 할 수 있지."

이것으로 상황 끝이었다. 그후 더이상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도리어 재경부는 국민은행에 대해 증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방식이 아니라면 국민은행 보유주식을 매각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예전같으면 '괘씸죄' 때문에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같은 논란을 지켜본 장승우 기획예산처장관도 며칠 뒤 한 공개 강연에서 "정부가 국민은행 보유주식을 매각하는 게 순리"라는 요지의 김정태 행장 지지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딴 때 같았으면 "같은 경제각료끼리 돕지는 못할망정 이럴 수가 있냐"며 재경부가 펄펄 뛰었을짐도 하나 그런 일도 없었다.

***'IMF 금융신화'의 비밀은 민간금융인과 경제부처간 상생(相生)의 철학**

국민은행 주식매각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은 IMF사태를 겪은지 불과 4년여만에 왜 우리금융이 세계로부터 '새로운 금융신화'를 만들었다는 찬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는가를 읽을 수 있게 하는 주요 키워드중 하나이다. 경제관료와 민간금융인 모두가 함께 크게 변했고, 때로는 싸우되 상대방을 인정하는 상생(相生)의 태도를 견지했기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물인 셈이다.

한 예로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오늘날 한국금융계를 대표하는 국제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지난 98년 일개 증권사 사장이던 그를 주택은행장에 전격 발탁했던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의 탁견과, 그후 대우그룹 여신 회수 및 하이닉스 신규여신 중단 같은 김행장의 '소신경영'을 허용했던 금융당국의 양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경제부처와 금융권을 상대로 하는 국회의 공적자금 국정조사 준비작업이 진행중이다. 내달초 열리는 국정조사에는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을 비롯해 지난 4년간 금융구조조정에 참여했던 많은 경제관료, 금융인들이 출석할 예정이다.

국민의 혈세인 공적자금이 잘못 쓰여지지는 않았나를 검증하는 작업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IMF사태후 단행된 공적자금 투입은 그 불가피성에 대해 이미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사안이다. 도리어 공적자금이 보다 제때 신속히 투입되지 못하고 1, 2차로 나뉘어 투입됨으로써 부실을 키웠던 게 아니냐는 게 그동안의 주된 비판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 일각에선 이번 공적자금 국정조사를 연말대선을 앞두고 상대방의 정치적 약점을 파헤치기 위한 '비리 청문회'로 준비하는 분위기다. 공적자금 투입과정에 정치적 비리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 뿌리까지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하지만 경제관료나 금융계를 상대로 공적자금 투입 자체를 문제삼는 네가티브 일변도의 접근은 지양돼야 마땅하다. 오늘날 정치가 이처럼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혼미한 가운데에도 경제가 사상최대 수익을 올릴만큼 튼실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민간금융인과 경제관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각고의 노력과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룩한 귀한 성과를 우리 스스로 허물어트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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