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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세계 여성의 날, 스웨덴의 '혁명'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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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세계 여성의 날, 스웨덴의 '혁명'이 시작됐다

[민미연 포럼] 양성평등 정책이 사회를 바꾸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유리천장 지수'를 발표했다. 이 지수는 경제활동 참여·임금·임원 승진·의회 진출·관리직 진출·유급 육아휴가 등 10개 항목을 토대로 산출된다. 다른 관련 지수들과는 달리 노동 및 정치경제적 환경에 주안점을 둔 성별 격차 지표이다. OECD 29개 조사국 가운데 스웨덴은 100점 만점에 80점을 넘기며 1위를 차지했다. 반면 한국은 20점을 겨우 넘겨 꼴찌에 머물렀다.

유리천장 지수가 1등인 스웨덴은 여성의 천국이고 남성은 찬밥 신세에 불과한 걸까? 그렇지는 않다. 이를테면, 스웨덴은 여타보다 성별 임금 차가 작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남성의 벌이가 조금 더 좋다. 김영미1)에 따르면, 1992년에 이미 83%로 다른 선진산업 국가들과 비교할 때 높은 수준이었던 스웨덴의 여성임금비율은 꾸준히 증가하여 2009년 기준 공공부문은 84%, 민간부문은 87% 수준에 이르고 있다. 연령·교육·근로시간의 차이를 통제한 표준화된 여성임금비율은 민간부문의 경우, 1992년 이후 계속 91~92% 수준이며 공공부문은 95~96% 수준이다.

스웨덴은 남성과 여성의 고용률 차이가 2.9%포인트로 OECD 중 핀란드 다음으로 작은 나라이다. 여성과 남성의 소득창출 활동이 사실상 대등하다. 하지만 (여타와 별다를 바 없이) 성별 직종 분리가 높은 수준이고 여성이 상대적으로 (정규직) 시간제 근로를 많이 한다. 그런데 여성이 많이 몰려 있는 시간제 노동자의 지위가 다른 나라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미국, 캐나다, 독일, 영국, 이태리, 스웨덴의 여성근로자 중 전일제와 시간제 근로자의 임금격차를 비교한 한 연구는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시간제 근로자의 시간당 임금이 -8.4%에서 -22.1%까지 낮은 데 반해 스웨덴은 오히려 +1.1%로 더 높다고 보고하고 있다(Bardasi and Gornick 2002; 김영미 재인용).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스웨덴 여성의 노동여건은 여타에 비해 상당히 양호한 모습이다.

2015~17년 기준, 스웨덴은 전일제 노동자 임금의 상하위 10% 경계값 배율이 2.3배에 불과하여 OECD 35개국 중 가장 작다. 한국은 4.5배로, 5.1배의 미국의 더불어 가장 벌어진 축에 든다. 남성과 여성 전일제 노동자의 중위임금을 각각 뽑아서 비교한 OECD의 Gender wage gap에서 스웨덴은 이 차이가 11.3%로 남성의 중위임금이 그만큼 더 높다. 스웨덴의 남녀 중위임금 차이는 OECD 중위권 수준이다. 하지만 상위 10개국의 평균이 6%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반면 한국의 Gender wage gap은 36.6%로 OECD 가운데 가장 크다.

여성 고용률이 OECD 3위로 아주 높은 스웨덴에 비해, 한국은 29위로 많이 처져 있다. 남유럽과 멕시코, 칠레, 터키를 제외하면 한국의 여성 고용률은 꼴찌이다. 성별 고용률 차이도 스웨덴은 두 번째로 작지만 한국은 멕시코, 칠레, 터키를 빼면 꼴찌이다. 중위임금의 3분의 2 이하의 급여를 받는 저임금 노동자 비율에서도, 스웨덴은 자료가 없지만, 한국은 OECD 32개 조사국 가운데 여성 저임금 비율이 또 꼴찌이다(조사에 빠진 세 나라 스웨덴, 노르웨이, 터키 중 한국보다 아래일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는 터키뿐이다).

스웨덴과 한국은 무엇이 다르기에 이처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걸까? OECD 최악을 달리는 여성의 노동 여건을 고치지 않고도, 우리는 여성과 남성 모두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 같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대서사시를 여성의 날 특집으로 추적해본다.

"덴마크보다 세금을 적게 걷자"는 선거 공약

과거 스웨덴 우파정당의 목표 중 하나로 이런 게 있었다고 한다. "덴마크보다는 세금을 적게 걷어야 한다." 약간 농담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실제 우파연합의 중요 선거공약으로도 등장했었고 통계를 보면 단순한 우스개로 치부하기 어렵다(신광영2), <동아일보>3), <프레시안>4)) 1985년 이래 스웨덴과 덴마크는 '세금 많이 걷기(국민부담률)' 순위에서 1등과 2등을 가장 많이 기록했기 때문이다(국민부담률은 모든 '조세+사회보험료'의 GDP 대비 규모이다).

1985년부터 2017년까지 OECD 국민부담률 순위에서 스웨덴은 14번의 1위와 10번의 2위를 차지했다. 같은 기간 덴마크는 17번의 1위와 14번의 2위를 차지했다. 1995~2010년 사이에는 이들 두 나라만이 1등과 2등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록했다. '스웨덴마크'는 무거운 세금으로, 국민과 기업을 괴롭히는 종목에서 전통의 강호이자 아주 악질적인 국가라 할 수 있다(덴마크는 현재도 프랑스와 '세금 많이 뜯기' 왕좌를 놓고 다투고 있지만, 스웨덴은 2011년 이래 5위 안팎으로 많이(?) 개선된(?) 모습이다).

스웨덴이 본격적으로 '세금 지옥 NO.1'로 등극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1977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에 진입했던 스웨덴은 앞서 1976년 국민부담률 42.7%를 기록하며 사상 두 번째로 40%의 벽을 넘어선다(첫 번째는 1974년 덴마크의 40.4%이다). 이후 2001년까지 스웨덴은 무려 26년 동안, 덴마크가 1위를 차지했던 3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1위를 거머쥐었다.

담대한 증세와 함께 벌어지는 스웨덴의 혁명적 변화

이처럼 스웨덴이 70년대 이후 세금을 과감하게 또 선구적으로 늘리는 사이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 변화는 특히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과 양성 평등의 진전에서 두드러진다. 그 양상을 살펴보면, 20~50세의 스웨덴 여성 가운데 전업주부의 비율은 1968년 36.7%에서 1981년 11.3%, 1991년 5%로 급감한다(여기서 전업주부는 피고용 상태에 있지 않은 여성 중 학생이거나 실업 상태이거나 은퇴한 경우가 아닌 여성을 의미한다). 7세 이하 아동을 둔 여성을 따로 보면, 전업주부의 비율이 1968년 62.4%에서 1981년 20%, 1991년 10%로 '경천동지할 만한' 변화가 일어난다.

2000년을 기준으로 볼 때 20~50세 전체 여성의 전업주부 비율은 5.8%이고 7세 이하 아동을 둔 여성은 8.9%로 3.1%포인트의 근소한 차이가 난다. 경제활동 참가율은 전체 여성이 75.2%, 7세 이하 아동을 둔 여성이 75.8%로 거의 차이가 없다. 이는 아동 양육의 부담이 여성의 경제활동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게 감소하였으며 양육부담이 있는 여성들과 그렇지 않은 여성들 간에 경제활동 패턴 상에서의 차이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는 의미이다(Korpi et al 2003; 김영미 재인용).

2007년 스웨덴 LFS에 따르면 16~64세 여성의 23.2%가량이 비경제활동 상태인데 이 중 대부분은 교육을 받고 있거나(26만 2200명) 아파서 쉬고 있는 경우(23만 500명)이며, 전업주부는 5만 5100명 정도로 해당 연령대 여성의 2%에 불과하다(김영미 재인용).

70년대 이후 '세금 지옥' 1등에 오른 스웨덴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이 비약적으로 활발해지고 양성 평등과 여성의 삶의 질이 몰라보게 향상된 주요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각종 공보육 시설의 대대적인 확충이다. 그리고 뒤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여기에는 여성운동의 적극적인 여론 조성 활동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여성 노동력의 증가에 발맞춰 스웨덴의 여성운동은 '좀 더 많은 그리고 좀 더 질 높은 어린이집'을 요구했다. 1972년 스웨덴에서 처음 개최된 '3.8 세계여성대회'를 비롯한 모든 행사와 시위에는 '모두를 위한 어린이집'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이런 구호는 단지 말에만 그치지 않아, 1975~85년 사이 어린이집이 약 7만 2천 개에서 33만 개로 급증했다(신필균5)). 이에 따라 1~6세 아동 가운데 코뮨(기초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비율이 1972년에는 12%에 그쳤지만, 2007년에는 86%로 늘어났다(신필균 재인용). 또, 주로 6~9세의 유치원 및 학년기 아동이 이용하는 방과후 보육기관 '레져타임센터'의 경우, 2000년대 들어 80%에 육박하는 이용률을 보이고 있다(한유미·권정윤6), 서문희 외7))

90년대 이후 스웨덴에선 대도시의 고소득층일수록 (재정이 지원되는) 사립보육시설을 이용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공공보육기관이 80~90% 이상의 이용률로 지배적이고 그 질도 뛰어나다. 일례로, 1~5세 아동의 대표 보육시설인 프리스쿨(Preschool)의 경우 교사 대 아동 비율이 평균 1:5.3으로 매우 낮은 편이다(NAE 2003; 한유미·권정윤 2005 재인용). 보육교사의 교육수준도 우수하여 약 50%를 차지하는 유아교사는 3, 5년제 대학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보육교사(보조교사)라 하더라도 최소 1년 반에 해당하는 대학교육과정 90학점을 이수해야 하고,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성인교육기관에서 1년간 보조교사 교육과정을 마쳐야 한다(서문희 외 재인용). 주로 '레져타임센터'에서 학동기 아동의 보육을 담당하는 레크레이션 교사는 모두 대학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다른 나라들과 차이가 있는 지점이다(한유미·권정윤 재인용).

보육교사들은 지자체에 의해 임명되고 지자체로부터 임금을 받는 공무원 신분의 비교적 안정된 직종이다. 다른 직종에 비해 보육교사의 월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지만 근무 조건이 양호하고 이직률이 낮은 편이며, 유아교사 평균 연령이 47.5세, 보조교사 42세로 경력교사의 비중이 높다(서문희 외 재인용). 또, 스웨덴인 만큼 자유롭게 노조 활동을 하며 근무환경의 개선에 힘쓰는 것은 기본이다. 이런 정황들은 모두 보육의 질과 아동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근래 들어 교사의 급여나 연금 등 처우 문제로 인해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다).

1970년대 들어 본격 시작된 스웨덴 세금과 복지의 대대적인 증가는 여성 노동인구뿐 아니라 공무원의 대대적인 증가도 불러왔다. 1965년 15%에 그쳤던 전체 노동인구 중 공무원(공공부문 종사자)의 비율이 1985년에는 33%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2009년 기준으로는 32%이다. 공무원의 분포를 보면 탁아소, 학교, 양로원, 장애인시설 등 복지업무에 종사하는 기초자치단체의 지방공무원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전체 공공부문 종사자의 54%가 기초자치단체 소속이고, 기초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서비스 관계 분야의 기업까지 포함하면 59%가 기초자치단체에 속해 있다. 의료 부문의 공무원이 속해 있는 광역자치단체의 종사자 비율은 17%이고 국가공무원이 15%, 국영기업이 9%이다. 최연혁8)에 따르면, 공공조직의 절대적 다수(기초자치단체(운영기업 포함)+광역자치단체. 필자)가 복지 업무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한다.

(OECD 기준으로는 초등학교부터 고등교육까지 모든 정규 공교육이 복지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스웨덴처럼 공교육비의 거의 전부가 세금으로 충당되는 경우라면 이를 보편적인 복지서비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필자)

스웨덴의 세금과 복지 팽창은 업종별 노동인구의 변천과도 궤를 같이한다. 1965년에는 농업·어업·임업 종사자가 12%였지만 2009년에는 2%로 줄어들었다. 제조업도 30%에서 14%로 감소했다. 하지만 사무직과 공무원은 각각 43%에서 52%로, 15%에서 32%로 증가했다(최연혁 재인용). 기계화, 자동화 등 산업환경의 변화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 노동인구를 민간과 공공의 사무직과 서비스직이 흡수한 셈이다(이런 변화는 복지 체제가 유사한 북유럽 국가들이 공히 비슷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세금으로 일자리를 늘리면 나라 망한다'는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지만, 이는 괴담에 불과함을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복지국가군이 잘 보여준다. 물론, 한국이 공공부문을 늘리려면 포괄적인 증세와 복지 확대를 바탕으로 임금 및 연금 체계의 조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지금 이대로는 (어차피 작은 재정의 제약으로 그 한계가 명확하긴 하나) 공공부문의 고용 창출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하지만 민간에서 제대로 공급되기 어려운 유익한 일자리를 세금으로 늘리는 일이 매우 유력한 국가발전의 방안이라는 '교양 상식'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스웨덴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한국의 정치와 여성운동

1970년대의 스웨덴은 여성운동이 뜨겁게 전개된 시기이기도 하다.('스웨덴 여성운동'과 관련해 신필균의 책 <복지국가 스웨덴: 국민의 집으로 가는 길>을 참조, 요약했다.)

1968년, 웁살라 대학에서 '여성의 역할'을 다룬 세미나는 8명의 여성에게 특별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이들은 '그룹 8'이라는 진보적 여성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서서히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시켰다. 그때까지 여성운동 지도자들이 중산층 지식인 중심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조직은 30~40대 직장 여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들은 가정과 직장에서 이중 역할을 감당하는 당사자들이었다(중산층 지식인과 명망가 그리고 SNS의 지명도 있는 남녀 페미니스트와 기존의 여성단체들이 의제 제기와 여론 환기 등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20대 고등교육 이수자 여성이 가장 크게 반응하는 한국의 현재 페미니즘 시류와 대비되는 지점이다. 필자).

여성의 낮은 임금에 불만을 가진 스웨덴 진보적 여성들의 움직임은 노동운동에서 거의 '봉기적' 성격으로 발전했다. 산업 현장의 여성 노동자들뿐 아니라 사무직,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들도 계급 문제와 여성 차별 문제를 동시에 제기했다. 사민당 여성위원회 등 전통과 역사를 가진 기존 여성 조직들은 새롭게 등장한 진보 여성운동에 합류하면서 어린이집 증축 문제, 성추행에 대한 조사, 여성실업자 문제 등을 다뤘다.

'1972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는 '그룹 8'과 스웨덴 여성좌파협회의 주최로 최초의 대대적인 시위가 스톡홀름의 한 고등학교 야외 광장에서 벌어진다. 스웨덴의 가장 큰 일간지 은 "수천 명의 군집 속에서 터져 나온 여성의 함성과 노래는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스웨덴은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큰 여성들의 군집을 경험했다"고 당시를 기록했다.

이날 여성들은 "일자리 창출과 노동환경 개선, 탁아소 증대, 자유 낙태, 국제적 연대"를 소리 높여 외쳤다. 여세를 몰아 이어졌던 '그룹 8'의 시위행진에서 여성운동 시위대는 "노동: 노동력의 보조적 존재로 사용되는 여성관 철폐", "탁아소: 경제 상황에 좌우되는 아동 돌봄 정책 반대", "교육: 저임금 유지 수단의 여성 직업 반대" 등을 촉구했다.

1980년대 스웨덴의 여성운동은 직장 현장의 여성조직 결성으로 이어졌고, 다른 한편 반핵·평화운동으로 발전했다(여러 가지 돌봄 및 가사노동 이슈와 여성의 이중 부담 문제가 상당 부분 일단락된 시점이다. 필자). 이와 함께 1980년 이후 여성운동은 대학가에 전파돼 여성연구자 포럼이 조직됐다(한국과 달리 스웨덴은 대학가의 여성운동이 뒤늦게 움직였던 모양새다. 필자).

대학가 외에도 여성에 관한 학습 서클이 도처에 출현했고 ABF(노동자교육센터)의 교육과정에도 여성학이 포함됐다. 이 시기 '그룹 8'에서 출간한 <자유, 평등, 자매애>와 <여성과 성> 등은 수많은 여성들에게 애독됐으며, 여성 평등 가치관을 사회적으로 형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노동 현장에서 대학 연구실을 거쳐 정치 무대와 반전운동으로까지 전개된 여성운동은 진보 성향 남성의 많은 호응과 동조를 끌어냈다.

1970년대 스웨덴 여성운동의 핵심적인 성과 중 하나는 각종 돌봄 노동의 '전면적인 유급노동화'와 '공공부문화'이다. 또한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에 걸림돌을 최소화하고 괄목할 만한 여성 고용의 증대를 이뤄냈다. 그것도 상당히 양질의 일자리를 중심으로 이뤄진 여성 일자리의 증대이다. 특기할 것은 스웨덴 정치인들, 특히 (스웨덴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중의 하나인) 팔메 총리와 그가 이끈 사회민주당이 기업과 개인에 대해 전폭적인 보편 증세를 결행함으로써, 당시 여성운동의 주요 요구사항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꼭 증세 때문만은 아니지만, 사민당은 국민부담률이 OECD 1위에 올랐던 그 해 선거에서 무려 44년 만에 우파 연정에 정권을 내주게 된다. 6년 뒤 정권을 다시 내준 우파 연정은 스웨덴의 세금도 복지도 이전의 체제로 되돌리지는 못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여성운동의 주안점은 과거 스웨덴의 여성운동이 주력하고 최대의 성공을 거두었던 지점과는 다분히 다른 양상이다. 돌봄시설을 늘리라는 요구도 한국 여성운동의 주요 의제이기는 하나, 사활을 거는 사안이라고는 볼 수 없다. 신필균에 따르면 1970~80년대 스웨덴에선 여성단체 중 일부가 여성 학대, 성폭력, 동성애 차별 등을 중심 의제로 제기했다. 그에 반해 한국의 여성운동이나 여성단체들은 이런 일들을 가장 중점에 두고 있다.

이러한 대비에 어떠한 선악이나 옳고 그름이 있다는 그런 말이 아니다.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미투 운동이나 몰카 근절, 또는 젊은 세대나 좌파 페미니스트 등이 주로 제기하는 동성애 사안들이 절대 사소한 문제일 리 없다. 다만, 한국의 여성운동은 여성의 도약을 근본적으로 떠받치는 물적 인프라나 시스템을 상대적으로 놓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임금 차별이나 노동 차별, 아니면 가정과 직장의 이중 부담을 어떻게 시정할 수 있을지 그 실효적인 대책에 대한 논의가 매우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스웨덴보다 몹시 지체된 한국의 정치와 여성운동

70년대 스웨덴에서 여성운동이 발흥함에 따라 양성평등 정책의 실현을 위한 정부의 특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했다(최연혁 재인용).

"여성의 노동참여는 경제적 및 사회적 평등을 이루는 수단이다."
"경제활동으로서의 노동은 모든 국민의 권리사항이다."

이러한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스웨덴의 정치는 과감한 증세를 회피하지 않았고, 풍부한 세금을 바탕으로 여성의 고용과 권익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는 그저 말에 그치는 듣기 좋은 수사들을 뿌려댈 뿐, 필요한 증세에 나설 능력도 동기부여도 없다. 여론의 눈 밖에 난 사립보육단체를 찍어누르는 일은 어떻게 해내지만, 절대다수의 여성과 남성이 혜택을 누리는 선진적인 공보육 시스템의 확립이나 많은 세금을 들여야 하는 총체적인 사회개혁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별의별 방식으로 조세저항을 선동하는 언론과 식자층의 폐해도 극심하다. 이처럼 역량이 부족한 정치에서, 또 사회에 해로운 언론과 식자들이 판을 치는 환경에서 한국의 여성운동은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투쟁과 성과이다.

지난 2월 14일 <오마이뉴스>에 '돈 버는 유세 부리던 남편, 이렇게 바꿨다'가 실렸다9).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라는 연재 기사 중 하나로, 큰 호응을 얻어 책으로 묶여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 기사를 발췌, 요약했다.

돈을 버는 남편과 아이를 돌보는 나의 위상은 전혀 동등하지 않았다. 나는 통장 잔액 부족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남편 기분과 자존심이 상할까 염려하며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참았지만, 남편은 내 감정이 상하거나 말거나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서슴없이 뱉었다. 돈을 버는 남편에게는 말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날 침묵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가족을 위해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던 내 삶을 내려놓았다. 경제력을 잃고, 수많은 기회도 잃었다. 남편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경력이 쌓이고 유능해지는 동안 나는 '무능한' 존재가 됐다. 우린 똑같이 두 아이의 부모로 열심히 살았는데, 우리 둘의 모습은 왜 이리 달라졌을까. 아이를 선택하며 회사를 그만둘 때 이런 미래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생각할수록 분하고 눈물이 났다.

나는 팔자가 좋지도 않고, 놀지도 않으며, 정말 열심히 일하며 사는데, 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할까? 사회에서 인정하거나 말거나 스스로 노동자가 되리라는 오기가 생겼다. 국민연금 지역가입자로 등록해서 매달 일정 금액을 납부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남편의 국민연금이 생활비와 상관없이 고정적으로 나가듯 내 것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외에도 나는 연중무휴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남편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우선 '주5일 근무'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평일에는 집안의 전반적인 일을 내가 맡지만 주말에는 남편과 함께하고, 함께 쉰다. 나만의 '주부 월차제'를 만들기도 했다. 올해는 첫 번째, 세 번째 토요일을 나의 휴가로 정했다.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허락을 받고 나가는 것과 당연히 쉬는 날인 것은 다르다.

내가 남편의 임금노동에 빚이 있다면, 남편은 내 돌봄노동에 빚이 있다. 남편은 내 돌봄노동을 바탕으로 애가 아프거나 말거나, 방학을 하거나 말거나 걱정 없이 일에 집중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유급노동과 무급노동으로 보지 말고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이라고 생각해. 우린 지금 외벌이가 아니라 '맞노동'을 하고 있다고!" 6년이라는 오랜 투쟁 끝에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느끼는 부당함에 공감하지 못하고 "당신이 페미니스트야, 뭐야?"라고 말하던 남편은 더 이상 그때 그 사람이 아니다. 밖에서 일하고 들어온 남편을 향해 "우리 집 기둥, 돈 버느라 힘들었지?" 하며 힘든 하루를 위로하면 "우리 집 기둥은 당신이지, 내가 없으면 대출이라도 받으면 되지만 당신이 없으면 저 애들은 어쩌냐" 하며 내 노동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기사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용기 있고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못난 정치가 야기하는 '시대의 정체'가 안타깝게 다가왔다.

앞서 보았듯, 스웨덴은 1970년대에 들어 세금을 보편적으로 폭증시키고 민간과 공공에서 양질의 (여성) 일자리도 폭증시켰다. 여성의 임금노동 증진을 통해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이라는 개념을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정치권에서는 이미 반세기 전에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해야 사회적, 경제적 평등이 달성된다고 천명했다.

결국 스웨덴이 세계 최고의 양성평등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개인은 유급노동을 통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과 '남녀 모두 취업과 양육을 병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의거한 양성평등정책을 적극적으로 주도해왔기 때문이다(Bjornberg & Dahlgren, 2003; Swedish Institute, 2004; 한유미·권정윤 2005 재인용). 이러한 노력의 결과 실제로 오늘날 스웨덴 남성과 여성은 자녀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 아버지가 자녀를 데리고 보육시설에 오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아픈 자녀를 돌보기 위한 일시적 부모급부도 거의 어머니(57%)만큼 아버지(43%)들이 사용하고 있다(Swedish Institute, 2004; 한유미·권정윤 재인용).

스웨덴이 처음부터 이와 같은 원칙하에 작동하던 사회는 아니었다. 돌봄 노동의 사회적 해결과 여성의 경제활동 촉진 그리고 여성의 이중 부담 해소와 노동차별 반대 등을 적극적으로 주창했던 여성운동이 1970년대 들어 불타오르기 전에는, 2월 14일 자 <오마이뉴스> 글과 동일한 관점으로 여성의 권익을 신장시키려 했다.

예를 들어, 1942년에 작성된 정부 보고서는 가사노동을 영위하는 주부에게 2주의 법정유급휴가를 부여해 직장 여성과 같은 비중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권고안을 내놓았다. 1946년 사민당 주도로 정부법안이 통과되어 처음 시행된 전업주부 휴가제도는 주부의 유급휴가, 자녀의 여름학교 위탁비용 지급 등으로 주로 농촌 수혜자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최연혁 재인용).

1950년대에도 전업주부의 권익을 위한 정책적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마을 단위에서 가사노동 보조원을 정식으로 고용할 수 있는 법안이 40년대에 채택된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업주부에게도 이러한 가사보조원을 동등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전업주부의 노동도 직장 여성의 노동과 견주어 같은 비중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최연혁 재인용). 1960년대 중반에는 집에서 아이를 기르는 여성에게 육아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보고서가 작성되었는데, 이 제안은 1950년대에 논의되었던 전업주부 가사노동의 유급화 노력을 반영한 것이었다(최연혁 재인용).

1940~60년대의 스웨덴은 전업주부가 집에 있는 동안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정책적 혜택을 늘리거나, 전업주부가 자녀 양육이나 가사노동만으로도 삶의 의의를 찾도록 하는 관점에서 정책적 접근을 했다. 보육시설의 확대도 있었지만 더디고 소폭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여성운동이 '바람의 방향'을 바꾸었고, 이것이 결국 정치와 사회도 바꿔놓는 기폭제가 됐다. 그 결과 스웨덴은 비교적 단기간에 전업주부라는 개념을 사실상 없애버렸고, 오늘날에는 '유리천장 지수'를 비롯한 각종 성별 격차 지표에서 항상 최상단에 자리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직 전업주부로서의 권익 신장과 전업주부 상황에서의 부부간 평등과 존중에 초점을 맞춘 <오마이뉴스>의 페미니즘 기고 글은 스웨덴으로 치면 1940~60년대에 논의되었던 전업주부의 '노동자적 권리 보호'와 맞닿아 있다. 이것이 여성 권익의 바람직한 신장인지, 시간을 거스르는 퇴행인지 착잡한 심정이 든다. 각종 성별 격차 지표에서 (세부를 뜯어보면) 한국이 늘 바닥을 친다고 탄식하는 목소리에 공감해 마지않는 입장에서, 전업주부로서의 행복 찾기에 성공하고 이에 공감하는 여성운동은 무언가 커다란 장벽을 느끼게 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는 사안이 존재한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이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여성을 위한 나라가 남성을 위한 나라다

여성을 위한 나라는 그저 여성에게만 이로운 게 아니다. 모든 여성이 경제적 주체로서 준수한 벌이를 할 수 있을 때 남성은 가족 부양의 부담이 줄어들고, 이것은 결국 격차와 노동시간이 동반으로 줄어든, 삶의 질이 높은 사회구조로 이어진다.

스웨덴은 이미 70년대에 (주 52시간이 아니라)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을 규제했고, 노사의 협약에 따라 웬만해선 주 40시간 이하로 일을 한다. 게다가 이미 70년대에 5주간의 유급휴가를 도입했고, 모두에게 보장되는 유급육아휴직도 법제화했다(김영미 재인용, 최연혁 재인용) 전업주부라는 말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버릴 만큼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지 않았다면, 양질의 여성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여성운동이 분투하지 않았다면, 결정적으로 세금과 복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사회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은 특히 남성의 경우, 홀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일자리를 어떻게든 차지하려 애써 왔고, 과로를 통해서든 각자도생 일변도의 경쟁적 삶을 통해서든, 아니면 이른바 귀족노조의 '나만 아니면 된다'는 노동운동을 통해서든 그에 성공하는 이들이 없진 않았다. 맞벌이에 대한 찬성 의견이 현격히 높아진 현재에도 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몫까지 벌어야 할 경우를 가정하고 취업전선과 사회생활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2인분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자리는 마구 늘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한국의 노동 세태는 커다란 격차와 긴 노동 시간을, 또 수많은 청년들의 좌절을 초래했다. 노동시장에서 아예 배제되거나 저임금에 내몰리는 여성의 문제 못지않게 남성의 열악한 노동환경도 심각하다. 확대되는 격차 속에 장시간 일을 해도 벌이가 변변찮은 일자리가 꾸준히 증가해왔다.

이러한 구조적 부조리나 부양에 대한 부담 등을 매우 성공적으로 해결한 나라는 다름 아닌 우수한 복지국가이고, 이런 나라가 여성을 위한, 또한 동시에 남성을 위한 나라이다. 반세기 전 스웨덴의 여성운동이 그러했듯 한국의 여성운동이 한국사회와 한국정치를 바꿔놓고 남성과 여성 모두를 위한 사회를 만드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또 수많은 남성들이 여성운동의 분투에 힘을 실어주기를 상상으로나마 그려보며, 이 길었던 드라마를 종영한다.

각주

1) 김영미(2011). '스웨덴의 시간제근로: 유연성과 성평등의 긴장 속 공존'. 산업노동연구. 제17권 제1호(297~323).

2)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노동, 복지와 정치>(신광영 지음, 한울 펴냄)

3) 1994년 10월 6일 자 <동아일보> 『격변의 세계』 종합진단 본사 - 大宇 공동기획<9> 유럽의 변신(2) 左-右 모두 "삶의 質 향상" 기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4) 2013년 8월 15일 자 <프레시안> '장하준 "세금=부담? 이러면 복지 논쟁은 진다"'

5) <복지국가 스웨덴: 국민의 집으로 가는 길>(신필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6) 권정윤·한유미(2005). '스웨덴 보육의 배경과 현황' 아동학회지. 제26권 2호(175~191). 한국아동학회.

7) 서문희 외(2010). "보육시설 이용시간에 따른 비용 지원체제 개편 방안". 보건복지부·육아정책연구소. 

8) 최연혁(2012). '저출산·고령화와 미래 경제사회: 17편 스웨덴의 저출산 대응정책과 중장기 파급효과 분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9) 2019년 2월 14일 자 <오마이뉴스> '돈 버는 유세 부리던 남편, 이렇게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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