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가 행한 장문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두고 대부분 언론은 "덴마크식 유연안정성이 노사 상생의 해법"이라는 취지의 주제로로 그 내용을 전하고 있다. 한편 같은 날 국제통화기금(IMF) 연례협의 미션단이 홍남기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최저임금 인상이 유연안정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조언했고, 이에 홍 장관은 "정부는 유연안정성 강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및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확대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갑자기 여당과 정부뿐 아니라 묘하게도 국제기구까지 한국의 유연안정성을 위해 협력하고 있는 분위기다.
IMF 관계자나 홍남기 장관 발언의 구체적 내용은 정확히 보도되지 않았지만, 자세히 알려진 홍영표 대표의 엄청나게 많은 연설 내용 중 유연안정성 관련 부분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시장의 양극화는 덴마크의 '유연안정성' 모델에서 상생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덴마크 정부는 기업의 인력 구조조정을 쉽게 허용하는 대신 실업급여로 종전 소득의 70%를 2년간 지급하고, 전직훈련 등 해고자의 안정적인 구직활동을 지원한다. 이에 비해 한국의 실업급여는 월 평균 152만 원씩 4개월만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현재 9조 원인 실업급여를 26조 원 정도로 확대해야 하는데, 이를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2030년까지 완성하자. 대신에 업무량에 따라 탄력적으로 인력을 운용하고, 인력 구조조정도 유연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유연안정성(flexicurity)이란 간단하게 말해 노동시장의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의 균형을 추구하는 전략이다. 이 개념은 전통적으로 정규직 고용보호가 강한 네덜란드에서 증대하는 노동시장 유연화의 결과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노동자(유연노동자)가 증가함에 따라 1990년대 후반 정규직 해고요건을 다소 완화(유연성)함과 동시에 유연노동자의 노동법적 보호를 강화(안정성)한 '유연성과 안정성 법'에서부터 비롯했다.
그런데 유연성과 안정성의 결합방식, 따라서 유연안정성의 특징은 나라마다 다르다.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유연안정성 모델은 덴마크 모델이다. 덴마크는 전통적으로 해고가 매우 자유로웠던 반면, 실업급여는 90년대 초까지 종전 임금의 90%를(일일 상한액이 있어서 고임금자는 소득대체율이 낮기 때문에 평균적으로는 70% 정도) 9년 동안 받을 만큼 매우 관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90년대 초 실업률이 10% 가까이로 치솟자 1994년 실업수당 수급기간의 단축(7년으로; 현재는 2년)과 직업훈련 강화, 구직 촉진 등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실시를 특징으로 하는 과감한 노동시장 개혁을 단행했다. 이 결과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덴마크의 실업률은 유럽연합 평균의 절반 정도로 하락하고, 고용률도 다른 나라보다 오르는 등 소위 '고용 기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덴마크 모델은 유연한 노동시장(유연성), 관대한 실업보상(소득안정성),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고용안정성)을 삼각축으로 하는 '유연안정성의 황금삼각형(golden triangle of flexicurity)'으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그림> 참조). 2000년대 후반 들어 유연안정성 전략은 유럽연합의 고용전략으로 흡수돼, 회원국들의 고용정책에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다. 물론 2000년대 말~2010년대 초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덴마크의 실업률이 상승하는 등 덴마크 모델이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그 이후 여러 가지 제도적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덴마크 모델의 기본골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덴마크는 여전히 유럽 내에서 양호한 노동시장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와 경제부총리가 이러한 모범적인 모델을 추구하겠다고 하니 반갑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필자의 과거 경험 탓인지 모르겠다. 유연안정성 개념과 덴마크 모델이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탄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당시 우리나라에도 이 개념이 막 소개되기 시작했다. 유연안정성 개념이 알려지던 초창기에 필자는 이를 비교적 상세하게 연구한 바 있다. 이를 근거로 2006년 초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노동·고용정책비서관과 토론한 후, 대통령 업무지시로 노동부와 함께 네덜란드와 덴마크 출장을 거쳐 '덴마크 고용안정 사례의 정책수용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집필했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실제로 정책 수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무현 정부의 노동(시장)정책으로 기억에 각인된 것은 실업보상의 대폭적 확대나 직업훈련 등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강화를 통한 노동시장 안정성의 제고가 아니라, 노동계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된 소위 비정규직 3법(기간제·단시간법, 파견법, 노동위원회법)으로 인해 비정규직이 대폭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한 유연성의 제고뿐이다. 당시 비정규직 3법을 입안한 노동부 장관은 유독 "유연안정성"을 많이 언급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것은 단지 유연성을 제고하기 위한 수사(修辭)에 불과했다!
이런 불편했던 경험을 제쳐두더라도 과연 덴마크 모델이 한국에 제대로 도입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외국의 좋은 상품이야 직구를 통해 금방이라도 구매할 수 있지만, 사회제도는 개별 나라마다 사회경제적 배경이 다르고 발전경로의 역사성에 의존하는 등 직 도입에 큰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덴마크의 황금삼각형 모델을 구성하는 유연성과 안정성 요소의 양국 현황을 비교해보자. 첫째, 노동시장 유연성과 관련해 많이 활용되는 OECD 고용보호지수(2013년) 중 '상용직(정규직)의 개별해고 및 집단해고에 대한 보호지수'(낮을수록 보호가 낮음)를 보면, 덴마크는 2.32인데 반해 한국은 2.17로 덴마크보다 한국에서 해고가 더욱 용이하다. "덴마크에서 인력 구조조정이 (한국보다) 쉽다"는 홍영표 대표의 발언은 '가짜뉴스'인 셈이다!
둘째, 실업급여는 이러한 높은 유연성에 대한 보상이라 할 수 있는데, 덴마크 실업급여의 1년 평균 순소득대체율(2015년)은 74.6%로 OECD 국가 중 3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의 그것은 겨우 32.0%로 뒤에서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셋째,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위한 지출(2016년)은 덴마크의 경우 GDP의 2.07%로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인데 반해, 한국의 경우 GDP의 0.37%에 불과하다. 요약하면, 한국은 덴마크에 비해 유연성은 높은데 실업보상(소득안정성)과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고용안정성) 수준은 매우 낮다.
이러한 현실을 작고한 윤진호 교수는 덴마크의 '황금'(golden)삼각형에 대비하여 '구리'(bronze)삼각형으로 비유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덴마크 모델을 도입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구리를 황금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러한 연금술이 과연 쉽겠는가?
다음으로 더욱 중요한 제약은 사회경제적 배경의 차이다. 예를 들어 홍영표 대표가 9조 원에서 26조 원으로 확대하겠다(이 수치의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실업급여를 보면, 덴마크의 실업급여는 정부가 아니라 노동조합이 운영하며, 실업급여의 재원에서 정부 재정이 대략 3분의 2에 달한다. 이에 반해 한국의 실업급여는 정부가 운영하지만, 재원은 노사의 보험료로만 조달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조세부담 수준이다. 주지하다시피, 덴마크는 조세부담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나라로 2015년 기준 GDP의 45.8%나 되는데 반해, 한국은 18.5%로 33위(뒤에서 3등)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덴마크의 모든 노동자와 자영업자는 소득의 8%를 '노동시장 기여금'(조세)으로 납부하고 있는데, 이것이 실업급여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재원으로 사용된다.
더욱 중요한 차이는 홍 대표도 강조한 "사회적 대타협"을 할 수 있는 사회세력 간 역관계에서 나타난다. 분명 덴마크의 황금삼각형 모델은 멀리는 덴마크 조합주의(corporatism)적 전통의 연원이 되는 1899년의 '9월 타협'부터 가까이는 1994년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Zeuthen위원회까지 노사(정)간 대타협을 통해 정착됐다. 그런데 덴마크 노동조합 조직률(2016년)은 67.2%로 세계 최고 수준이어서 노동자가 사용자(단체)와 대등한 교섭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 결과 주로 사용자들의 이해와 관계된 유연성과 노동자들의 이해와 관계된 안정성이 균형을 이루는 타협이 가능했다. 이에 반해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사(정)간 대등한 교섭력이 확보될 수 있는지, 균형 잡힌 타협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이제 정리하자. 현 시기 한국의 유연한 노동 시장 상황에서 유연성과 안정성을 균형 있게 제고하자는 유연안정성 전략은 분명 매우 필요하고, 또 매력적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노동시장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 위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노동시장 유연성은 큰데 반해, 안정성은 작다. 그렇다면 양자의 균형, 즉 유연안정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정성을 키우는 쪽으로 정책방향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라, (덴마크와만 비교하자면,) 유연성을 제고하는 정책은 지양하고, 금액뿐 아니라 수혜대상의 확대까지 포함해 실업급여를 대폭 확충하며, 적극적 노동시장정책도 더욱 강화하는 정책 방안이 추진돼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정부와 정치권은 이러한 정책들이 수립되고 정착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조성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내년부터 한국형 실업부조를 위해 일반재정을 투입한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실업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분담한다는 차원에서 실업급여에도 재정투입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재원조달을 위해서는, 굳이 덴마크와 같은 노동시장세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증세가 필연적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세력 간 역관계의 균형을 위해 노동조합을 확대하는 정책, 이를 위해 노동기본권을 강화하는 정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기반들이 조성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유연안정성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현 정부의 노동(시장)정책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홍영표 대표의 발언인 만큼, 앞으로 유연안정성은 녹록치 않은 화두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노무현 정부의 경험이나 일반해고 요건 완화와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등의 유연화조치를 추진하면서 유연안정성을 내세운 박근혜 정부 사례를 볼 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홍영표 대표 또한 유연안정성을 앞세워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나 인력 구조조정을 강행하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벌써 촛불의 기억이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제발 이번만큼은 그러한 우려가 기우이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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