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은행 사람들 사이에는 전철환 전 총재와 박승 현 총재의 엇갈린 운명을 비교하며, 전철환 전총재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는 이들이 많다.
불과 넉달 전만 해도 전철환씨는 한은 총재, 박승씨는 공적자금관리위원장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 와서는 전철환씨는 공적자금관리위원장, 박승씨는 한은 총재로 자리를 맞바꾼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한쪽은 진흙밭에서 벗어나고 한쪽은 진흙탕 속에 몸을 담구는 양상이 됐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무총리를 맡겠소, 아니면 공자위원장을 맡겠소?"**
전철환 전 한은총재는 7일 공적자금관리위원회(공자위) 민간위원으로 위촉됐다. '대통령 추천' 케이스다. 전 전총재는 금명간 강금식 공자위원장의 후임으로 공자위원장이 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강금식 위원장이 8.8.재보선 출마를 노려 취임후 석달만에 공자위원장직 사퇴를 천명한 데 따른 후속인사조치다. 강 위원장은 민주당 공천을 못받아 출마도 못했으나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기 힘들어 교체가 확실한 상태다.
문제는 전철환 전 총재가 후임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있다. 전 전 총재는 공자위원장직을 한사코 맡고 싶어하지 않았다. 형식적 고사가 아니었다. 정말 맡고 싶어하지 않았다. 7일 정부가 발표하기 전까지도 4시간동안 "맡기 싫다" "맡아라"는 실랑이가 계속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전철환 전총재는 결국 공자위원장을 수락해야 했다. 청와대 압력이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전철환 전총재에게 양자택일을 압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무총리를 맡을 것이냐, 아니면 공자위원장을 맡을 것이냐."
청와대는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사장에 앞서 전철환 전 총재를 국무총리서리로 지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 전총재가 총리직을 한사코 고사하자, 그 대신 공자위원장직을 떠안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청와대가 내세운 논법이 세칭 '보은론(報恩論)'이다. 한마디로 말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진 빚을 갚으라는 것이다. 한은총재 4년을 시켜줬으니, 이제는 반대로 김 대통령이 어려울 때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논법이다. 전철환 전 총재는 결국 보은론에 무릎을 꿇고만 셈이다.
***새 민간 공자위원장은 야당의 '총알받이' 신세**
공자위원회는 1백50조원의 공적자금 관리를 맡고 있는 중차대한 기구다. 공적자금이 제대로 투입됐으며, 제대로 회수되고 있는가를 감시·관리하는 기구다.
위원장도 두명을 두고 있다. 한명은 정부 공자위원장으로 전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이 맡고 있다. 다른 하나는 민간 공자위원장으로 금명간 전철환 전총재가 떠맡게 될 게 확실시된다.
문제는 전 전 총재는 물론, 그 누구도 민간 공자위원장을 맡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많은 경제학자등이 서로 맡고 싶어한 자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정권말기다. 게다가 한나라당이 공적자금 국정조사를 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8.8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압승, 독자적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가을 정기국회에서의 공적자금 국정조사는 사실상 기정사실화됐다.
한마디로 말해 새 민간 공자위원장은 국회에 나가 총알받이가 돼야 하는 처지다.
***전윤철 부총리의 '책임 떠넘기기'**
전철환 전 총재를 비롯한 민간인들이 민간 공자위원장을 맡지 않으려 한 데에는 전윤철 부총리의 '몸사림'도 결정적 작용을 하고 있다.
전윤철 부총리는 정부 공자위원장이다. 그러나 전 부총리는 바쁜 일정을 이유로 올 들어 공자위원회 회의에 불참하고 있다. 그대신 재경부차관을 대리참석시키고 있다. 그러다보니 주요결정은 모두가 민간 공자위원장 책임이 되고 있다. 정부 공자위원장인 전 부총리가 계속 회의에 불참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러다 보니, 민간위원들의 불만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한 예로 당면한 공적자금 회수의 최대현안인 서울은행 매각건만 해도 그러하다.
서울은행 매각협상은 재경부와 재경부산하인 예금보험공사가 주도했다. 하나은행을 우선협상자로 지명하려던 것도 재경부였다.
6일 열린 공자위 전체회의때만 해도 정부는 전체회의 참석자들에게 정부 결정을 추인하는 '거수기' 역할만 요구했지, 당시 서울은행 노조등이 제기한 1조3천억원의 세금감면 특혜의혹에 대해 아무런 해명자료도 내놓지 않았다. 단지 정부 추산으론 세금감면 혜택이 3천억원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이날 공자위 전체회의는 서울은행 매각건을 추인하지 않았고, 그후 서울은행 매각건은 안개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정부는 론스타의 추가제안으로 서울은행 매각문제가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자, 9일 모든 책임을 공자위로 떠넘겼다. 재경부와 예금보험공사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론스타 추가제안을 받을 것인지 여부와 매각결정은 16일 열리는 공자위 전체회의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전형적인 관료들의 책임 떠넘기기 행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누군들 민간 공자위원장을 맡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청와대 '보은론'의 허구**
전철환 전 총재의 무릎을 꿇게 만든 청와대의 보은론도 허구다.
청와대는 전철환 전 총재로 하여금 한은총재 임기 4년을 채우게 한 대목을 자신들의 큰 은혜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청와대는 전철환 총재를 중도교체하려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2000년 4.13 총선이후의 일이다. 총선 참패를 이유로 정부가 개각을 단행하려 했다. 일차로 이헌재 재경부장관, 이용근 금감위원장 등에게 책임을 떠넘겨 옷을 벗겼다. 청와대는 이 과정에 전철환 총재도 교체대상에 올려놓고 구체적인 후임자 물색을 벌였다.
세간의 신인도가 높은 서울대 J교수가 영입대상이었다. 청와대는 J교수에게 한은총재직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J교수는 사양했다. 당시 경제팀의 경제정책이 성에 안 차기는 했으나, 한은총재를 중간에 교체한다는 것은 중앙은행의 독립성 확보 차원에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청와대는 한은총재 교체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이런 과정을 볼 때 청와대는 전철환 전총재에게 보은론을 주장할 자격이 없다.
***전철환 전 총재의 보은 대상은 청와대가 아닌 국민**
공자위원장은 대단히 중요한 자리다. 1백50조원의 국민혈세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제대로 회수되고 있는지를 감시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철환 전 총재처럼 '원칙'있는 학자가 그 자리를 맡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전철환 전 총재를 야당 공세의 총알받이로 쓰겠다는 생각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행 매각건을 다룰 오는 16일 공자위 전체회의때 과연 전윤철 부총리가 참석할 것인지부터 지켜봐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공적자금 국정조사가 시작되더라도 답변의 일선에는 전윤철 부총리가 나서야 한다. 전철환 전총재는 야당이 문제삼고자 하는 그동안의 공적자금 운용, 관리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전철환 전총재도 과정이 어떠했든간에 기왕 민간 공자위원장을 맡기로 했으면, 무조건 공적자금 문제를 방어하겠다는 자세보다는 민간 공자위원장 도입의 원래 취지대로 '국민의 편'에 서서 과연 공적자금이 제대로 운용돼 왔는지, 서울은행 매각건 같은 현안을 어떻게 다뤄야 국민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전철환 전 총재가 '보은'을 해야 할 대상은 청와대가 아니라 국민이기 때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