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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지 못한 '북한 위안부' 할머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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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지 못한 '북한 위안부' 할머니의 삶

북측 위안부 피해자 사진전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우리는 때때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접한다. 매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 집회'를 통해서, 혹은 '부고 기사'를 통해서. 멀게는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에서부터 영화 <아이캔스피크(I Can Speak)>의 실제 모델이었던 강일출 할머니, 그리고 지난 2일 별세한 고(故) 곽예남 할머니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식을 듣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됐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한 내 피해자 이야기다. 북한에도 수많은 '김학순'이, '강일출'이, '곽예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리경생, 김영실, 곽금녀 등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가.

십중팔구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남한 사람'에 한정돼있었다. 그러나 북한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그리고 여성인권과 역사 정의, 평화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었던 이들이 있다. 그들을 남한에 알리고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 마련됐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오는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본전시장 1층에서 '남과 북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사진전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를 연다. 북측 피해자들의 사진이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작업을 담당한 이는 일본의 사진가 이토 다카시다. 1998년부터 10년간 북측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흔 번 가까이 북한을 찾았다.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북한에 쉽게 갈 수 없는 남한 국민을 대신해 그는 고된 여정을 자처했다.

그렇게 담아온 북한 측 피해자들은 총 14명, 그러나 그들은 현재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다. 북한 측에 따르면 현재 북한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생존 피해자는 8명이다. 남한은 22명이다. 차차 사라져가는 역사의 산증인들을 이토 다카시는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두었다.

기획은 한국의 사진작가 안해룡이 맡았다. 그는 과거 이토 다카시의 작품을 접한 뒤 "북을 갈수 없는 사람이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부끄럽다는 생각보단 그런 작업을 빨리 소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전시 취지를 설명했다. 안 씨는 이 전시에 본인이 직접 찍은 남측 피해자 10명 사진도 함께 걸었다.

이토 다카시는 "한국의 위안부 마찬가지겠지만 북한 측 피해자들 또한 일본에 대한 분노와 한이 굉장히 강했다"고 했다. 가해국 국민인 그에게 물건을 던지는 피해자도 있었다. 그는 그러나 '스스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일본 정부나 국민이 과거 역사를 자꾸 잊으려는 식으로 가고 있는 풍조가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과거 일본이 아시아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후세에게 전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해서다. 일본인으로서는 외면하고 싶고 잊고 싶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인 스스로가 과거의 문제를 포착하고 기록함으로써 과거와 같이 침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배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서어리)

전시 첫날인 7일, 이토 다카시와 안해룡, 방청객들이 한자리에 모여 남북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한일 양국의 문제 등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다음은 해당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안해룡 : 북에 가서 처음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났을 때의 경험이 궁금하다. 그리고 어떤 계획을 세우고 할머니들을 만나왔는지도 궁금하다.

이토 다카시 :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도 마찬가지겠지만, 북한 피해자분들이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분노와 한이 굉장히 강했다. 처음 평양에서 이야기 들었을 때도 아주 격한 분위기였는데, 이후 여러 차례 방문했을 때도 피해자분들이 격렬하게 분노했다. 매번 피해자들은 그랬다.

아무래도 제가 일본인이고 남성이다 보니 피해자분들께서 저한테 표현하는 분노가 강했다. 때로는 저에게 물건 던지는 분도 있었고 달려들겠다는 듯이 여러 분노를 표현하면서 이야기하는 분도 있었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나 자신이 마주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려워도 계속 이야기를 들어나갔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원폭 피폭자, 군대에 끌려간 이야기 등을 들어왔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일제 피해자분들의 분노를 내가 껴안고 가야한다는 식으로 작정하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있었기에 북한 피해자들의 분노도 받아들이면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안해룡 : 한국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가 있는 데 반해, 북한은 국가적 차원에서 단체를 구성할 수 없을 것으로 안다. 그런데 어떻게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알게 됐고, 당국과 어떤 교섭을 통해 만날 수 있었나. 취재 준비 과정을 알려 달라.

이토 다카시 : 저는 북한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일본 식민지 지배하의 군인군속, 강제근로자, 원폭 피해자들도 취재할 수 있었다. 당국에 '이러이러한 피해를 입은 분들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고 허가받는 형태로 준비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막상 평양에 가기까진 내가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정보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취재를 하게 됐다. 제가 만난 모든 일제 피해자들을 합하면 60명 정도고, 그 가운데 위안부 피해자가 14명이다.

▲이토 다카시(왼쪽), 안해룡. ⓒ프레시안(서어리)
안해룡
: 평양이라는 공간이 취재하는 이에겐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피해 할머니 중 다수가 지방에 계실 텐데 방문도 어려웠을 것 같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 시공간적 여유가 있었을지 궁금하다. 인터뷰 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이토 다카시 : 취재상에 제약이 있는 나라다 보니 이것저것 무리가 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기록을 보면, 제가 할머니를 취재한 이후 오랜시간 지나지 않아 사망한 일이 대부분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터뷰할 때가 거의 마지막인 증언이 되는 상황이었다. 장시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피해자분들의 건강 문제 때문에 어려웠다. 그래서 만나서 들을 때는 그냥 그때 할 수 있는 만큼만 듣고, 중단했다가 다시 찾아가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진행했다. 혹은 여의치 않으면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북한에 재방문해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전시에 있는 곽금녀 할머니의 경우 옛일에 대해 기억이 상당히 상세했다. 그래서 제가 시간을 두고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오래지 않아 돌아가시고 말았다. 곽금녀 할머니는 여섯 번 정도 만나 취재할 수 있었다. 이후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다른 기회에 함경남도 단천에 있는 묘지에 가서 성묘했다.

안해룡 : 곽금녀 할머니를 만나러 가려면 평양에서 자동차로 이틀이 걸렸다고 들었다. 그렇게 지방에 가는 게 북한 취재를 하는 이로선 희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처음 방문 때는 사진과 녹음만 하다가 나중엔 비디오로도 인터뷰를 찍었다. 취재 자체도 어려운데 비디오 장비까지 가지고 가서 이야기를 담기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을 담고 싶었는지도 듣고 싶다.

이토 다카시 : 제가 꼼꼼하게 하려고 주의를 기울인 계기는, 책을 출판했을 때 편집 담당자가 한 말 때문이다. 그는 저에게 이 취재 내용들은 장차 굉장히 큰 보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취재를 해서 잡지나 책에 발표하면 그걸로 마무리되는 것 아닌가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좀 더 꼼꼼하게 정리하게 됐다. 그런데 그 말대로, 세월이 지나고 나니 그런 기록들이 역사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발휘한 것 아닌가 싶다.

ⓒ프레시안(서어리)


관객 1 : 북한에서 취재하려면 당국자를 통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당국자와 직접 면담해본 적 있는지 궁금하다. 북한에서는 위안부 피해자는 어느 정도 조사가 돼있는 것으로 아는데 군인군속, 피폭자 관련해서 북한 당국이 얼마나 조사했는지 아시는 내용이 있다면 알려달라.

이토 다카시 : 북한에서 일제강점화 피해자 문제에 대해 대응하는 것으로 된 기구, 주체가 있다. '조선인일본인위안부강제연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 약칭 '조대위'라고하는 곳이다. 이 위원회분들이 파악하기로 북측에서 조대위가 피해자들을 인터뷰해서 증언을 남긴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보존돼있는 것 같지 않다. 제가 북한에서 취재한 내용을 한국 국가기록원에 기증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북측에 확인을 했더니, 피해 증언을 남기긴 했는데, 그것들을 테이프로 쌓아두기만 했던 것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북이 일본에 과거 청산을 요구항목으로서 곧잘 꺼내놓긴 하지만 그것치곤 남긴 기록을 제대로 보존하는 작업을 열심히 한 것 같진 않다.

관객 2 : 한일 과거사가 양국 사이에 민감한 문제다.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일본의 과오를 취재하게 됐는지 그런 구체적인 이유가 있는지, 특히 북한에 집중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토 다카시 : 일본 정부나 국민이 과거 역사를 자꾸 잊으려는 식으로 가고 있는 풍조가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과거 일본이 아시아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후세에게 전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해서다. 일본인으로서는 외면하고 싶고 잊고 싶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인 스스로가 과거의 문제를 포착하고 기록함으로써 과거와 같이 침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배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기록이라 하더라도 남겨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 소박하게나마 기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북에서의 취재를 거듭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면, 일본 식민지 통치 하에서 북한이 당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겠다고 해서 북한에 취재 신청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계속 북한에 방문할 거란 생각하지 않아서 3개월 신청을 했다. 한번만 가서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려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내 뒤를 이어 누군가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그런 사람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다보니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게 된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북한 방문 횟수가 늘어나게 된 것 같다. 총 40번 정도 북한 방문했다.

관객 3 : 가장 기쁘게 와닿는 게 이런 작업을 하시는 이유가 '일본 역사를 위해서'라고 말한 부분이다. 그렇게 말씀하셔서 감사하다. 그런데 이렇게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을 찍는 것은 단순히 촬영 자체가 목적이 아닐 것이다. 일본에 대한 사과와 배상까지도 생각하셨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해결될 것이라고 보는가.

이토 다카시 : 역사 문제를 놓고 일본과 한국 사이에 껄끄러운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 사회 내 역사의식이 후퇴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베 정권 탄생 이후 굉장히 변화가 컸다고 생각한다. 아베 정권은 민족 배타적인 정권이고, 태생부터가 북한 납치문제를 이용해 탄생한 정권이다. 정권 탄생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북한을 비난하는 것으로 정권을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단순히 북한과 관련된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영향이 한국,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반영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굉장히 문제가 된 게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한 한국의 대법원 판결이다. 이것에 관련해서도 일본은 1965년에 다 끝난 문제를 이제 와서 거론한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1965년 조약 자체가 불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여러모로 재검토가 포함된 조약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일본이 보유한 잔류 문화재 문제만 해도 그렇다. 본래는 한반도 문화재를 일본에 가져간 것이니 반환해야 함에도 하지 않은 게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문제도 생각하면서 한국과의 관계, 아시아의 관계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서어리)

관객 4 : 올해 2월에 열린 '일본과거청산요구하는국제연대협의회'에 갔는데, 거기에 북한 분도 참석하셨다. 그 분이 말씀하시길, 현재 북한분 위안부 생존자가 여덟 명이라고 한다. 그동안 북한에 가서 만나보셨던 피해자분들 가운데 그 여덟 분이 계신 건지, 그리고 올해도 또 북한에 가실 계획이 있으신 건지 궁금하다.

이토 다카시 : 8명 생존자는 제가 만난 분들은 아니다. 제가 만난 14명은 1998년부터 10년 사이에 인터뷰했던 분들이고 그 외 분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생존자분들을 찾아 뵙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하고 신분확인한 사람이 많이 계시지만 공개적으로 증언하거나 발언하는 분들은 아주 소수이지 않나.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북한 당국 당사자로 등록은 했지만 매체에 밝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제가 그렇게 열심히 방문했는데도 인터뷰하기 어려웠다. 제한적으로 몇몇분들만 가능했다.

게다가 지방 도시에 가서 취재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곽금녀 할머니를 만나러 단천에 갔다고 했는데 이것도 평양에서 차로 이틀을 갔다. 열차를 이용해서 가는 것은 그보다 더 시간이 걸린다. 거리는 짧은데 인프라 안좋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물리적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이, 가령 조대위가 취재를 허가했다고 해서 그것만 갖고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복잡한 허가가 더 남아있다. 이를 테면 만나려는 사람이 있는 지역의 인민위 허가를 받아야하고 그 외 여러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남은 생존자분들을 만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관객 5 : 수많은 일본의 과오 중에 왜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더 천착했는지 궁금하다. 여성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이 일을 하는 데 더 작동을 한 것인가.

이토 다카시 : 일제 피해자들을 많이 만났지만, 성적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경우에는 해방 후에도 같은 어려움을 지닌 채 살아야 했다는 부분이 있다. 단적인 예가 정옥순 할머니다. 정옥순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입은 상처가 온몸에 있고 문신도 많다. 가슴 배, 입 주위와 입 안에도 문신이 있다. 위안소에서 도망치다가 잡히면 도망치는 이들을 죽이기 전에 몸에 낙서를 하고 희롱을 한다. 그래서 그것이 문신으로 새겨진 것이다. 정옥순 할머니는 그 문신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자신의 몸을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다고 했다. 어떤 분은 결혼을 포기했다는 분이 있다. 또 어떤 분은 남편이 세상을 떠났기에 과거 이야기를 밝힌다는 분도 있었다. 결국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것은 식민지 지배 참상이 매우 응집해서 담겨진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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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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