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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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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민미연 포럼]

3·1 절이 며칠 지났다. 올해는 100주년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그 뜻을 기리는 크고 작은 행사가 많이 열리는 것 같다. 그동안 우리 민족이 안팎의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나오며 한 세기가 흘렀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3·1운동이나 그 한 달 전에 일본 도쿄에서 한 2·8선언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이 민족해방의 단초를 가져다주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1919년의 파리 베르사유강화회의에서는 일본과 같은 전승국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아무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패전국들의 영토와 식민지들을 전승국들이 나누어 먹었을 뿐이다. 식민지 입장에서는 민족자결주의는 별 의미가 없었고, 당연히 한국인들의 기대도 배반을 당했다. 그러면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을까?

미국은 1914년에 시작된 1차 세계대전에 처음에는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19세기 미국의 전통적인 고립주의 외교 노선인 '먼로주의'에 따라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튀르크를 중심으로 한 동맹국이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 양측에 전쟁 물자를 팔며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영국이 우세한 해군력으로 독일을 해상봉쇄하고, 또 독일이 거기에 대응하여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펴게 되자, 중립을 지키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1915년 4월에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한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에 탔던 미국인 118명의 사망도 중립 노선을 어렵게 만들었다.

미국은 1917년에 4월 6일에 마침내 독일 측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는데, 이렇게 뒤늦게나마 참전을 결심한 것은 전후 국제정치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물질적 생산력을 보유하게 된 이상 미국이 국제 정치에서도 발언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은 것이다. 미국은 곧 대규모 징집과 함께 군수 생산도 늘려나갔다.

1917년 11월의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세력은 1918년 3월에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빠졌다. 막 시작한 사회주의혁명을 지키기 위해 독일에게 영토를 크게 할양하고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 연합국에서 러시아가 빠지자 크게 용기를 얻은 독일은 미군이 유럽에 상륙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1918년 3월에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1918년 8월부터 미군의 대병력이 유럽에 상륙하여 연합군 편에서 공세를 취하자 전세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병력이나 물자가 점점 고갈되어 가던 독일군은 이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결국 킬 군항에서 일어난 해군 수병들의 폭동이 전국으로 퍼지며 독일은 11월 11일 조건 없이 항복했다. 1차 세계대전은 결국 이렇게 끝났다.

윌슨은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18년 1월 8일, 전쟁 목적과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한 지침으로 이른바 '14개 조항'을 발표했다. 그리고 거기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면 민족자결주의는 윌슨이 처음으로 주장한 것일까?

19세기 후반 민족자결주의를 처음 주장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다.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민족자결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의 볼셰비키 대표자인 레닌은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1916년 3월에 완성한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자결의 원리>라는 글에 요약했는데, 그가 억압적인 체제에서 벗어날 인민의 권리로 정의한 민족자결의 원리는 자본주의-제국주의적 세계 질서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러시아의 구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혁명에 대해 러시아 내 소수종족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1917년 3월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레닌은 바로 종전을 외치며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으면, 강화조건 안에 '식민지해방과 함께 예속되어 있고 억압받는 비주권적 인민의 해방'이 들어갈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 1917년 11월의 볼셰비키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외무 인민위원 트로츠키는 작은 민족들의 자유를 보증하기 위해 싸운다는 연합국들의 주장을 위선적이라고 비난하고,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네 제국 내의 소수종족들을 억압하면서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제 러시아에서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사회주의자들의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그러니 영국이나 미국이 맞대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사실 민족자결 이야기를 처음 한 사람은 윌슨이 아니라,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이다. 그가 1918년 1월 5일에 런던의 영국노조연맹회의에서 전후의 영토 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자결권'에 대한 연설을 했다. 윌슨이 이에 자극을 받고 자신이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가진 인사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1월 8일에 부랴부랴 미국 하원에서 '14개 조항'을 끄집어낸 것이다.

'14개 조항'은 비밀조약이 아닌 공개 외교, 공해상의 자유항행과 무역의 자유, 군비 축소, 큰 국가나 작은 국가나 똑같이 정치적 독립과 영토적 완결성을 보증할 국가들 사이의 연맹 창설 등과 함께 전후 러시아·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튀르크·폴란드의 영토 문제 처리를 다루고 있는데 민족자결의 취지는 들어가 있지만 그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가 민족자결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은 2월 11일 하원 연설에서이다.

윌슨의 민족자결 주장은 1918년 중반 이후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됐고, 그래서 전 세계의 피억압 종족들이나 식민지인들은 윌슨의 이런 주장에 크게 고무되었다. 전쟁이 끝나면 혹시 민족해방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은 것이다. 한국인들이 파리 베르사유강화회의가 열리던 시기에 3·1운동을 일으킨 것도 그 때문이다.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을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 것이다.

그러면 윌슨은 정말로 큰 나라 안의 피억압종족들이나 식민지들을 해방시키려 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는 사실 민족자결에 대해 모호하게 이야기했고 민족이 무엇이지, 자결에 무엇이 필요한지도 잘 몰랐다. 종족성을 넘어서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가치가 민족을 만든다고 보아 종족성이 민족 정체성의 바탕이 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니 이런 인식으로는 긴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형성한 여러 종족들이 한 제국 안에 동거하고 있는 동유럽 여러 나라의 상황에 대응하기에 무리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단순한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대한 태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독일과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선전 포고를 1917년 12월까지 미뤘다. 미국이 이 나라와 당장 이해의 충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전쟁에 돌입한 후에도 가능하면 이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비밀교섭을 통해 단독강화를 하려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독일과 분리시켜 군사적 부담을 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예속 종족들이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독립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단지 자율성만 가지면 된다고 주장했다. 비밀교섭이 실패로 끝나고 전쟁 말기에 이들 종족들의 민족주의 운동이 더 커지자 미국은 다른 연합국들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은 그에게는 군사적 고려가 정치적 고려보다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럽의 민족들을 부적절하게 이해한 것은 미국식의 시민적 민족의 개념에 길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유럽의 소수종족들이 왜 민족자결 원리에 따라 반드시 독립을 하려고 하는지, 왜 미국 사람들과 같이 다른 종족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시민적 권리를 가지고 하나의 민족으로 합쳐져 살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후회를 하고 있다. "내가 모든 민족은 자결의 권리가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매일매일 우리가 부딪치는 (많은) '민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다. 당신은 내 말이 수백만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희망의 결과로 내가 경험한 불안을 모를 뿐 아니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그러니 우드로 윌슨같이 질이 안 좋은 인종주의자가 식민지인의 민족자결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졌을 리가 있었을까? 3·1운동 이후 파리까지 찾아간 우리 대표들이 문전박대를 당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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