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 불리는 앨런 그린스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이 이례적으로 조지 W.부시 미대통령을 공개질책했다.
지난 일년여간 지속돼온 미연준과 백악관 사이의 '밀월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호된 질책이었다.
월가에서는 그린스펀 의장의 이번 질책으로 부시대통령의 경제정책적 입지가 급속히 약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월가 등 세계경제계가 보다 중시하는 것은 부시가 아닌 그린스펀이기 때문이다.
***그린스펀의 경고, "정치논리로 경제를 망치지 말라"**
8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그린스펀 의장은 7일 열린 미연준 공개시장조작위원회에서 부시의 수입철강 보복관세 부과조치와 관련, "매우 매우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나 나는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공개리에 부시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린스펀은 평소 말을 아끼는 스타일이다. 이날 그린스펀이 한 말도 간략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무게나 파괴력은 대단하다.
그린스펀은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 부시가 대통령을 하던 까마득한 시절부터 미연준을 장기통치하고 있는 사실상의 '경제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린스펀의 이날 발언은 미국경제가 본격적인 회복 국면에 돌입했음을 선언한 가운데 나온 발언이어서, 특히 의미심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은 미국경제의 침체 따른 자신의 발언권 약화 때문에 부시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꾹 참고 있던 그린스펀이 마침내 입을 열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린스펀이 이날 한 말의 요지는 한마디로 "정치논리로 경제를 망치지 말라"는 경고였다.
***부시 결정은 경제의 ABC도 모르는 최악의 결정**
그는 부시의 이번 결정이 "매우 매우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철강관련 업체 및 노조들의 정치적 압박이 만만치 않았다.
한 예로 부시가 보복관세 결정을 내리기 며칠 전인 지난달 28일 워싱턴에서는 대대적 집회가 열렸다.
미국철강노조 조합원 3만명이 모여 보복관세를 매기라고 압박을 가한 것이다.
철강 관련 기업과 노동자가 많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록페러 민주당 상원의원도 이날 부시를 만나 압박을 가했다. 결국 부시는 철강업체의 로비와 노조의 압력에 굴복했다.
그린스펀은 그러나 부시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치논리, 그것도 '경제의 ABC도 모르는 정치논리'라는 이유에서다.
그린스펀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부시 때문에 어렵게 회복기미를 보이는 미국경제의 회복 속도가 늦춰지거나 아니면 또다시 침체의 수렁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보복관세같은 '보호주의로의 회귀'야말로 자유시장체제의 최대 수혜국인 미국경제에 '독약'과 같은 존재라는 판단에서다.
***파월 국무장관의 '블랙 코미디'**
한 예로 이번 철강문제만 해도 그러하다.
부시의 철강 보복관세 발표가 있자마자 6일 러시아는 미국산 닭고기 수입중단 조치를 발표했다. 외형상 이유는 '국민보건'이었다. 그러나 실제이유는 러시아의 대미 철강수출이었다. 러시아는 연간 5백40만t의 철강을 미국에 수출중이다.
미국의 닭고기·달걀 수출협회에 초비상이 걸렸다. 러시아는 미국 닭고기 수출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최대 시장이기 때문이다. 이 협회의 짐 섬너 회장은 "러시아의 수입 금지조치는 미국 양계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부시의 조치를 원망했다.
아이러니컬한 대목은 콜린 파월 미국무장관의 발언이다. 파월은 러시아의 닭고기 수입금지 조치가 나오자 8일 이고를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렇게 주장했다.
"러시아의 갑작스런 닭고기 수입금지 조치에 매우 실망했다.
러시아의 조치는 미국내 생산자들에게 큰 피해를 줄 뿐 아니라, 러시아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비용부담을 증가시킬 것이다."
한마디로 한 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파월의 이같은 말은 미국의 자동차업체 등이 철강 보복관세 조치가 나온 뒤, 부시정부에게 터트린 불만과 똑같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워싱턴포스트지는 보복관세가 결정된 직후인 7일 컬럼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부시의 이번 조치는 철강산업에 일자리 1개를 창출할 때마다 철강을 소재로 이용하는 여타 제조업에서는 10개의 일자리를 없애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또한 일부 제조업체들로 하여금 관세를 피해 미국을 떠나도록 만들 것이다.
이번 조치로 미국 소비자들은 자동차를 구매하면서 연간 10억달러의 새로운 세금을 물게 됐으며, 철강을 소재로 한 제조업 전체로는 80억달러를 떠안게 됐다.
이는 순전히 부시의 재선과 철강산업을 기반으로 한 지역의 공화당의원들을 위한 정치적 결정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 부시정부는 앞뒤 논리가 안맞는 갈팡질팡을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
***시작된 그린스펀의 대반격**
부시 집안은 대대로 그린스펀 의장에게 악감정이 많다.
지난 9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그린스펀이 부시를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경기침체로 인기가 없던 부시는 그린스펀에게 경기부양책을 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린스펀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경제문제는 내가 대통령"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 부시는 클린턴에게 참패했다.
아들 부시는 2000년 대선때 그린스펀에게 머리를 굽혔다.
그린스펀이야말로 미국경제의 참된 지도자라는 찬사도 아끼지 않았다. 그린스펀에 대한 악감을 드러냈다가는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 부시정부는 그린스펀과 거리를 두었다.
클린턴 정권시절 그린스펀 의장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반드시 일주일에 한두차례 만나 정책을 협의했다.
그러나 부시정부의 폴 오닐 재무장관은 그러지 않았다.
때로는 그린스펀의 중도 퇴진설을 흘리기도 했다. 그린스펀의 약발이 다했다는 식이었다. 노골적인 악감정의 표출이었다.
그린스펀은 참았다.
그러다가 경제가 활기를 되찾는 분명한 조짐을 읽자, 7일 부시를 정면공박하고 나선 것이다.
애숭이는 경제문제에서 빠지라는 식이다.
그린스펀의 반격이 시작된 셈이다.
월가에서는 그린스펀의 반격이 앞으로 부시에게 최대 걸림돌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수천명의 경제학자나 컬럼니스트가 공격하는 것보다 그린스펀의 한마디가 미치는 파괴력이 더 대단하기 때문이다.
과연 부시가 어떻게 대응할지, 지금 월가는 예의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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