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청와대 내 '보고 문화'는 이명박 정권이 참여정부의 성과를 백지화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최근 노영민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보고서 검토 시간이 지나치게 길다며, '보고서 문화'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도 내부 보고 시스템이 원점으로 회귀했다는 방증이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지냈으며, 현재 실용 글쓰기에 있어 국내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는 백승권 커뮤니케이션컨설팅엔클리닉 대표는 지난 1월 28일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보고서와 민주주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보고서를 쓸 것인가'가 약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의 취향에 따라 좋은 보고서와 나쁜 보고서로 나뉘게 되면,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다. 우리 사회가 공공기관이든, 민간기관이든 업무용 글쓰기에 기준과 표준을 세운다는 것은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만드는 데 필수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윗사람이 좋아하는 게 뭘까?' 계속 관심법을 해야 한다."
윗사람에 대한 '관심법'이 업무 평가의 최상위 항목인 사회에서 말단에서부터 최상위까지 각자의 권한과 책임을 인정받는 수평적 소통과 의사 결정 구조는 만들어지기 힘들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윗사람'의 뜻에 따라 의사 결정이 내려지는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지배적이다.
"'어떻게 소통하느냐'의 수준이 내용적 민주주의의 수준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걸어가야 할 길이 굉장히 멀다. 정치나 젠더 이슈는 최근 들어 민주주의로 진전해 가고 있지만, 커뮤니케이션 문화는 그에 비해 지체되어 있는 것 같다. (…) 문재인 정부는 공무원 사회의 명실상부(名實相符)함을 복원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 대통령이 '문서 혁신'을 국정 아젠다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정부 수장으로 공무원과 일을 하는데, 제대로 된 보고서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지시하고, 결정되면 결정된 대로 하고, 그에 따라 평가받는 구조를 만들어야 '내용적 민주주의'가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바람이 있다."
물거품 된 참여정부 보고서 매뉴얼, '문서 혁신'이 필요하다
프레시안 : <보고서의 법칙>(바다출판사 펴냄)라는 책이 있다는 말을 여기저기 했더니, '그런 책이 있느냐? 꼭 필요한 책이다'라고 공감했다.
백승권 : 최근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문재인 대통령이 보고서를 보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쓰고 있다며, "대통령이 검토해야 하는 보고서의 내용 등 총량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1월 23일 자 청와대 브리핑 참고) 그러면서 국정 운영과 정국 구상을 위한 대통령의 시간 확보가 절실하다며, 청와대 참모진들에게 대통령 대면 보고를 줄이라고 지시했다. 굉장히 시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으로 일할 때 '이지원(e知園)'에 보고서를 올리면, 다음 날 대통령 결재 후 열람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새벽 2시나 3시에 보고서를 확인하면, 굉장히 죄송했다. 업무를 보좌하는 입장에서 '대통령이 늦은 시간까지 보고서를 보게 한 것은 아닌가'라는 마음에 미안했다.
대통령이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보고서의 양을 무작정 줄일 수는 없다. 결국 보고서를 짧은 시간에 보고 파악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참여정부 때는 '청와대 보고서 매뉴얼'이라는 걸 만들어서 보고서의 내용이나 형식을 표준화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보고서를 보는 시간이 줄었다.
그랬다가 '이명박근혜' 정부 지나면서 참여정부의 보고서 방식이 없어졌다. 그래서 노영민 비서실장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대통령처럼 책임자 자리에 있는 사람이 보고서를 보는 시간을 줄이려면, 보고서를 표준화·매뉴얼화해서 중요한 사안을 한 페이지에 담아 파악할 수 있도록 청와대 직원의 보고서 문화를 개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 때 세간에 업무 방식이 'ABN(Anything But Noh.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하던 것은 모두 반대한다)'라는 말도 나왔는데, 노무현 정부 때 정형화한 보고서 작성이나 업무 처리 방식이 이후에 흐지부지된 것은 안타깝다.
백승권 :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당시 매뉴얼을 바탕으로 한 문서 작성 지침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몇 가지 지침만으로는 부족하다. '보고 내용을 어떻게 한 페이지에 잘 담아낼 것인가' 하는 것은 한두 페이지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좀 더 깊은 연구와 설명이 필요하다. 청와대와 정부 부처에 '문서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서 혁신'은 공무원 사회 국정운영의 혁신으로 볼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고서를 쓸 것인가'가 약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의 취향에 따라 좋은 보고서와 나쁜 보고서로 나뉘게 되면,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다.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게 뭘까?' 하고.
우리 사회가 공공기관이든, 민간기관이든 업무용 글쓰기에 기준과 표준을 세운다는 것은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만드는 데 필수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윗사람이 좋아하는 게 뭘까?' 계속 관심법을 해야 한다. 기업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우리 부장님은 이런 걸 싫어하는데, 국장님은 또 이런 걸 좋아한다'며 '어디에 기준을 둬야 하느냐?'고 묻는데, 기준을 하나도 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보고서의 기준을 사장부터 평직원까지 공유한다면,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기준에 맞추면 된다. 그럼, 보고서의 수준도 높아진다.
프레시안 : '문서 혁신'이 민주주의의 한 과정인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가져온다는 주장, 낯설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백승권 : 보고서 관련 강의도 하고 책도 쓰고 있지만, '어떻게 하면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혹은 소통의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에게 보고서 쓰기가 고역인 이유는…
프레시안 : 책에서도 '보고서와 민주주의'를 강조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보고서 쓰는 걸 참 어려워한다. 훈련도 안되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방식의 소통에 대한 문화가 전혀 없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말하는 데 대한 교육과 훈련이 안되어 있다.
백승권 : 그렇다. 역사적 맥락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식민지와 독재를 오랫동안 겪다 보니까 구체적이고 명백하게 글을 쓰는 사람일수록 불이익을 받았다. 그래서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말을 했다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는 소통 방식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글은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관념적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의중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을 못 한다. 그래서 자꾸 '저 사람 뜻이 뭘까?'를 점쳐야 한다. 서로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면,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특히 교육 과정에서 문학을 주 텍스트로 해서 국어를 배우다 보니,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 뼈대를 갖고 명확하게 드러내는 훈련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기자들 역시 기자 생활을 하기 전에는 그런 글쓰기 훈련을 한 적이 없을 것이다. 기자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그런데, 일반 직장인들은 오죽하겠는가.
국어 시간이나 글쓰기 시간에 논리적 글쓰기에 대한 훈련을 해야 하는데, 글이라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문장이나 멋있는 표현을 쓰는 것에 치우쳐져 있다. 문장력, 표현력, 어휘력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주장을 뚜렷하게 하고 그에 합당한 근거를 잘 제시하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논리적 글쓰기를 '잘했다'라고 칭찬하기보다는 '맞춤법이 틀렸다'거나 '어휘력이 빈곤하다'라는 지적을 받는다. 주장과 논리가 명확하면, 문장력이 부족해도 좋은 글이라고 인정해줘야 한다. 문장이 좋아도 읽고 나면 공허한 글이 얼마나 많은가. 안개와 같은 글이 너무 많다.
'어떻게 소통하느냐'의 수준이 내용적 민주주의의 수준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걸어가야 할 길이 굉장히 멀다. 정치나 젠더 이슈는 최근 들어 민주주의로 진전해 가고 있지만, 커뮤니케이션 문화는 그에 비해 지체되어 있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사실 소통 문화가 바뀌려면 윗사람이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 부분에서 선각자라는 생각이 든다. 청와대 업무 시스템을 만들고, 국가기록원을 세운 것 등 큰 틀에서 보면 하나로 연결된 일이다. 안타까운 일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 윗사람들은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여전히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지배적이고, 그에 따른 비효율이 너무 많다.
백승권 : 그렇다. 의사 결정 과정에서 낭비 요소가 너무 많다.
'이명박근혜' 정부에서는 대통령이 공식적인 메시지를 발표해도 일선 공무원들은 믿지 않았다고 한다. '말/글'이 '실제'와 명실하게 상부(相扶)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보고서를 어떻게 잘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윗사람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게 더 중요하다. '이분이 말씀은 이렇게 하셔도 속뜻은 이게 아니고, 저거야'라고 파악해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업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민주주의라는 것은 '말과 행동', '글과 실천'이 일치되는 것이다. 자기가 느낀 대로 말을 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고, 자기가 판단한 대로 행동해도 그 결과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많이 망가졌다.
문재인 정부는 공무원 사회의 명실상부(名實相符)함을 복원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 대통령이 '문서 혁신'을 국정 아젠다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정부 수장으로 공무원과 일을 하는데, 제대로 된 보고서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지시하고, 결정되면 결정된 대로 하고, 그에 따라 평가받는 구조를 만들어야 '내용적 민주주의'가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바람이 있다.
'영혼 없는 공무원', '영혼 없는 직장인' 생존 배경은…
프레시안 : 공무원들이 정말 잘하는 일 중 하나가 윗사람 심기에 맞춘, 맞춤형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공무원 사회의 명(明)과 실(實)이 상부하지 않는 부분인데…이런 점이 또 '영혼 없는 공무원'의 생존 배경이 되기도 한다.
백승권 : 공무원 교육과 기업체 교육을 하면서 느낀 게 있는데, 대부분 주어진 일을 잘한다. 그런데 자기 생각을 갖고 상대방을 설득하라고 하면 잘하지 못한다. 설득의 경험이 없는 것이다. 위에서 하라는 대로 기획서를 작성하고, 보고서를 쓰는 것은 잘한다. 그런데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이 생기면, 윗사람을 설득해야 하는데 설득하는 법이 없다. 설득을 잘 못 한다.
제대로 일을 한다면, 9급 공무원이든 7급 공무원이든 현장 주 책임자로 정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이런 정책을 펴야 한다'고 제안해야 하는데, 보고서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그저 '고객 만족', '업무 효율성', '수용자 중심' 등 레토릭만 늘어놓는다. 근거를 제시해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이 너무 약하다. 민간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프레시안 : 민주주의라는 것은 권한이 주어진 만큼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책임 때문이다. 또 윗사람이 어떤 일에 책임을 지는 일 또한 드물다.
백승권 : 좋은 보고서는 보고서를 쓴 사람의 결정과 판단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은 보고서는 무책임한 보고서다. 최초 작성자가 결정과 판단을 하면, 그걸 바탕으로 다음 단계에서도 결정과 판단을 하고, 그렇게 마지막 단계까지 결정과 판단이 쌓여서 최종적인 결정과 판단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것도 있고, 아랫사람이 결정과 판단을 내리는 것을 싫어하는 조직 분위기도 있어 대개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아니면, 자신은 결정과 판단을 하지 않고 참고 사항만 나열해 놓는다. '선택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하지만 최초 작성자부터 결정과 판단을 하면, 단계별로 거치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게이트 키퍼(Gate keeper)'가 된다. 단계별 게이트 키퍼가 없다는 것은 공이 수비수 한 명 거치지 않고 골대까지 직행하는 것과 같다. 윗사람의 판단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주무 부처의 일선 책임자보다 잘 판단할 수는 없다.
단계별 게이트 키퍼를 거쳐 결정된 사안을 실행해 좋은 결과가 나오면, 성과 역시 아랫사람부터 윗사람까지 공정하게 배분해야 한다. 어떤 조직의 보고서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매뉴얼을 만들다 보면, 그 조직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가 그대로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제대로 된 매뉴얼만 있으면, 이렇게 소모적으로 일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마음에 안타깝다.
궁극적으로는 보고서를 쓰는 아랫사람이나 보고서를 받아 보는 윗사람 모두 편해지는데,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모호함 내지 무질서 속에서 불편해도 익숙한 방식대로 처리한다. 참, 아쉽다.
제도가 바뀌어야 '소통 문화'가 바뀐다
프레시안 : 매뉴얼만 잘 만들면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매뉴얼이 있어도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백승권 : 맞다. 문화를 바꾸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문화는 그냥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바뀌면 문화가 마련된다.
담배 같은 경우도, 금연법이 시행된 뒤 흡연 문화가 바뀌었다. 젠더에 대한 것도 제도가 바뀌면, 문화가 바뀌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제도와 문화 사이의 괴리 때문에 과도기를 겪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회가 더욱 더 성평등 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보고서 매뉴얼은 제도 같은 것이다. 매뉴얼부터 바꾸고 실행하다 보면, 문화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제도나 매뉴얼이라고 하는 약속, 룰(rule)부터 바뀌어야 문화도 바뀐다고 제안하고 싶다.
프레시안 : 요즘 젊은 세대들은 직장 내 민주주의 문제를 지적하며, 고통스럽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기성 세대들은 이들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보고서 문화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세대 간 인식 차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백승권 : 그렇다. 서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룰을 정해놓고 대화하자는 것이다.
한 대기업 인재개발 임원이 논술 세대가 신입직원으로 들어오면 보고서 문화가 획기적으로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비(非)논술 세대보다도 실망스러웠다며 나름대로 이유를 분석했다. 비논술 세대는 입시와 상관없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했는데, 논술 세대는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은 읽지도 글은 쓰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교육과 사회가 제대로 뒷받침해 주지 않아서다. 한 입시전문가가 말하길, '논술 시험은 긴 주관식 문제'라고 했다. 주요 대학에서 논술 시험을 통해 수험생의 사고나 표현을 보는 게 아니라, 배경지식을 본다며 그게 무슨 논술이냐고 비판했다. 그렇다 보니, 학창 시절 배운 논술이 실제 커뮤니케이션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논술 세대에게는 또 이런 딜레마가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가 직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자리 잡게 하려면 보고서에 대한 기준을 줘야 한다. 그래야 이들이 조직 내에서 역할을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책에서도 썼지만, 보고서 쓰는 방법을 선배들 어깨너머 배운다. 좋은 선배를 만나면 빠르게 좋아지지만, 그렇지 않은 선배를 만나면 좋아질 가능성이 작다. 이렇게 개인적 능력과 운에 맡길 것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영어=능력'이 된 사회, 정작 글쓰기와 말하기는…
프레시안 : 젊은 세대들이 갈수록 문자를 읽고 쓰는 데 어려워한다. 영상매체에 워낙 친숙해서겠지만…. 이런 세대들이 사회 구성원이 되는 시대인데, 학교에서는 기본적인 독해 교육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의 평가 기준을 바꾸면, 바뀐다고 본다. 영어를 잘하면 '능력이 있다'로 인식되지만, 사실 토익은 평가 요소일 뿐 직장에서 영어를 쓸 일은 관련된 업무는 그렇게 많지 않다. 직장 내에서는 오히려 글쓰기와 말하기가 훨씬 더 활용되지만, 막상 이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는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공시(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부터 글쓰기와 말하기를 중요한 시험 과목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어능력시험' 등 글쓰기 관련 시험이 세 가지 정도 있지만, 이는 모두 국어 능력을 보는 시험이다. 글쓰기나 말하기와 같은 소통 능력을 보는 시험이 아니다.
공시부터 바꿔야 대학 입시 시장도 바꾸고, 초·중·고 교육 과정도 바꿀 수 있다. 지금은 영어가 초등학교부터 성인 교육에 이르기까지 과다하게 대표되어 있는데,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 국가가 공시 과목부터 바꾸면, 하나의 큰 흐름이 형성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게 바로 이것이다. 공시에서부터 글쓰기와 말하기 같은 소통 능력 시험을 반영하는 것. 그렇게 되면, 누구나 소통을 잘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소통을 잘하면 조직에서든, 가정에서든, 사적 관계에서든 많은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소통 방법을 배우지 못해서 자신의 뜻과 다르게 말하고, 그게 오해의 불씨가 돼서 갈등을 유발하는 경우를 정말 숱하게 보지 않나.
프레시안 : 우리 사회는 그런 문제를 '자기 성격 탓'이라고 보지만, 소통도 일종의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백종권 : 미국과 유럽 교육 대부분은 글쓰기와 말하기다. 책 읽고 요약하고 발표하고 등 대학 학부 때까지도 이 같은 교육이 이어진다.
프레시안 : 최근 글쓰기 책이 많이 나오고 잘 팔린다. 이런 트렌드를 볼 때, 사람들이 글쓰기와 소통의 중요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된 것 아닐까 싶다.
백승권 : '내용적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과거 직장 내 상명하달 방식이 아닌,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하다 보니 문서의 생산량이 많아졌다. 그리고 전에는 글을 쓰는 것은 작가나 기자와 같은 전문가만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페이스북 등 어디서나 진입장벽 없이 쓸 수 있게 됐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표현 욕구가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시작 단계라고 본다. 실제로 강의를 다녀보면, 글쓰기 강의를 처음 접한다는 사람들을 만난다. '글쓰기 강의, 몇 번 들어봤다'라는 사람들이 나타나야 본궤도에 올라왔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열풍 같아 보이지만, 아직 열풍은 멀었다.
프레시안 : SNS 등 다양한 자기표현의 장이 생기면서 글쓰기 진입장벽이 낮아졌다고 했다. 반면, SNS에서 보이는 확증편향의 문제 등 그런 수단들이 오히려 소통을 막기도 한다.
백승권 : 맞다. 하지만 발전이라는 것은 항상 정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역방향으로 갔다 정방향으로 갔다 갈팡질팡하면서 발전하는 것 같다. 소통의 문제도 젠더 문제, 남북관계 등과 마찬가지로 늘 갈팡질팡하지만 추세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그런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단기적 부작용으로, 추세 전체 또는 대세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은둔형 외톨이', 기성 세대의 소통 불능이 만든 문제다
프레시안 : 소통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부 청년들이 타인과의 소통을 어려워하며 스스로 침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백승권 : 젊은 세대가 문제가 아니라, 기성 세대가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기성 세대는 자라면서 부모와 거의 소통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자식과도 소통하는 법을 모른 채, 잔소리꾼에 '꼰대'가 됐다.
옳은 이야기를 옳은 방식으로 하는 게 꼰대다.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수용할까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옳은 이야기를 옳은 방식으로, 지당한 이야기를 지당한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자신의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어떻게 전달하면 상대방이 받아들일까?'를 고민해야 하는데,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옳은 이야기를 하는데 너는 왜 듣지 않아?', '엄마 말이 틀렸어?', '아빠가 너 잘되라고 하는 이야기지, 잘못 되라고 하는 이야기야?' 이런 이야기는 다 잔소리고, 꼰대 방식이다. 아이들 입장에서도 그 이야기가 옳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수용할 수 없다. 거부감부터 생긴다.
프레시안 : 젊은 세대뿐 아니라 기성 세대도 민주주의적인 소통 방식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다시 민주주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 같다.
백승권 : 기성 세대는 비록 부모와 소통하지는 않았지만, 부모의 무관심이라는 혜택을 받았다. 정말 먹고살기 바빠서 무관심이라는 자유의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부모들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정보도 많다 보니까, 아이들을 무관심 영역에 둘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와 소통도 안 되는 데다가, 부모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다는 강박감이 있다.
다 기성 세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386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목 놓아 외쳤지만, 소통의 민주주의는 배우지 못한 채 민주주의에 반하는 소통 방식을 직장과 가정에서 하고 있다. 우리가 반성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직장 내 소통 방식은 보고서니까 보고서를 매뉴얼화하고, 가정과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소통을 잘할 수 있는 말하기나 글쓰기를 훈련받아야 한다. 직장인들이 자기계발을 많이 하는데, 외국어를 배우거나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자기계발은 말하기를 잘하는 것이다. 어떻게 민주주적으로 소통할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자기계발을 하는 직장인은 별로 없다.
프레시안 : 글쓰기와 말하기는 평생교육의 영역이다. 하지만 중장년층에게는 낯선 이야기다.
백승권 : 직장을 은퇴했다고 해도 20~3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은퇴자에게는 건강과 재력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삶의 콘텐츠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제일 좋은 게 글쓰기고, 자서전 쓰기다. 노인들,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몰라 어려워하는데 자기 일생을 기록하는 걸 꾸준히 하면 어떨까? 글을 쓰는 것은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흔히 하는 말로, '앵그리 올드맨(Angry Oldman)' 시대다. 글쓰기를 하다 보면, 세대 갈등을 촉발하는 사회적 불만도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프레시안 : 글쓰기는 소통의 문제이자 민주주의의 문제라는 점에서 굉장히 공익적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적인 영역에서 사업이나 지원은 거의 없는 상태다. 정부나 지자체 등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
백승권 : 현재 공무원 승진 시험에 보고서 쓰기 관련 내용이 있다. 주로 보고서를 쓰기와 관련된 평가인데, 부처별로 따로 사설업체에 평가를 맡기다 보니 비용도 많이 들고, 표준화되지도 않았다. 국가 정부 차원에서 이를 표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예산도 절감되고, 시험에 대한 공정성과 권위도 부여될 것이다.
또 일부 지자체에서 자서전 쓰기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프로그램이 더 확산되면 좋을 것 같다.
보고서 쓰기 '꿀팁'…'독자의 관점'에서 써라
프레시안 : 이제까지 보고서와 소통 문화, 민주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해 얘기를 나눴는데, 오늘이라도 당장 보고서를 써야 하는 이들에게 실용적인 팁을 알려준다면? 보고서를 잘 쓰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점을 하나 꼽는다면?
백승권 : '독자의 관점'에 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독자 중심이라면, 보고서 내용을 설계하거나 표현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독자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소통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문서를 읽어줄 독자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또 독자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도움이 될지를 고민하고 보고서를 쓴다면 보고서 문제의 절반 이상이 해결된다.
독자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 핵심을 잘 요약해야 하며, △ 궁금해할 것을 우선으로 두괄식으로 쓰며, △ 이야기의 성격을 간추려 정리하며, △ 관념적·추상적으로 쓰지 말고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프레시안 : 지난해 업무용 글쓰기 매뉴얼 제작 및 컨설팅 전문업체 '커뮤니케이션컨설팅엔클리닉(C.C.C)'을 열었다. 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백승권 : 토익을 이기는 것이다. 토익이라는 것은 영어 시장의 상징적 존재지만, 글쓰기 능력이 토익 이상으로 평가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글쓰기 능력이 가장 훌륭한 능력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소통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말로 하는 소통도 중요하지만, 책임 있는 의사결정은 문서를 통해 이뤄지는 만큼 글쓰기 능력이 가장 우대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人스타'는 프레시안이 선도적으로 제기하거나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이슈와 연관된 인물을 선정해 진행하는 인터뷰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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