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돌출성 폭로인가? 아니면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반격인가?’
지난 88년 총선때 김홍일 의원에게 돈상자를 전달하는 중개역을 맡았던 내역을 폭로, 연말정가를 뒤흔들고 있는 김재옥씨의 발언 배경을 둘러싼 해석이 구구하다.
단순한 돌출성 폭로라면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의 도덕성 문제로 국한된다. 그러나 만약 김우중 전 회장이 귀국을 위한 사전 정지(整地)작업 차원에서 한 원격조정형 폭로라면, 앞으로 폭로반경이 여야 전체로 확대되면서 내년 대통령선거 국면에 미칠 파장이 일파만파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 여론은 그러나 이번 김씨의 발언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이번 파문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현재 외국에 도피중인 김우중 전회장을 조속히 검거, 정경유착의 뿌리를 발본색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못 잡는 거냐, 안 잡는 거냐’는 의혹을 불러 일으켜온 김 전회장 문제를 깨끗이 매듭지어야 한다는 주문인 것이다.
***“돈에서 풍기는 퀘퀘한 냄새가 방안에 진동했다”**
박정훈 전 민주당의원의 부인인 김재옥씨는 최근 월간조선 신년호와의 인터뷰에서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의 돈을 김대중대통령 장남 김홍일씨에게 전했다”고 주장, 가뜩이나 각종 ‘게이트’로 어수선한 연말정가를 밑둥채 뒤흔들었다.
“어마어마한 돈을 김우중 회장은 사과상자 같은 박스에 담아 우리 집에 보냈다. 1988년 무렵이었다. 그 돈을 김홍일씨가 한밤중에 찾아갔다. 나는 그 돈이 전달되는 현장을 보았다. 그 돈에서 풍기는 퀘퀘한 냄새가 방안에 진동했다. 그 냄새를 생각하면 지금도 골치가 아프다.”
김씨의 인터뷰 핵심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도착한 돈은 어디에 보관했나.
“현관에서 들어서자마자 바로 왼쪽에 있는 서재였다. 크기는 이 응접실의 반쯤 됐다(7~8평 추정). 서재에는 보료와 책장 하나가 들어있었는데, 그 나머지 공간에 차곡차곡 사과상자를 쌓았다. 천장까지 가득했는데,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질려버렸다. 그 시절 나는 우리 가족을 잘해주는 대우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저렇게 돈을 주고도 대우가 살 수 있을까 걱정했다.”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돈은 모두 몇차례 배달되었나.
“세번이다.”
-돈이 도착하면 어떻게 했나.
“김홍일 의원이 우리 집 바로 건너편의 한신아파트에 살았다. 김홍일씨는 그때 직업이 없어서 주로 집에 있었다. 홍일씨도 돈이 온다는 연락을 받아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집으로) 돈 배달이 끝나면 나는 아파트 앞 공중전화로 뛰어가서 홍일씨 집에다 ‘우리 집으로 전화하세요’라고 짧게 전화하면 눈치 챈 홍일씨가 집 밖의 공중전화 있는 데로 나가서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다. 서로 목소리를 아니까 이름은 밝힐 필요가 없었다. ‘도착했다’고 알려주면 홍일씨가 새벽 한두시쯤 차를 갖고와 싣고 갔다. 그만큼 보안을 요했다. 한밤중에 공중전화기 앞까지 뛰어다닌 기억이 생생하다.”
-돈 전달은 왜 세 번으로 끝났나.
“우리가 한신아파트에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그후 우리 역할을 대신한 사람이 김모의원이다. 남편 말로는 김의원 시절엔 우리보다 더 많은 돈이 전달되었다고 했다.”
***“2탄, 3탄이 준비돼 있다. 핵폭탄이다.”**
김씨의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면서 당연히 정치권과 언론이 발칵 뒤집혔다.
김씨는 세간의 높은 관심에 고무된 듯, 다른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한층 발언의 강도를 높여나갔다.
다음은 중앙일보와 18일 만나 한 인터뷰 내용이다.
-김 전회장이 왜 돈을 주었나.
“김 전회장은 돈 요청을 받고 두 번 거절했다. 그러나 세 번째 요구가 오자 우리집을 이용하게 됐다.
-상자는 몇 개나 왔나.
“단위나 수치나 무게에 대해선 상상도 못할 지경이었다. 돈 냄새가 진동했다. 신권은 휘발유 냄새, 구권은 퀘퀘한 냄새가 나는데 거의 구권인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파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왜 이제서 이런 얘기하나.
“권력이 팽팽할 때는 어떻게 얘기하나. 그동안 김대중 대통령이나 홍일씨와 단독 면담을 원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해보라는 것인지 응답이 없었다.”
-박 전의원이 낙천한 데 따른 보복 아닌가.
“그렇다. 공천탈락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남편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면담했는데, ‘그러게 왜 김상현이 따라다니느냐’고 했다고 한다.”
-다른 이유는 없나.
“김우중 회장을 그만큼 고생시켰으면 용서해줄 때도 된 것 아닌가. 지금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2탄, 3탄이 준비돼 있다. 이것은 그냥 인사로 한 거다.”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나.
“사과를 한다든가 김회장님이 들어와 일할 수 있게 한다든가 해야지.”
-추가로 폭로할 내용은 뭔가.
“핵폭탄이 있다. 도덕성에 대해서다. 이제 답을 기다려 보겠다.”
-김우중 전회장과는 어떤 사이인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도 김회장이 주신 거다. 주변 어떤 친인척보다 친하다.”
김재옥씨는 19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내용을 반복했다. 김씨는 특히 김우중 전회장 대목과 관련, “김대통령이 김 전회장의 돈을 갖다 쓴 만큼 적절히 처벌하고 기업인으로서 다시 일할 수 있게 하는 게 인간적”이라고 주장했다.
김씨는 “남편의 공천 탈락과 김 전회장의 신병문제에 대해 김홍일의원이 내년 1월6일 출국하기 전에 직접 듣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그러나 20일부터는 발언의 강도를 급속히 낮추었다.
남편인 박정훈 전의원이 각 언론사에 해명서를 보내 “88년 정치자금은 김대중대통령이 대우측에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며 “전달된 실제 액수도 사실보다 엄청나게 과장돼 있음을 분명히 밝혀둔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20일 오전 MBC라디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제2, 3의 폭로를 한다고 했는데...”라는 앵커의 질문에 대해 “이번 파장으로 너무 충격을 받아 가능하면 안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김우중 회장측에서 폭로하도록 시킨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는 물음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그 분에게 더 어떤 일이 생길까 상당히 갈등이 심했다”고 김 전회장과의 연관을 부정했다.
***일단은 우발적 발언같으나, 배경은 의혹**
김씨의 발언은 당연히 정치권, 그 중에서도 특히 청와대측의 예민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씨 발언후 발언의 진위 여부와 그 배경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김우중 전회장이 배후에 있는 게 아닌가라는 의혹을 갖고 가능성을 조사했으나 현재로서는 그럴 개연성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김씨가 부유한 집 출신으로 남편이 국회의원(92~2000년)직을 지낼 때에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러나 지난해 남편이 공천을 못받아 사실상 실직자 상태에 있고 그동안 그녀의 후견인 역할을 해온 김우중씨마저 대우그룹 해체로 더 이상 도움을 못줘 최근 들어서는 신용카드 빚마저 갚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문제의 발언을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러나 “김씨의 발언이 개인적으로는 우발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같은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기까지의 과정에 김우중 전회장의 측근들이 그녀를 언론에 알려주는 등 간접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김씨 발언의 1차적 타깃인 청와대의 분석인만큼 가장 사실에 근접한 분석일 듯 싶다.
문제는 그러나 이번 발언을 ‘한 때 잘 나가던 국회의원 부인의 심리공황적 발언’으로 가볍게 보아 넘기기에는 그 안에 함축된 의미가 너무나 간단치 않다는 데 있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당연히 ‘정경유착’ 문제이다.
국회의원 총선이나 대통령선거 때마다 정치권이 재벌들에게 손을 벌렸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정치권은 이를 ‘불가피한 관행’이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나 이같은 ‘관행’이 최근 각종 게이트에서 목격할 수 있듯, 아직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지 정치자금 수수의 대상이 기존의 재벌에서 한때 ‘신흥 재벌’이라 불리던 벤처들로 옮겨갔을 뿐이다. 청와대나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도 이번 파동에 대해 의외로 조용한 것도 이런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88년 당시 김홍일씨에게 전달된 액수와 관련, “사과 상자 하나에 들어가는 1만원권은 대략 2억5천만원정도가 된다”며 “과연 김씨 말처럼 방 천장에까지 닿을 정도로 쌓았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나 상자 십여 개만 전달됐어도 그 액수는 수십억원대에 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록 10여년전 일이라고는 하나 이처럼 문제가 불거진만큼 김대통령은 어떤 형태로든 국민에게 진상을 알리고 사과해야 할 것”이라며 “김대통령은 차제에 이런 과거의 정경유착 때문에 김우중씨를 구속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을 벗기 위해서라도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김우중씨를 조속히 검거해 법정에 세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우중 조기 체포만이 근원적 해법**
김씨 발언 중에서 또하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김우중씨에 대한 ‘인식’이다.
김씨는 인터뷰에서 “김우중 회장을 그만큼 고생시켰으면 용서해줄 때도 된 것 아닌가. 지금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2탄, 3탄이 준비돼 있다. 이것은 그냥 인사로 한 거다. 김회장님이 들어와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김씨가 김 전회장으로부터 집을 얻는 등 각종 특혜를 입었다 하나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어이없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김우중 전회장은 세계 자본주의사상 개별기업 규모로는 사상최대인 80조원대 기업파산을 일으킨 '경제범죄자'다. 그로 인해 무수한 이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쫓겨났으며, 국민들은 80조원을 혈세로 갚아야 할 판이다. 이런 중범죄자가 들어와 "적절한 법적절차를 거친 뒤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치기' 차원을 넘어선 '망발'이다.
문제는 이런 시대착오적 사고를 김씨는 물론, 김우중 전회장 자신조차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얼마전 한국경제신문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토로했다. 김 전회장 측근들에 따르면, 김 전회장은 내년 대통령선거전에 들어와 적절한 법적 요식절차를 거쳐 재계에 복귀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김씨 발언을 단순한 한 아낙네의 돌출 발언으로 보기에 너무나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주는 교훈은 단순명료하다. 김우중 전회장을 조속히 체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과거 정경유착의 진상을 백일하에 밝혀, 다시는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국민들이 80조원의 혈세를 대신 물어내는 데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라도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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