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각종 스캔들로 복마전적 혼란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국내최대 기업과 은행 등이 잇따라 강도 높은 ‘자정(自淨)’ 작업 및 ‘윤리경영’에 나서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다.
민간부문의 이같은 노력은 정치권의 잇딴 스캔들로 국가신인도가 급락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생존차원의 전략인 동시에, 앞으로 정치권이 계속해 부패고리에서 벗어나지 않을 경우 경제계는 독자적 길을 걷겠다는 ‘탈(脫)정치’ 선언으로까지 해석돼 주목된다.
전문가들은 경제계가 1류를 지향하는 반면 정치권은 계속해 4류 수준에 머무는 불균형 국면이 지속될 경우 정치가 경제 발전을 질곡시키고 있는 ‘일본형 장기불황’에 빠질 가능성이 큰 만큼 정치권의 시급한 자정노력이 요구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국민은행, "정치활동에 참여.관여하지 말라"**
국내 최대은행인 국민은행과 국내 최대기업인 삼성전자가 18일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자정작업에 나섰다.
국민은행은 18일 ‘윤리강령’을 제정하며 앞으로 유리알같이 투명한 ‘윤리경영’을 할 것임을 선포했다.
김정태 행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은 이날 오전 모두 4장으로 구성된 윤리강령 선포 및 실천서약식을 갖고 세계 초1류 은행이 되기 위한 최고 수준의 법적, 윤리적 기준을 준수할 것을 다짐했다.
김행장은 윤리강령에서 임직원의 근무 윤리와 관련, “임직원은 정직과 신용을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삼을 것”을 지시했다. 그는 평소 “곁눈질 하지 않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이 최고의 대우와 보상을 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김행장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위법 또는 부당한 행위를 인지하였을 경우 즉시 적절한 절차에 따라 보고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하며 고의로 누락하거나 은폐해서는 안된다”고 적시했다. 또한 “상급자는 하급자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려서는 안되고, 하급자는 상급자의 정당한 지시에 순응하되 부당한 지시는 거절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온정주의에 따라 비리를 은폐할 경우 동반 문책하겠다는 엄중한 경고 메시지였다.
국민은행의 윤리강령에서 특히 주목되는 대목은 다른 기업들의 윤리강령에서 볼 수 없는 “우리 은행의 명칭, 자산 또는 은행내의 직위, 직무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거나, 업무시간중 정치활동에 참여 및 관여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다. 선거철이 도래하면서 발생할지도 모를 ‘정치권 줄서기’ 등을 사전에 차단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앞으로 어떤 정치적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행장을 위시한 전체 임직원이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탈(脫)정치 선언이기도 했다.
윤리강령은 또한 공정한 직무 수행과 관련해 “업무와 관련해 금품, 선물, 향응 등 경제적 혜택이나 청탁, 압력 등 공정성을 저해하는 행위를 요구하거나 받아서는 안된다”고 못 박는 동시에 “직위를 이용한 사적 이익 추구, 은행에서 얻은 비공개 정보를 이용한 증권, 부동산, 기타자산의 매매 등 불공정 거래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김행장은 이날 선포식에서 “21세기는 윤리의 시대로 윤리경영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전제한 뒤 “최고 은행에 걸맞는 엄격한 도덕성과 높은 윤리의식을 갖춰 존경받는 은행원이 되자”고 말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뱅커(은행원) 하면 최고의 도덕률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며 “이번 윤리강령 제정은 통합 국민은행을 세계 초1류 금융기관으로 발돋음시키기 위한 노력의 시각인 동시에 내년부터 본격화할 각종 선거국면에서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선언”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삼성전자, 사내비리 대규모 숙정**
국내최대기업인 삼성전자는 18일 자체감사를 통해 임직원들이 40여개 협력사로부터 2백억원대 주식상납을 받은 것을 포함해 현금 및 금품 제공, 골프, 향응 등 도합 3백22억원대의 비리행위를 적발했다. 삼성전자는 이같은 감사결과에 기초해 임직원 52명을 징계했으며, 뇌물과 향응을 제공한 협력업체 10개사에 대해서도 무기한 거래정지조치를 내렸다.
삼성전자는 내년초 단행될 인사에서 이번에 적발된 임직원들에 대해 퇴사 등 강도 높은 인사조치를 내릴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앞서 삼성물산 등은 이미 자체감사를 벌여 협력업체들로부터 뇌물이나 향응을 받은 임직원들중 상당수를 퇴사조치하는 등 삼성그룹 계열사 전체가 강도높은 자정 작업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 등 삼성그룹의 이같이 강도높은 자정노력은 삼성전자 주식의 60%이상을 외국인투자가들이 보유하게 된 상황에서 “더 이상 코리아 스탠더드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에 따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그룹이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선 글로벌 스탠더드로 재무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국제수준의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됐다”며 “이번 감사도 세계 초1류 기업이 되기 위한 뼈아픈 자정 노력의 일환”이라고 밝혔다. 그는 “최근 들어서는 단순히 기업의 수익성뿐 아니라 기업의 도덕성까지도 함께 고려해 투자하는 게 국제투자업계의 큰 흐름”이라며 “자정 노력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 필수조건”이라고 덧붙였다.
***기업은 1류, 정치는 4류?**
국내최대 은행인 국민은행과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의 이같은 윤리경영 움직임은 앞으로 다른 기업 및 금융기관들에게도 적잖은 파장을 미칠 전망이다.
한 외국계 펀드매니저는 “한국의 간판기업인 국민은행과 삼성전자의 윤리경영 선언은 외국인투자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며 "외국계 지분이 많은 다른 기업이나 금융기관들도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요즘 쉼없이 터지는 정경유착 스캔들을 바라보는 외국계의 시선은 싸늘하다 못해 냉소적이기까지 하다”며 “국민은행이나 삼성전자의 윤리경영 선언은 각종 스캔들로 인해 한국의 대외신인도가 낮아지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과 함께 매도당할 수는 없다’는 위기감의 산물로 해석된다”고 덧붙였다.
한.미 합작은행으로 출범한 까닭에 국내 금융기관중 가장 먼저 선진경영기법을 도입한 한미은행 관계자는 “국민은행의 윤리강령 내용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못되나 왜 지금 이 시점에 그런 선언을 했느냐가 중요하다”며 “특히 정치권이 그 의미를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은행의 경우 “직원은 최우선적으로 도덕성 및 정직성을 바탕으로 하여 성실히 업무를 시행한다”는 첫 번째 조항을 비롯한 10개 항으로 구성된 ‘은행윤리강령’을 제정해 직원들마다 강령을 수첩에 넣어 다니고 있다.
모그룹 관계자는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베이징에서 ‘기업은 2류, 정부는 3류, 정치는 4류’라는 발언을 했다가 김영삼 정부로부터 호된 질책과 견제를 받았던 것이 벌써 10년전 일”이라며 “10년이 지난 지금 기업은 1류를 지향하고 있으나 정치는 여전히 4류 수준을 못벗어나는 한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가 계속해 4류 수준에서 머무르며 경제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할 경우 일본처럼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정치권의 각성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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